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다시 학교로

2024. 1. 2. 15:25에르세르 대륙(完)/시작의 장

허공을 유영하는 동안 수많은 목소리가 날 불렀다. 나는 언제 이리 왔는지.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환각인지 원지 모를 장면들이 눈앞을 스치며 온통 정신을 어지럽혔지만, 간절히 바라면 된다는 알카이드의 마지막 말만은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

 

새하안 천장, 환자복, 그리고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 병원...? 병원이다. 돌아온 거야! 침대 옆엔 알카이드가 앉아 있었다. 다정한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그는 저쪽의 알카이드가 아닌, 내가 아는 알카이드 선배였다. 선배는 경연 중 일어난 사고에 쓰러져 있던 날 발견해 곧장 학교 병원으로 네려왔다고 했다. 

 

[나]

채린...! 채린이는요? 괜찮아요? 

 

혼란스러운 건 나중 일이고, 채린의 안부가 가장 걱정됐다. 그러나 알카이드 선배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알카이드]

유감이야.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심장마비였대... 고통 없이 그 자리에서 떠났다고 했어. 

 

내 심장도 멈취버린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아직 꿈속이거나 또 다른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이게 진짜일 리 없어! 그럴 순 없다고! 

 

[나]

이거 꿈이죠...? 

 

[알카이드]

괜찮아? 의사를 불러올까? 저기...

 

 겨우겨우 감정을 추스른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별들의 경연' 이후의 상황을 물었다. 알카이드 선배는 사고 당시 나타났던 마법진을 목격하지 못한 듯했다. 채린과 내게 발생한 변화 역시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의문의 폭발로 아수라장이 된 경연장에서 선배는 나를 찾으러 돌아다났다고 했다. 그리고 무대 뒤편에서 이상한 드레스를 입고서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단다. 

 저쪽 세계에서 입고 온 옷에 대해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한다고 믿을 것 같지도 않아 대충 둘러댔다. 그 드레스는 경연이 끝나면 있을 이벤트 때문에 학교 측의 부탁을 받아 입고 있었던 거라고. 

 

[알카이드]

빨리 깨어나서 다행이야. 의사는 특별히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라곤 했지만, 그래도 많이 걱정했거든.

 

그는 병상 근처의 수납장을 열었다. 안에는 내가 입고 있던 드레스와... 티아라가 있었다. 설린의 티아라였다. 

 

-

 

 몸에 큰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알카이드 선배는 퇴원을 도와주었고, 나는 홀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개학이 연기되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평소와 달리 몹시 한산해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곳만 같았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별들의 경연' 포스터를 보니 가슴이 답답하고 입안이 바짝 말랐다. 

 채린이 죽었다. 그 착하고 순수하기만 하던 내 친구가, 작별인사도 못 나눈 채 영영 가버렸다. 저쪽 세계의 알카이드는 모든 걸 꿈이라 생각하고 잊어버리라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

다. 

 

 이세계의 셜린은 제물이었지만, 현실 세계의 채린이 잘못된 건 이상했다. 앞당겨 개최된 '별들의 경연', 잘못된 숙소 배치로 채린과 내가 만나게 된 일, 신입생인데도 첫 순서로 무대에 오른 채린... 

 이 모든 일들이 다 우연이었을까? 

 왠지... 마주칠 때마다 묘하게 불편하던 조나단 이사장이 연관되어 있을 거란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

예신을 만나 상담하고 싶었지만, 전화를 아무리 걸어도 그는 받지 않았다. 예신은 다른 일도 하고 있으니 바쁘다는 걸 알고 있지만, 하필 이럴 때 연락이 닿지 않으니 서운함이 밀려왔다. 줄곧 돌아오고 싶었던 집에 돌아왔건만, 그것만으로 모든 일이 다 마무리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고양이 녀석이 걱정 없는 얼굴로 다가와 애교를 떨었다. 녀석에게 줄 통조림을 따는 동안 나는 내내 채린을 생각했다. 그녀의 수줍던 미소를 떠올리며, 나는 가혹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

 

어쩌다 〈시공 속에서〉의 원고를 필쳐볼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에르세르에 다녀온 뒤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원고를 들춰보던 중,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맨 마지막 부분에 작업한 기억이 전혀 없는 내용이 그려져 있었다.

 

황제는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려다 실패하고, 실버나이트는 극적으로 되살아나 소녀를 부르지만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 둘은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다시 한번 대결을 시작했다. 원고의 마지막 칸은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 

[나]

...?

 

원고가 저 혼자 늘어나버렸다. 말도 안 돼. 설마 내가 에르세르에 다녀온 것 때문일까? 혹시... 내 만화가 저쪽 세계와 이어져 있는 걸지도! 

 엉뚱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서둘러 펜을 집어 들었다. 마음을 다잡은 나는 하늘에다 커다란 태양을 그려 넣었다. 그런 뒤, 두텁게 쌓인 눈에다 효과를 덧씌워 녹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림을 완성한 순간...

 새로 작업한 부분의 잉크는 종이에 흡수되기라도 한 것처 럼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저쪽 세계에서 일어날 일을 예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림은 처음 그대로였다.

 되살아난 실버나이트와 끝없는 폭설... 이게 에르세르 대륙의 미래라고? 슬럼프로 전혀 진행되지 못하던 만화가 저절로 그려지다니, 예전이었다면 뛸듯이 기뻐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기뻐할 수 없었다. 

 원고 앞부분도 몇 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완성된 그림은 아니었고, 조각조각 끊어져 있는 콘티였다. 아인이 검은 말을 타고 달려가거나, 알카이드가 빛을 소환해 얼음 나비를 되지하는 장면 같은... 모두 내가 그곳에서 겪은 일들이었다. 그러니 원고의 변화가 에르세르와 관련되어 있는 건 분명했다. 

 페이지를 계속 넘겨보니, 곧이라도 사라져버릴 듯 위태로워 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흰옷을 입은 그녀는 제단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채린, 아니 셜린이었다. 두 사람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심장이 조여들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제단 앞의 그녀는 고요한 가운데 몹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마음이 아파 외면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원고의 내용은 계속해서 바뀌어갔다. 마치 저쪽 상황을 계속 내게 알려주기라도 하듯 말이다. 월계절이 다가올수록 이세계의 사람들은 점점 바빠지고 있었다. 의식을 계속하려는 걸까? 제물 없이도 가능한 거였어? 

 

-

 

아인은 깊은 터널 같은 곳을 날쌔게 뛰어다났다. 무일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임무 중은 아닌 듯했다. 주변에 부하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알카이드는 주로 밤에 설원에서 나타났다. 나를 놓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상급 마법사답게 어려운 일을 담당하기 때문인지. 그는 매번 인적 드물고 척박한 곳에서 얼음 나비떼로부터 무자비하게 습격당하곤 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원고의 마지막 장, 강림 의식 당일 황제와 실버나이트가 결전을 필지는 대목을 필쳐보았다. 

가장 궁금한 건 알카이드가 어쩌고있는지였다.

알카이드는 강림 마법진의 한 축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뒤에서 한 마법사가 그를 습격했다. 강림 의식이야 어찌 되든 알카이드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그 장면만큼은 미치도록 바꾸고 싶었다. 소용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알카이드를 괴롭히는 마법사 위에 커다란 몽둥이와 양동이를 그려 넣었다. 역시나 그 그림들은 아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나]

(됐어, 나랑 상관없는 일인데...)

 

나는 마음이 불편해 펜을 내려놓았다. 만화는 점점 기이해졌다. 겨우 하룻밤 새 대륙 전체가 폭설로 뒤덮여버리다니, 아무리 얼음 나비가 증식했다 해도 뭔가 이상하다. 인상을 찌푸리며 원고지를 내려다보던 중,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에르세르의 옷을 입은 나를 원고에 그려보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뜻이지, 이건? 나는 원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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