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선택

2024. 2. 12. 22:33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하늘에는 서서히 밤의 장막이 드리웠다. 나는 난간에 기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을 스치는 쓸데 없는 생각을 떨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실버나이트를 또 한 번 유인하자는 카이로스의 계획에 과연 의미가 있나 싶었다. 어쩌면 카이로스의 작전일 수도. 내가 변심해 도망치지 않도록 나를 정신없이 흔들어대는 수작인지도 모르지. 내가 강림 의식에 협조하도록 말이다. 초조해졌다. 로샤가 선물한 손거울을 기내 내 목덜미를 비춰 보았다. 붉은 자국들이 돌연 민망하고 부질없게 다가왔다. 나는 명하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일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인기척이라곤 없었는데, 목덜미에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 

[???]

네가 바라는 대로 왔어.

 

기겁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예신]

뭘 그리 놀라지? 내가 와주길 바란 거 아닌가? 마음은 정해진 것 같고. 그럼 이제 갈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

난 아무 데도 안 가요. 나는 대체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예신? Emerald? 아니면 실버나이트? 예신,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잖아요. 솔직히 말해줘요. 

 

[예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곳으로 가자. 대화는 거기서 해도 늦지 않아. 

 

[나]

예신,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잖아요. 솔직히 말해줘요. 회피할 생각은 말아요. 내게도 힘이 있어요.  

 

 예신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손을 댔다. 온몸이 마비라도 된 듯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림 소울의 소환은커녕, 도망칠 수도 없었다. 두려움에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바로 그때! 노골적인 살의가 담긴 검기가 쇄도했다. 예신은 내게서 손을 떼고서 재빨리 몸을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로샤의 품에 안겨 있었다. 

 

[로샤]

도무지 매너라곤 찾아볼 수가 없군. 싫다는 여자에게 자꾸만 들이대다니, 사내놈이라면 부끄러운 줄 알거라. 

 로샤의 도발에도 예신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은빛 검을 뽑더니 로샤와 겨루기 시작했다. 겨우 두세 번 검을 섞었을 뿐이건만,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예신은 진심 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로샤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로샤도 결코 지지 않고서 맹렬히 맞섰지만, 점점 한계가 보였다. 

 로샤의 검이 빗나가던 찰나, 예신은 곧장 로샤의 심장을 항해 칼을 뻗었다.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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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4. 악몽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예신, 아니, 실버나이트는 찰나의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로샤를 감싸려 했지만 그릴 수 없었다. 눈이 가려진 채 예신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차라리 악몽이길.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정신을 차린 뒤로 나는 계속해서 울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어서 황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로샤에게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고집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예신에게 당신을 향한 모든 적의를 내려놓겠다고, 계획 따위 세우지도 않고 다시는 반항하지도 않을 테니 제발 로샤에게 돌려보내달라고 사정했다. 목이 쉬도록 울며 애원하고 또 에원했다. 그러나...

 

[예신]

그는 죽었어. 미련은 버려. 

 

 예신은 차디찬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줬다.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경직됐다. 

 

[예신]

괴롭겠지. 하지만 곧 잊게 될 거야.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너무도 두려웠다. 감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볼 수도 없었다. 

 

[예신]

자아, 이제 예전의 너로 돌아갈 시간이야. 너는 이 세계에 속한 자가 아니야. 이곳 사람들은 너와 일말의 관계도 없지. 

 

 이어진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내 머릿속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그리고 메아리처럼 울리며 끝없이 반복되었다. 

 

-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나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별들의 경연'에서 내가 돌연 기절했고, 그런 나를 예신이 집까지 데리고 왔다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예신은 무리하지 말고 그저 쉬라고 했다. 나는 즉시 생각을 멈추었다. 예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뭔가 무섭고 끔찍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예신이 좀 이상해. 아니, 이상한 건... 나인가? 이유 모를 불편함은 계속되었다. 급기야 나는 예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가 되 었다. 이후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며 내 몸과 정신은 완전히 쇠약해졌다. 세인트셀터의 생활은 아무래도 내게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더는 못 버티겠다고 하자, 예신이 모든 뒷수습을 해주었다. 나는 셀레인 섬과 예신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났다. 

 학교를 옮기고 나서, 드디어 나는 편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 황제와 실버나이트의 꿈은 언제부던가 꾸지 않았다. 그림이나 만화를 그리고 싶단 욕망도 사라졌다. 새로운 학교에선 실용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졸업하면 바로 직장을 구할 예정이다. 지극히 평범하고도 평온한 일상. 거기에 악몽 따윈 없겠지. 그거면 됐다. 

 

END.

>로샤의 앞을 막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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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절대로 로사를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뿐.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던져 로샤의 앞을 막아섰다. 예신의 칼끝은 내 목 바로 앞에서 가까스로 멈추었다. 

 

[로샤, 예신]

무슨 짓을...! 

 

[나]

로샤는 내 남편이에요! 남편의 위기를 구경만 하고 있을 아내가 어딨겠어요! 

 

 나는 손을 뻗어 로샤의 손을 잡아 단단히 깍지를 꼈다. 그리고 예신을 똑바로 노려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나]

나부터 죽여요! 그 전엔 한 발짝도 안 움직일 테니까! 

 

예신은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나는 예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당신한테 난 뭐죠? 이토록 집착하는 걸 보면, 내가 당신에게 상당히 필요한 존재이긴 한 모양이군요. 어떤 이유에서 내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로샤의 곁을 절대 떠나지 않아요. 협상을 하게 되더라도, 그 전제는 변하지 않을 거 예요. 

 

예신은 고개를 저으며 차갑게 답했다. 

 

[예신]

협상이라. 네가 원하는 게 저 남자뿐이라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나]

......

 

[예신]

에르세르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해. 하지만, 이 남자만큼은 살려 주겠다. 저자를 너의 세계로 보내주마. 그곳의 로샤 로렌하이트의 몸을 차지할 수 있도록. 

 

[나]

그러면... 내 세계의 로샤가 희생되는 거잖아요! 

 

[예신]

내 알 바 아니지. 너를 제외한 다른 인간들은 그저 체스 말에 지나지 않아. 

 

셀레인 섬으로 가는 크루즈에서 예신은 로샤 로렌하이트와 담소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소름이 끼쳤다. 

 

[예신]

최선을 다해 너에게 맞취주려는 내 정성을 알아줬으면 해. 

 

나는 끝내 예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전혀 없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느끼질 정도였다. 나를 바라보는 예신의 눈동자는 순수하기 그지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더 두려웠다. 

 

[예신]

너의 세계만큼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이 남자를 죽어도 못 놓겠다면 그와 함께 네 세계로 가. 난 절대로 간섭하지 않을 테니, 둘이서 자유롭게 지내도록 해. 그게 아니라 시덥잖은 정의의 사도 흉내를 내는 중이라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얌전히 포기하고 내게로 돌아와. 나는 계속해서 너를 보살피고 돌볼 거야. 얼마든지 나에게 기대도 돼. 

 

[나]

예전처럼 눈과 귀를 가린 채 살라는 뜻이군요. 당신이 준비해둔 유리 상자 속에서. 

 

예신은 내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예신]

평생을 함께할 사람은 좀 더 성숙해진 뒤에 선택해. 물론, 나를 선택한다면 지금이라도 좋아. 너는 행복하기만 해야 해. 여주인공이 고통받는 만화는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걸. 

 

[나]

내가 로샤의 곁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면요? 아니, 나는 에르세르의 얼음 나비들이 다 없어진 이곳에서 로샤와 함께해야 행복할 거예요. 

 

예신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예신]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구나. 아무리 널 위한 일이라 해도 에르세르를 그냥 놔둘 수는 없...

 

 푸른빛의 마법진이 예신의 몸 위로 비쳤다. 카이로스가 마법사들을 대거 이끌고 온 것이다!  실버나이트 유인 계획은 성공했다. 희망이 보인다. 

 

>18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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