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24)
-
17화. 선택
하늘에는 서서히 밤의 장막이 드리웠다. 나는 난간에 기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을 스치는 쓸데 없는 생각을 떨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실버나이트를 또 한 번 유인하자는 카이로스의 계획에 과연 의미가 있나 싶었다. 어쩌면 카이로스의 작전일 수도. 내가 변심해 도망치지 않도록 나를 정신없이 흔들어대는 수작인지도 모르지. 내가 강림 의식에 협조하도록 말이다. 초조해졌다. 로샤가 선물한 손거울을 기내 내 목덜미를 비춰 보았다. 붉은 자국들이 돌연 민망하고 부질없게 다가왔다. 나는 명하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일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인기척이라곤 없었는데, 목덜미에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 [???] 네가 바라는 대로 왔어. 기겁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예신] 뭘 그리 놀라지? 내가 와주길 바..
2024.02.12 -
16화. 훔쳐온 평화
실버나이트를 유인하기 위한 연극은 계속되있다. 로샤는 침전에만 머무르며 나중엔 일부러 회의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매일 부지런히 그의 목과 쇄골에다 작품을 남겼다. 로샤의 강력한 주장에 못 이겨 내 목에도 정성스럽게 그려 넣었다. 대제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가꿈은 내 자신이 한심해지기도 했지만, 부끄러움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나는 매일 다른 시종과 시녀에게 시중들게 했고, 귀족들에게도 교대로 문안인사를 오게 했다. 유치한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분명 이 소식은 궁 안의 첩자를 통해 반드시 예신에게 전해질 것이다. [엘리스] 두 분 연기... 조금 어설픈 것 같아요. 실버나이트같이 똑똑한 사람이 과연 눈치채지 못할까요? [나] 오랫동안 공들여 함정을 팔 여유가 없으니 이 방법 뿐..
2024.02.12 -
15화. 유일한 인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로샤가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방문자는 카이로스였다. 내게 볼일이 있다는 그를 따라 내려갔다. - [카이로스] 실버나이트를 한 번 더 유인해라. [나] 네...? [카이로스] 의외로 지난번 작전이 꽤 유효했어. [나] 로샤를 위해서 말인가요? 카이로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서 못마땅한 듯 덧붙였다. [카이로스] 명령이 싫다면 부탁이라도 하겠다. 실버나이트를 유인해줘. 그가 너에 대한 미련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너는 그의 유일한 약점 이야. 폐하와 에르세르, 그리고 너의 세계를 위해서라도 실버나이트는 기필코 굴복시켜야 한다. 침통한 표정의 카이로스는 꽤 낮설있다. [카이로스] 너도 이미 눈치챘겠지. 실버나이트는 얼음 나비를 만들고 조종할 수 있다. 그..
2024.02.12 -
14화. 병중진담
나는 로샤에게 갔다. 아무리 다락이라지만 너무도 작고 소박한 공간이다. 침대 역시 거구의 로샤에겐 다소 좁아 보였다. 로샤는 고열에 들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계속했다. [로샤] 어머니...열..은 괜찮으세요? ... 밀리... 어머니께 설탕물을... 엘리스... 너만은 무사해줘... 빌어... 먹을! 지긋지긋한 저 눈...그치질 않아. 저 눈만 그치면 모든 게 다... 순간, 로샤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텅 빈 눈동자는 허공을 헤매다 작은 장문으로 향했다. [로샤] 제기랄, 아직도! 눈이... 곧 내가... 곧...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다. 안쓰럽기 그지 없었다. 그를 편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열이 심하게 날 때 미지근한 물로 몸을 닦아주면 도움이 된다고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2024.02.12 -
13화. 틀어진 관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 [한멜] 실버나이트 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예신] 그녀를 잡아 와라. 다치게 하지는 말고. [한멜] 명 받들겠습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어느새 반란군 병사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반란군 1] 실버나이트 님을 습격한 여자를 잡아라! [반란군 2] 황실 물을 먹어 그런지 배은망덕하군! 은인을 암살하려 하다니! 오합지졸이긴 해도 수가 너무 많았다. 혼자서 다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해지던 순간...! 추적자들이 일제히 나가떨어졌다. [로샤] 숙녀를 괴롭히다니, 기사도 정신이라곤 조금도 없는 놈들이구나! 다친 곳은 없나? 호오, 무뢰배들이 떼로 덤볐는데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구나. 과연 최고의 실력, 대 에르세르 제국의 황후 자격이 충분하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2024.02.12 -
12화. 얼음나비의 비밀
예신의 손끝에서 눈부신 은색 빛이 피어올랐다. 저건, 마법...? 예신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거야? 내가 몰랐던 그의 능력이 또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반드시 그를 막아야 한다. 나는 재빨리 예신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나] 멈춰요.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소리 지를 거예요. 자는 사람들 다 깨울 정도로 크게. 그래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당신은 흔들리지 않겠죠. 그렇지만 과연 당신의 부하들도 같을까요? 황제의 신부를 납치해 온 것도 모자라 난폭하게 겁탈하려 하다니. 세상에, 실버나이트의 실체가 이런 파렴치한이라니! [예신] ...... 마침내 예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기세를 몰아 더 밀고 나가려던 순간. [???] 실례합니다. 문밖에 사람이 있었다! 방금 얘기, 혹시 들은 건가?..
2024.02.12 -
11화. 진실
실버나이트는 천천히 다가와 내 앞에 앉았다. [실버나이트] 나는 예신이 아니야. 그리고 너는 이쪽 세계와는 무관하지. 이 세계의 분쟁에 휘말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본인이 예신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은 나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다. 조금 전 꽃향기를 맡고 그대로 잠이 들었더라면, 나는 그대로 돌려보내졌겠지. 끝내 아무것도 모른 채 말이다.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말끔하게 정리됐다. 예신이 왜 이렇게 비겁하게 나오는지부터 알아야겠어. 나는 실버나이트를 빤히 쳐다보며 도발했다. [나] 모두 잠든 야심한 밤에 여자 혼자 있는 숙소에 침입하다니... 보기보다 상당히 무례한 분이시네요. 솔직히 말해봐요. 내가 잠든 상태에서 몰래 돌려보내려던 거죠? 만약 그게 아니라면..
2024.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