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마법진과 변수

2024. 1. 2. 17:10에르세르 대륙(完)/시작의 장

 '우연히도 가는 길이 겹진' 나와 아인은 각자의 목적을 가슴에 품고 중앙광장을 탐색했다. 강림 의식의 제물 신분이기에 나는 마법진에 다가가는 게 무척 두려웠다. 그러나 알카이드를 돕기 위해선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인의 목적은 뭐지? 그러고 보니 나는 아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는 마치 안개 속에 자신을 숨긴 것 같았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안개는 내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일순, 광장 근처가 소란스러워졌다. 황성에 들이닥친 반란군들을 제압하기 위해 마법사와 호외병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혼란에 시선을 뺏긴 사이, 아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목표를 찾은 모양이다. 잠시 흐트러졌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내게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
 
 마법진과 거리를 유지하려 에쓰며 광장을 배회하던 중, 나는 마침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알카이드를 발견했다. 알카이드는 마법진의 한 축을 맡고 있었다. 핵심 위치로 보이는 그곳에서 그는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알카이드는 마법 시전에 온통 몰두하느라 내 존재는 물론, 어느 누가 다가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만화의 내용대로라면 알카이드는 곧 습격을 당할 텐데,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첫 번째 전조가 나타났다. 눈...! 한두 송이씩 흩날리던 눈발은 곧 맹렬한 눈폭풍으로 바뀌었다. 빠른 속도로 휘몰아치는 눈폭풍에 사방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알카이드의 뒤에서 한 마법사가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만화와 똑같은 상황이다! 마법사는 기다렸다는 듯 알카이드를 항해 얼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그림 소울을 준비해둔 나는 단번에 공격을 받아쳐 적을 쓰러뜨리고 알카이드를 무사히 지켜냈다. 그러나 정작 알카이드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그의 눈에 담겨 있었다. 결코 반가움이나 감동 같은 건 아니었다. 놀라운 동시에 몹시도 안타깝고 허망한... 그런 눈빛이었다. 
 곧이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나를 짓눌렀다.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힘의 실체는 무수히 많은 얼음 나비떼였다. 순식간이었다. 나는 얼음 나비가 일으킨 거대한 눈보라에 갇히고 말았다. 
 
[나]
알카...이드? 
 
얼음 나비떼가 시야를 완전히 가려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중앙광장 전체를 가득 메운 그 공포의 존재들은 꼭 세상 전부를 집어삼기려는 것만 같았다. 
 
-
 
얼음 나비떼와 마법사들의 격돌에 광장은 온통 아비규환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얼음 나비와 맞서기는커녕, 피해서 달아날 수조차 없었다. 
 
[도망가던 행인]
......
 
[맞서 싸우는 병사]
......
 
[공포에 질린 아이]
......
 
저항하려는 사람, 도망치려는 사람. 모두 얼음 나비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얼어붙어버렸다. 그 괴물들 앞에서 인간이란 그저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마법사들은 힘을 모아 빛의 장막을 세웠지만, 강림 마법진이 있는 곳을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장막 너머가 쥐 죽은 듯 조용해지자 소름이 끼쳤다. 이토록 고요한 재앙이라니. 끔찍했다.
 나는 있는 힘껏 내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볼 생각으로.
 얼음 나비에 습격당하는 사람이 보일 때마다 그림 소울을 소환해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눈앞에서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목격하며 절망에 몸서리가 쳐졌지만, 그 와중에 구해낸 사람들도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했다. 혼란의 한가운데, 바닥에 쓰러져 있던 피투성이 남자를 발견한 순간,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
...아인?!
 
 나는 모든 그림 소울을 소환해 그를 지켜내려 했다. 하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는 눈 쌓인 길에 누워 있는 그의 몸은 다른 이들처럼 얼어붙어 있지 않았는데도, 얼음 나비는 전혀 다가오질 않았다. 아인의 주변엔 끔찍할 정도로 많은 피가 기이한 형태를 이룬 재 고여있었다. 대량의 피를 홀리고 눈밭에 쓰러져 있었음에도 그의 몸엔 냉기가 전혀 감돌지 않았다. “ 아무래도 아인은 강한 적에 맞서 싸우다 당한 것 같았다. 혈흔은 꼭 설원에 검붉게 피어난 꽃처럼 보였다. 이 상황이 너무도 비참하고 안타깝고 혼란스러웠다. 
 돌연 마법진에서 파란빛의 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했던 의식이 마침내 마지막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폭설과 얼음 나비... 모두 낯익은 장면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필쳐지는 광경만큼은 만화에서 본 것과는 사뭇 달랐다. 로사와 카이로스의 상황이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카이로스는 어깨의 심각한 상처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눈밭 위에 망연자실 서있는 나를 항해, 알카이드가 천천히 다가왔다. 
 
[나]
알카이드, 의식은... 성공한 거예요? 
 
내가 지금껏 그깟 눈보라와 나비 때문에 세계를 통째로 옮길 필요가 있나 생각했던 '그깟' 눈보라와 나비의 실체, 이 순수한 공포와 절망에 대해선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알카이드는 눈보라에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목소리에서 다소 피로가 느껴졌지만, 그는 평소처럼 상냥한 얼굴이었다. 
 
[알카이드]
아직이요... 하지만 곧 완성이에요. 
 
알카이드는 절망에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서 있던 나를 이끌고 어던가로 향했다. 그리고 간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카이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켜내고 싶어요. 
 
말을 마진 그는 나를 끌어안은 채 빛이 일렁이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이 설마 마법진의 중앙일 줄이야! 
 

강림의식의 목적은 대륙 전체를 그대로 옮기는 데 있다.
알카이드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그는 줄곧 욕심 없고 소박한 이였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구할 수 있는 이들만이라도 구하려 했던 것이다.

'에르세르 대륙(完) > 시작의 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말. 강림 의식  (0) 2024.01.02
11화. 회귀  (0) 2024.01.02
10화. 다시 학교로  (0) 2024.01.02
9화. 은신처  (0) 2024.01.02
8화. 방문  (0) 2024.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