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회귀

2024. 1. 2. 16:44에르세르 대륙(完)/시작의 장

흰옷 차림의 소녀가 제단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그녀는 마법의 수면 거울을 들고 있었다. 거울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어 번 가법게 두드린 그녀는 아무것도 비쳐 있지 않은 거울에 대고 속삭였다. 

 

[셜린]

네가 이 말을 듣고 있을 때 즈음, 나는 아마 이 세상에 없겠지. 그들은 너를 두고 우리의 제물이라 했어.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 하나만으로도 족해. 내 다음에 오는 사람은 희망의 존재가 될 거야. 결코 희생양이 되어선 안 돼. 

 

-

 

또 에르세르의 꿈을 꾸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는데,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한편, 만화 원고의 내용은 좀 더 자세해지고 묘사도 한층 세밀해졌다. 에르세르는 나의 세계가 아니며 내가 있어서도 안 될 곳이다. 알카이드가 에르세르의 일을 잊으라며 돌려보내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그런데도 나는 계속 원고만 들여다보고 있다. 갈수록 이야기의 결말은 더욱 더 명확해졌다.

월계절 당일. 폭설에 파묻던 황성의 중앙광장에서 강림 의식을 하던 도중 알카이드는 마탑의 배신자에게 공격당했다. 이미 본 장면이지만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온기라곤 하나도 없는 원고를 그저 손으로 쓸어보기만 할 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저기에 내가 있었다면 조금이나마 도와주었을 덴데. 

 

[나]

아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나를 구해줬던 알카이드도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었지. 하지만 그는 나를...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누구의 목숨 같은 대가 없이, 당장 그쪽으로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지막 것엔 내가 직접 그려 넣었던 내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으음, 잠깐...! 이걸 잘만 이용하면 저쪽 세계로 갈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

 

 나는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보았다. 바로 앞쪽의 빈 공간에다 내가 현실 세계를 떠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러자 배경에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동굴이 하나 생겨났다. 그 입구엔 '출입금지' 팻말이 걸려 있었다. 팻말의 익숙한 심벌은 이곳이 세인트셀터 학원 소유 부지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어딘지 알 것 같다. 금기의 동굴! 

 재한 선배에게 들어서 동굴의 위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 길로 나는 바로 떠날 개비를 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가 겪은 일을 안개 속에다 숨겨두고 싶지도 않았다. 

 

-

 

 알카이드가 준 티아라를 꼭 쥔 채 나는 뒷산의 천문대에 도달했다. 한참 만에야 동굴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엉망으로 뒤엉킨 수풀과 넝쿨을 치워내자, 역시나 예상대로 그 '출입금지' 팻말이 삐딱하게 나를 반겼다. 나는 주저하다 팻말을 지우고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좁은 입구에 비해 동굴 내부는 꽤 넓었고, 바닥에는 마법진처럼 보이는 문양이 일부 남아 있었다. 마법진의 흔적을 어루만져보았지만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걸론 안 되나...?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소용이 없을까 봐 불안해졌다. 어떡하지?

 길게 심호흡하며 나는 차분히 생각에 잠갔다. 꿈속에서 에르세르 대륙을 수없이 봤다. 조각과 장식의 문양 같은 건 하도 많이 봐서 외울 정도였다. 마법진도 마찬가지니, 잘하면 내가 완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머릿속을 취어짜내며 끊어진 흔적들을 하나씩 펜으로 연결해갔다. 그러자, 강한 빛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순, 발밑이 쑥 꺼지더니 세상이 뒤집혔다.

 

-

 

에르세르에 무사히 도착한 건가? 내 발로 여길 다시 오다니... 시야가 돌아오니 긴장이 다소 풀렸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처음 와본 장소인데도 상당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궁의 구석구석까지 연결되어 있는 지하 통로로, 황성의 수로를 개조한 것이었다. 만화 속에서 아인이 종종 이용하곤 했던 통로이기도 하다. 통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나아가길 얼마쯤. 인기척이라곤 조금도 느끼지 못했는데, 누군가가 바로 뒤에 따라붙어 위협적으로 말했다. 

 

[???]

거기 서. 

 

돌아보니 아인이 똑바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

아..! 당신이었군요.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혼란스러운 동시에 곱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나]

당신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여기서 나가는 길만 알려줘요. 

 

그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 이내 벽에 걸린 횃불을 들고서 걸어 나갔다. 

 

[나]

...?

 

횃불이 이동하자 주변이 어둑해졌다. 내게서 몇 발짝 멀어진 그가 멈춰 서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아인]

나가기 싫은 모양이지? 

 

반가운 마음에 나는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나]

고마워요, 나는...

 

[아인]

시끄럽게 떠들지 마. 네 행선지 같은 건 관심도 없으니까. 

 

 내가 알아낸 정보를 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인이 믿어줄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의 걸음이 너무 빨라 따라가기도 벅찼다. 

 마침내 출구가 나타났다. 아인을 따라 올라가보니 다 쓰러져가는 집의 허름한 방 안이었다. 빈민가인가?

 

[나]

중앙광장으로 갈 거예요. 물론 위험하겠지만, 내겐 대처할 방법이 있으니 괜찮아요. 아인도... 부니 몸조심해요. 

 

그는 나를 힐끗 곁눈질했다.

 

[아인]

쓸데없는 말이 많기도 하군. 

 

[나]

고마웠어요! 

 

-

 

아인과 헤어진 뒤, 나는 계획했던 일들을 차근차근 실행했다. 강림 의식 당일에 제물이 당당히 얼굴을 들이밀고 나타나는 건 바보 짓이지. 나는 으슥한 골목을 돌며, 부대와 떨어져 단독으로 행동하는 호위병을 찾았다. 

 

[호위병]

누구... 으악! 

 

기절시킨 호위병에게서 벗겨낸 투구와 갑옷은 온몸을 가릴 위장복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마침 호위병의 체구가 작아 다행이었다. 황실 호위병은 중앙광장 근처에 이미 쫙 깔려 있을 테니 이 차림이라면 아무리 가까이 접근해도 절대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처음 입어보는 갑옷은 아주 무겁고 답답했지만 불평할 때가 아니었다. 

 

 

월계절, 중앙광장

 

 의식 준비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 같았다. 대상 범위가 넓어서인지, 마법진의 재료도 식물 뿌리나 보석 가루가 아닌 광장 전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중앙광장의 구조는 완벽한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니 광장을 마법진으로 활용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광장의 제단에 선 엷은 금발의 마법사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서 인장이 떠오르자, 비로소 마법진이 완벽하게 모습을 갖추었다. 

 

[카이로스]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알카이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예하. 다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마법사의 수제자인 젊은 마법사는 평소답지 않게 조금 주저했다. 사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이세계의 신녀에게 붙여뒀던 인장이 어째서인지 다시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신녀는 분명 사라졌다. 원래 세계로 돌려보냈으니 이 끔찍한 곳에 돌아올 리도 없다. 착각이겠지. 그는 마음을 비우고 마법 인장의 연결을 끊어냈다. 

 

이제야말로, 문제는 전혀 없다.

 

 

 나는 강림 의식이 임박한 중앙광장을 헤매며, 알카이드를 찾았다. 광장 중앙의 단상엔 제의의 주관자인 로사와 카이로스가 서 있었다. 아직 그 어떤 사고도 벌어지기 전인 것 같다. 한참이나 인파 속을 누비며 간절히 알카이드를 찾아다났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손을 낚아채더니 인적 드문 곳으로 끌고 갔다. 아인이었다. 

 

[아인]

다른 병사들은 전부 대열을 맞춰 이동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아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내려다보다 이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내뱉었다. 

 

[아인]

내 뒤로 따라와.

 

[나]

네? ...감사합니다.

 

아인은 집행인 부대 사령관의 정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나]

협력할 수 있을까요? 마침 당신도 혼자 다니는 것 같은데, 뒤를 따라다니기만 할게요.

 

투구 탓에 내 목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아인]

집행인 부대에 너처럼 작은 부하는 없어. 

 

[나]

까치발이라도 할게요!

 

다급히 그에게 말했다. 아인은 왜 늘 예상치 않은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걸까? 그리고 왜 이런 중요한 날 부하 없이 혼자 있는 거지? 혹시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나]

안 되면 뭐, 그냥 따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겠네요. 

 

 내 말에 아인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이것 봐. 역시, 뭔가 있다니까. 

 돌연 반란군이 난입했다. 아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른 몸놀림으로 조용히 그들을 처리했다. 나도 그림 소울을 소환하려 했지만, 미처 내가 움직일 틈도 없었다. 아인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정색했다. 

 

[아인]

방금 뭐라고 했지? 

 

[나]

그냥 따로 움직여도 괜찮다고요. 

 

[아인]

눈에 띄는 단독 행동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야. 

 

그는 은혜라도 베풀듯 거만하게 덧붙였다. 

 

[아인]

어차피 나도 지나가는 길이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얌전히 따라와. 

 

아인의 목적이 궁금했지만, 묻는들 답해주지 않을 게 민했다. 나는 조용히 그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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