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세르 대륙(完)/시작의 장(13)
-
6화. 취조
[나] 처치완료! [알카이드] 굉장하시군요.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사실 나는 엄호만 했을 뿐, 얼음 나비떼를 처치한 사람은 알카이드였다. [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것쯤은 알고 있어요. 내 능력을 시험해본 걸로 만족이에요. 카이로스한테 끝까지 보고하지 않은 것 같던데... 고마워요. 그 사람한테 들켰으면 얼마나 골치 아팠을지, 생각하기도 싫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알카이드는 사연이 있는 듯한 한숨을 내쉬고서 답했다. [알카이드] 카이로스 예하는 저의 마법 스승님이십니다. 제자인 제게도 더없이 냉정하시지만... 예하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에요. [나] 그러니 더 숨기기 힘들었겠죠. 정말 고마워요. 별궁으로 향하는 내내, 마차 안의 분위기는 유독 따스하게 느껴졌다. 돌연..
2024.01.02 -
5화. 처치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눈을 크게 뜨고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림의 힘을 내 의지대로 사용했어! [알카이드] 방금... 마법을 쓴 겁니까...? [나] 마법?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알카이드는 나를 감시하는 마탑에 소속되어있다. 내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카이로스의 경계심은 더 높아지겠지. 알카이드가 이걸 목격했으니 큰일이다. 알카이드가 다가오더니 내 한쪽 손목을 붙잡았다. [나] 알카이드? 알카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재 반대쪽 손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또 한 번 밝은 빛이 그의 손끝에 떠올랐다. 알카이드는 그 상대로 조금 전 전투가 벌어졌던 곳을 꼼꼼히 돌았다. [알카이드] 어떤 형태의 마력이든 사용 후엔 반드시 그 흔적이 남죠. 당신이 얼음..
2024.01.02 -
4화. 황궁 밖 구경
아침식사를 마친 후, 나는 알카이드에게 산책의 범위에 대해 물었다.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았다. [알카이드] 저와 함께라면,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셔도 괜찮습니다. [나] 알카이드는 쉬지도 못하고 계속 내 곁에 붙어 있어야만 하나요? 알카이드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알카이드] 괘넘지 마십시오. 저는 마법사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알카이드는 정말로 모습을 감추었다. 내가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주어 일부러 나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 같았다. 황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수많은 방과 실내 정원이 존재했고, 사이사이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는 잠시라도 넋을 놓았다간 미아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유유자적 돌아다니는데, 저편에 인영 하나가 눈에 띄었다. 대마법사 카이로스.....
2023.12.28 -
3화. 새벽녘
얕은 잠에 빠진 나는 꿈속에서 원혼과 나비 떼에 공격당했다. 하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들을 소환해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내 그림이 가진 힘이 그대로 느껴지는,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문득, 이런 꿈을 꾼 데는 이유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알카이드를 불렀다. [나] 알카이드, 거기 있어요? 잠시 후, 문밖에서 그가 답했다. [알카이드] 네, 여기 있습니다. [나] 알카이드, 부탁이 있어요. [알카이드]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선 얼마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나는 알카이드에게 종이와 펜을 부탁했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알카이드는 내가 원한 물건들을 착실히 구해다 주었다. [나] 고마워요! 양피지와 목탄이라니, 이렇게 고전적인 회화 도구는 처음이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
2023.12.28 -
2화. 저녁 연회
시녀들은 내게 눈부시게 화려한 자수가 놓인 붉은색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나중에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어졌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기억할 수 있기를. 평소와는 다르게 소품이나 내부 장식들의 무늬 하나하나까지 눈에 다 들어온다. 이쯤 되면 꿈인지 아닌지 혼란스럽네, 정말... 잠시 후, 시녀 한 명이 다가와 전했다. 황제가 연회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 넓은 연회장은 각양각색 옷차림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복식을 통해 귀족과 그 하인들, 그리고 황실의 관리나 시종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다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아인?! 너무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의 아인은 황제 로샤처럼 내가 아는 아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나를 보지 못했지만, 봤..
2023.12.28 -
1화. 황궁과 새장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유럽식 천장과 창살이었다. 어느새 나는 가시덤불로 휩싸인 거대한 새장에 갇혀 있었다. 온몸이 두들겨맞은 듯 아프고 머릿속이 몽롱했다. 문득 손이 허전하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채린! 채린이는 어디에...!! 벌떡 일어난 나는 바로 곁에 모로 쓰러져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의 싸늘한 몸을 돌려눕히고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두려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엄습했다. 뭔가 잘못됐다. 화려한 장신구와 새하안 원피스를 입은 갈색 머리 소녀. 채린의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이 사람은 절대로 채린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나] 이, 이봐요..!! 아,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몰라. 드물게 자각하지 못하는 꿈 말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기괴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두렵고..
2023.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