에르세르 대륙(完)/시작의 장(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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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 강림 의식
무슨 조화에서인지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한 세계가 산산이 조각나는 모습을 목격했으니 참담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드문드문 끊긴 기억 중엔 누군가의 목소리와 따듯한 손의 온도가 남아 있었다. 돌아오기 직전이었는데... 지켜내고 싶다던 말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엔 뜻 모를 절망만이 가득했다. 그 뒤엔... 그 뒤엔 어떻게 됐지? - 저쪽 세계의 강림 의식이 이쪽 세계에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나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로샤와 카이로스가 의도했던 강림 의식은 에르세르 사람들 모두를 아무도 없는 새로운 세계로 이동시기는 것이었다. 에초에 그 마법의 규모와 대가는 너무도 컸으며 계획은 성공하기 힘들어 보였다. 거기다 제물이 도망치고 의식 도중 불의..
2024.01.02 -
12화. 마법진과 변수
'우연히도 가는 길이 겹진' 나와 아인은 각자의 목적을 가슴에 품고 중앙광장을 탐색했다. 강림 의식의 제물 신분이기에 나는 마법진에 다가가는 게 무척 두려웠다. 그러나 알카이드를 돕기 위해선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인의 목적은 뭐지? 그러고 보니 나는 아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는 마치 안개 속에 자신을 숨긴 것 같았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안개는 내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일순, 광장 근처가 소란스러워졌다. 황성에 들이닥친 반란군들을 제압하기 위해 마법사와 호외병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혼란에 시선을 뺏긴 사이, 아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목표를 찾은 모양이다. 잠시 흐트러졌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내게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 마법진과 거리를 유지하려 에쓰며 ..
2024.01.02 -
11화. 회귀
흰옷 차림의 소녀가 제단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그녀는 마법의 수면 거울을 들고 있었다. 거울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어 번 가법게 두드린 그녀는 아무것도 비쳐 있지 않은 거울에 대고 속삭였다. [셜린] 네가 이 말을 듣고 있을 때 즈음, 나는 아마 이 세상에 없겠지. 그들은 너를 두고 우리의 제물이라 했어.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 하나만으로도 족해. 내 다음에 오는 사람은 희망의 존재가 될 거야. 결코 희생양이 되어선 안 돼. - 또 에르세르의 꿈을 꾸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는데,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한편, 만화 원고의 내용은 좀 더 자세해지고 묘사도 한층 세밀해졌다. 에르세르는 나의 세계가 아니며 내가 있어서도 안 될 곳이다. 알카이드가 에르세르의 일을 잊으라며 돌..
2024.01.02 -
10화. 다시 학교로
허공을 유영하는 동안 수많은 목소리가 날 불렀다. 나는 언제 이리 왔는지.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환각인지 원지 모를 장면들이 눈앞을 스치며 온통 정신을 어지럽혔지만, 간절히 바라면 된다는 알카이드의 마지막 말만은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 새하안 천장, 환자복, 그리고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 병원...? 병원이다. 돌아온 거야! 침대 옆엔 알카이드가 앉아 있었다. 다정한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그는 저쪽의 알카이드가 아닌, 내가 아는 알카이드 선배였다. 선배는 경연 중 일어난 사고에 쓰러져 있던 날 발견해 곧장 학교 병원으로 네려왔다고 했다. [나] 채린...! 채린이는요? 괜찮아요? 혼란스러운 건 나중 일이고, 채린의 안부가 가장 걱정됐다...
2024.01.02 -
9화. 은신처
사방에서 공격이 빗발쳤지만 알카이드가 필쳐준 보호막 덕분에 다치지 않았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쉴 새 없이 빛의 검을 벼려내 파란 치마의 첩자에게 쏟아부었다. 맹공을 당하면서도 무슨 일인지, 그녀는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반란군 시녀] 마탑 9성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과연 당해낼 수 없군... 그녀는 번개같이 무언가를 꺼내 입에 물더니 몸을 젖히며 쓰러졌다. 곧이어 엄청난 수의 얼음 나비떼가 그녀의 몸에서 쏟아져나왔다. [나] 알카이드, 조심해요! 몇 번을 봐도 기괴한 저 나비들은 적도 아군도 전혀 식별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무차별 공격이 이어졌다. 이쯤 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자들의 목적은 내 구출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내가 제물이 되는 상황을 막으려는 것뿐. 구출하지 못한..
2024.01.02 -
8화. 방문
탈진해 쓰러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사방을 뒤덮고 있던 가시덤불이 듬성듬성해졌고 새장의 문도 열려 있었다. 나는 탈출을 위해 했던 필사의 시도들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무슨 조화인지, 나를 구속하는 건 없었다. 상처도 하나 없는 데다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아주 개운했다. 잔뜩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방 한구석에 낯익은 사람이 있었다. [알카이드] 깨어나셨군요. [나] 알카이드! 날 구해준 게 당신이에요? [알카이드] 그래요. 우선 뭐라도 좀 드시겠어요? 날이 밝으면 저는 가야 해요. 알카이드는 내게 간단한 식사를 생겨주었다. 호박수프를 홀짝홀짝 마시며 곁눈질하니 알카이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깃든, 깊은 슬픔과 자괴감이..
2024.01.02 -
7화. 함정
그림 소울의 존재를 들키고 말았다. [로샤] 이제 그만! 짐의 궁전을 무너뜨릴 작정인가? [카이로스] 알겠습니다. 카이로스는 즉시 내게 얼음 마법을 시전했다. 눈앞에 서릿발이 흩날리는가 싶더니 뼛속까지 냉기가 스몄다. 온몸이 얼어붙어 반항은 커녕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순식간에 의식이 몽롱해지며 시야가 흐려졌다. [카이로스] 강림 의식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것일 뿐, 다지게 하진 않을 겁니다. 카이로스의 목소리가 점점 더 멀어졌다. 어느새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자마자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가시덤불로 둘러싸인 그 새장 안이었다. 가시덤불은 전보다 훨씬 더 촘촘하게 둘러쳐져 있었다. 도망질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카이로스는 새장 밖에서 나를..
2024.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