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은신처

2024. 1. 2. 15:19에르세르 대륙(完)/시작의 장

사방에서 공격이 빗발쳤지만 알카이드가 필쳐준 보호막 덕분에 다치지 않았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쉴 새 없이 빛의 검을 벼려내 파란 치마의 첩자에게 쏟아부었다. 맹공을 당하면서도 무슨 일인지, 그녀는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반란군 시녀]

마탑 9성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과연 당해낼 수 없군...

 

그녀는 번개같이 무언가를 꺼내 입에 물더니 몸을 젖히며 쓰러졌다. 곧이어 엄청난 수의 얼음 나비떼가 그녀의 몸에서 쏟아져나왔다. 

 

[나]

알카이드, 조심해요! 

 

몇 번을 봐도 기괴한 저 나비들은 적도 아군도 전혀 식별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무차별 공격이 이어졌다. 이쯤 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자들의 목적은 내 구출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내가 제물이 되는 상황을 막으려는 것뿐. 구출하지 못한다면 아예 망가뜨려 제물로 쓰지 못하게 만들려던 거겠지. 

 

[알카이드]

정신차려요! 

 

알카이드는 넋이 나간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가까스로 정신을 자린 나는 그와 함께 차분히 얼음 나비를 물리쳤다. 

 

[나]

다쳤어요? 나 때문에...! 미안해요, 알카이드...! 

 

[알카이드]

난 괜찮아요.

 

그는 어깨를 움직여보였다. 분명 얼음 나비에게 닿았는데, 그 비슷한 흔적조차 없다. 내가 잘못 보기라도 한 걸까? 침묵에 잠긴 주변을 둘러보며 나는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참혹해 자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알카이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리하기는 힘들게 돼버렸군요. 무엇보다 카이로스 예하께 마력 파동을 감출 수 없겠어요. 

 

[나]

내가 새장에 다시 들어가 갇힐게요. 알카이드가 반란군의 습격으로부터 날 보호해준 건 사실이잖아요. 

 

알카이드는 나를 바라보며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알카이드]

...이미 늦은 것 같군요. 

 

호위병들의 절도 있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긴장으로 심장이 금세 멈출 것만 같았다. 그때, 돌연 알카이드가 내 팔을 붙잡았다. 

 

[알카이드]

더 이상은 못 참겠어. 무력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건 지긋지긋하다고. 날 따라와요! 

 

그는 내 손을 잡고 문밖으로 향했다. 그리곤 수색 중인 호위병의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알카이드의 손에서 퍼져나온 기묘한 빛은 금세 우리 둘의 몸 전체를 뒤덮었다. 호위병들이 우리 쪽으로 곧장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입술이 바짝 말랐다. 

 

[호위병]

아무도 없어! 제길, 아무래도 반란군에게 납치당한 것 같다! 대장님께 당장 보고해!

 

수색 중이던 호위병은 나와 알카이드의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가면서도 우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알카이드]

쉿, 조용히. 내게서 떨어지면 안 돼요. 

 

 알카이드가 내게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우리 온몸을 감싸고 있는 기묘한 빛이 한층 강한 파동을 발했다. 마탑 9성 고위 마법사의 일원인 알카이드의 마법은 빛을 기반으로 한다고 했다. 그러니 빛의 성질을 조종해 사람의 시야를 속이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알카이드는 나를 데리고 손쉽게 계단과 복도를 지났다. 도중 호위병과 마법사들을 몇 번이나 마주겠지만, 아무도 우리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호위병들을 따돌린 후로도 우리는 한참을 다리가 아플 정도로 걸었다. 이윽고 으슥한 모퉁이의 어떤 문 앞에 다다랐다. 

 

[알카이드]

이리 오세요. 여긴 안전해요. 

 

-

 

쪽문 안쪽에는 아담한 방이 하나 있었다. 가구와 책들의 상대로 보아 누군가가 최근까지 살았던 곳 같았다. 

 

[나]

알카이드, 여기는....

 

[알카이드]

여기서 잠시 숨어 지내요. 나가볼게요. 너무 오랫동안 수색에 참여하지 않으면 의심받을 테니까. 

 

알카이드는 떠나기 직전에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알카이드]

절대 나가지 말고 여기에만 있어야 합니다. 

 

-

 

나는 알카이드가 안내해준 은신처에 몸을 숨긴 채 시간을 보냈다. 잘 눈에 띄지 않는 곳인지, 더 이상 호위병들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난 밤이었다. 반란군 첩자는 강림 의식을 막는 목적에만 충실했을 뿐, 나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쩌면 이쪽 세계의 실버나이트는 〈시공 속에서〉 속 인물처럼 고결한 인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줄곧 나를 보호해준 알카이드에게 더 고마워졌다. 

 그런데, 이 방은 누구의 방이며, 알카이드는 이곳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나는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상에는 마른 꽃, 보석 같은 것의 가루와 함께 이상한 글씨가 적현 종이가 놓여 있었다. 

 

[나]

수면 거울의... 금기? 

 

양피지에 적현 것은 처음 보는 언어였지만, 어째서인지 읽을 수 있었다. 수면 거울...? 어디신가 들어본 단어 같은데. 

 

[로샤]

설린의 수면 거울로 보아서 이미 알고 있다. 실버나이트는 그대 곁에서 '예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더군. 

 셜린... 혹시 채린을 닮은 그 아이인가?  수면 거울을 소환하고 마지막엔 결국 희생양이 되어버린 건지도... 그게 그녀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대가'였나...

 밖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밤이 깊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 방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을까? 심란한 마음을 뒤로한 채, 잠이 들었다. 

 

-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 잠에서 깬 나는 당연히 알카이드인 줄 알고 문을 살짝 열었다. 

 

[나]

......

 

[아인]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라 놀랐나? 

 

재빨리 문을 닫으려 했지만 문틈으로 뻗은 아인의 손이 더 빨랐다. 

 

[아인]

반란군 첩자를 전부 쓰러뜨린 사람이 너무 쉽게 놀라는군. 

 

[나]

무슨 용건이시죠?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아인은 내 질문엔 답해줄 생각이 없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인]

네가 없어져서 온 황궁이 뒤집어졌다고. 녀석들은 반란군 놈들이 널 데려간 줄 알고 있지. 내가 아주 귀찮게 됐다는 뜻이다. 

 

그 순간, 발소리가 났다. 아인은 번개같이 망토로 몸을 숨기더니 그대로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계단 위에서 등불을 든 알카이드가 나타났다. 

 

[알카이드]

무슨 일 있나요?

 

알카이드는 문을 걸어 잠그고 물었다. 

 

[알카이드]

문은 왜 열고 있었죠? 누가 왔었어요? 

 

[나]

아니요. 아무도. 

 

알카이드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화를 나눠보니, 알카이드는 월계절이 올 때까지 날 여기 숨겨둘 생각인 듯했다. 먹을 걸 가져다주는 건 어렵지 않은지, 수색하는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선 전혀 말해주지 않았다. 방을 둘러보던 나는 조금 머뭇거리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

그런데, 여긴 누구 방이었나요? 

 

[알카이드]

설린의 방이었어요.

 

아아, 역시. 

 

[나]

설린은... 마탑의 동료 마법사였나요? 

 

채린과 닮은 그 얼굴을 떠올리니, 조금 괴로워졌다. 

 

[알카이드]

내 동생..이었습니다. 

 

[나]

세상에..! 아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알카이드]

당신이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 당신은 이 일과 가장 무관한 사람이자 명백한 피해자인걸요. 모두 우리가... 자신만의 정의를 내세우느라 벌어진 일입니다. 더 강한 힘을 얻고자, 재앙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무언가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서. 하지만...

 

그는 말끝을 흐렸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알카이드의 정의가 무엇이었는지 내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조차 지키지 못할 거라면 그 정의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알카이드는 볼 일이 있다며 다시 방을 떠났다. 단순히 나를 빼돌리고 흔적을 감추는 것 말고 알카이드에게 다른 계획은 없는 듯했다. 사실 그는 나를 증오할 수도 있었다. 그의 여동생은 어떻게 보면 나 때문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더 이상 누군가가 희생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걸까. 

 

-

 

하룻밤이 더 지나고, 월계절은 마침내 코앞으로 다가왔다. 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입구로 달려갔다. 문은 미처 내가 손을 대기도 전에 열렸다. 알카이드가 다급히 들어와 내 팔을 꽉 붙들었다.

 

[알카이드]

결국 카이로스 예하께서 직접 나셨습니다. 전 대륙에 최고차원 감지 마법을 펼칠 준비 중이세요. 그렇게 되면 제 마법으론 숨겨드릴 수 없습니다. 

 

[나]

알카이드, 이제 어떻게 하죠? 

 

[알카이드]

모르겠어요. 

 

 알카이드는 넋이 나간 듯 보였다. 푸른 눈동자는 당혹감에 젖어 있었고,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수납장으로 달려가, 굳게 잠겨 있던 문을 열고 가장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알카이드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티아라였다. 

 

[알카이드]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정교한 크리스털 장식의 티아라엔 마법의 주문이 새겨져 있었다. 

 

[알카이드]

셜린이 생전에 만들어둔 것이에요. 정해진 운명을 깨고 스스로 염원을 이뤄낼 강력한 도구라고 했죠. 

 

알카이드는 셜린의 유품이자 그녀의 힘이 깃든 마법 도구를 서슴없이 내게 넘기려 했다. 

 

[나]

알카이드, 후회하지 않겠어요? 

 

알카이드의 마음이 돌변한다면 다시는 여길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후회 속에 남겨둘 수도 없었다. 

 

[알카이드]

걱정 말아요. 우리 세계의 일은 우리가 해결해야 해요. 당신을 말려들게 한 것만으로 이미 당신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셜린이 어떤 마음으로 마지막을 맞이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셜린도 분명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았을 거예요. 

 

그의 목소리엔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단호한 결의에 자 있었다. 

 

[알카이드]

내가 바꾸고 싶어요. 바꿀 겁니다. 이번만큼은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그는 그렇게 말하며 티아라를 직접 내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알카이드]

가장 이루고 싶은 한 가지 소망을 떠올리세요. 

 

[나]

어떻게 하면 되죠? 

 

[알카이드]

그냥 떠올리기만 하면 돼요. 당신은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껍니다. 당신에게서 변화를 가져올 빛이 강하게 느껴졌어요. 우리들이 할 수 없는 일도 당신은 해낼 수 있죠. 

 

눈부신 마법의 빛이 그의 손끝에서 번지더니 내 주변을 에워쌌다. 

 

[알카이드]

집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여기서 있었던 일은 깨끗이 잊어요. 

 

[나]

내가 돌아가면... 알카이드는 어떻게 하려고요? 

 

[알카이드]

책임과 운명을 회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가혹하다 해도, 여긴 내가 나고 자란 곳이에요. 그리고 내겐 맞서 싸워야 할 것들이 있지요. 당신은...

 

그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알카이드]

짧은 꿈을 꿨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느 따뜻한 봄날, 딱 한 번만 날 떠올려줘요. 부디, 당신의 앞날엔 행복만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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