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방문

2024. 1. 2. 15:14에르세르 대륙(完)/시작의 장

 탈진해 쓰러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사방을 뒤덮고 있던 가시덤불이 듬성듬성해졌고 새장의 문도 열려 있었다. 나는 탈출을 위해 했던 필사의 시도들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무슨 조화인지, 나를 구속하는 건 없었다. 상처도 하나 없는 데다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아주 개운했다. 잔뜩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방 한구석에 낯익은 사람이 있었다. 

 

[알카이드]

깨어나셨군요.

 

[나]

알카이드! 날 구해준 게 당신이에요? 

 

[알카이드]

그래요. 우선 뭐라도 좀 드시겠어요? 날이 밝으면 저는 가야 해요. 

 

알카이드는 내게 간단한 식사를 생겨주었다. 호박수프를 홀짝홀짝 마시며 곁눈질하니 알카이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깃든, 깊은 슬픔과 자괴감이 낯설었다. 

 

[나]

왜 그렇게... 힘들어 보여요, 알카이드? 혹시 날 도와줘서 곤란해진 건가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날 위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알카이드]

당신은 우리 세계의 사람이 아니잖아요. 관련도 없는 일로 일방적으로 불려와 고통받고 있으니...

 

[나]

고마워요, 알카이드. 

 

내 편이 한 명이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요기를 끝내자 알카이드는 식기를 정리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알카이드]

날이 밝기 전까진 이 안에서 자유롭게 쉬어도 돼요. 흔적은 내가 책임지고 지위줄 테니. 

 

[나]

고마워요, 알카이드. 

 

 나는 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를 가두었던 새장은 최근에 임시로 지어 넣은 것 같았다. 벽 쪽의 정식 제단, 그게 바로 이 방이 만들어진 진짜 목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쪽 세계에 처음 도작했던 때가 떠올랐다. 이곳엔 새장과 마법진, 저 제단, 그리고... 채린과 꼭 닮은 모습을 한 흰옷의 소녀가 숨져 있었지. 나는 이름 모를 소녀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알카이드에게로 다가갔다. 

 

[나]

알카이드. 당신도 마법시아니 내가 어떻게 이 세계로 소환됐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죠? 

 

[알카이드]

당연히 알고 있지요. 나도 의식에 참여했으니까요. 

 

[나]

그렇다면, 내게 말해줄 수 있어요? 알카이드더러 날 다시 보내달라는 뜻은 아니에요. 나를 제물로 삼는 대신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거 예요. 내가 살던 세계는 단시간에 많은 얼음을 녹일 기술력이 충분하니까요. 물론 평범한 방법으론 소용이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분명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알카이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알카이드]

불가능해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을 이곳에 불러오기 위해서도 큰 대가를 지러야 했어요. 특히나 내겐 너무도 가혹한...

 

 '대가'라는 대목에 이르러,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뭔가가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소환한 마법진 위에 있던, 채린과 똑같이 생긴 소녀. 어쩌면 알카이드가 말하는 대가란...  확신까지는 못 해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는 이 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이다. 

 

[나]

알카이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알카이드가 돌연 입구를 돌아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알카이드]

쉿, 인기척이 납니다. 숨어 있어요. 

 

과연 문밖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나는 급히 새장으로 들어가 서둘러 문을 닫았다. 

 

[궁중 시녀]

알카이드 님, 방 안에서 소리가 들려 확인자 들렀습니다. 

 

[알카이드]

아무 이상도 없으니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궁중 시녀]

알겠습니다, 알카이드 님. 

 

 알카이드가 미처 대꾸도 하기 전, 날카로운 빛의 검이 그에게 쇄도했다. 명백한 마법이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시녀라니! 알카이드를 공격하는 걸로 봐선 마탑 소속은 아닌 것 같은데. 알카이드가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자, 어디신가 무기를 든 사람들이 튀어나와 그를 에워쌌다. 언제부터 매복하고 있었던 걸까?

 파란 치마를 입은 시녀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새장 문을 열고 말했다. 

 

[궁중 시녀]

안심하세요 신녀님. 저희는 실버나이트 님이 보내신 반란군입니다. 당신이 그들의 제물이 되는 것을 막으러 왔습니다. 

 

[알카이드]

그녀에겐 너희의 도움 따위 필요치 않아! 

 

알카이드가 재빨리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동시에 반란군들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습격을 당한 듯 일제히 고꾸라졌다. 또 다른 병사들이 나타났다. 첩자는 병사들에 합세했고, 그 공격은 나를 전혀 피해 가지 않았다.  

 

[나]

잠깐, 나를 구출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어? 이게 어딜 봐서 구출인데?

'에르세르 대륙(完) > 시작의 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화. 다시 학교로  (0) 2024.01.02
9화. 은신처  (0) 2024.01.02
7화. 함정  (0) 2024.01.02
6화. 취조  (0) 2024.01.02
5화. 처치  (0) 2024.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