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병중진담

2024. 2. 12. 19:10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나는 로샤에게 갔다. 아무리 다락이라지만 너무도 작고 소박한 공간이다. 침대 역시 거구의 로샤에겐 다소 좁아 보였다.

 로샤는 고열에 들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계속했다. 
 
[로샤]
어머니...열..은 괜찮으세요? ... 밀리... 어머니께 설탕물을... 엘리스... 너만은 무사해줘... 빌어... 먹을! 지긋지긋한 저 눈...그치질 않아. 저 눈만 그치면 모든 게 다...
 
 순간, 로샤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텅 빈 눈동자는 허공을 헤매다 작은 장문으로 향했다. 
 
[로샤]
제기랄, 아직도! 눈이... 곧 내가... 곧...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다. 안쓰럽기 그지 없었다. 그를 편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열이 심하게 날 때 미지근한 물로 몸을 닦아주면 도움이 된다고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로샤]
앗, 차가워...
 
[나]
미안해요, 조금만 참아요. 열 내리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로샤는 오한으로 덜덜 떨며 눈을 뜨더니 내 손을 꼬옥 붙잡았다. 
 
[로샤]
아무 데도 가지 마라...
 
[나]
응. 아무 데도 안 갈게요. 걱정 말아요. 
 
[로샤]
밤새 그 고생을 했는데, 잠도 제대로 못 잔 듯 하군. 좁지만 여기서 자도록 해. 설마, 이런 꼴로 내가 그대를 덮칠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 손가락 하나 못들어올리는 상태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의 절반을 내게 내어주었다.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한 나는 로샤 옆에 누웠다. 그러고선 그의 팔을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 로샤는 편안한 표정으로 다시 잠들었다.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나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채 큰일까지 겪어 몹시 피곤했던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곯아떨어졌다. 
 
-
 
[나]
..으음...?
 
[로샤]
잘 잤어? 아주 푹 자더군. 
 
[나]
여긴 어디...? 아, 맞다, 어제...! 로샤, 이제 좀 괜찮아요? 
 
[로샤]
그대가 걱정해준 덕에 한결 나아진 기분이야. 카이로스 경이 아침부터 정무를 줄 수 없다며 고집을 부리더군. 그래서 다시 돌아왔어. 아침부터 좀 심심했지만 귀여운 그대의 자는 모습을 보니 심심하지는 않더군. 
 
[나]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도 단정치 못한데 뭐가 재밌어요!
 
나는 벌떡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마구 빗어내렸다. 그러자 로샤가 어디선가 빗을 가져와 내 머리를 벗겨주있다. 

[나]
내, 내가 할수 있어요. 몸도 안 좋으면서, 빗 이리 줘요. 
 
[로샤]
싫은걸. 소중한 사람 머리카락을 벗어주는 건 오랜만이라서. 
 
무슨 일일까. '소중한 사람'이라는 대목에서 로샤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로샤]
어머니는... 굉장히 단정하고 우아한 분이셨지. 영지의 안주인으로서, 타인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평생 노력하셨어. 역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던 중에도, 어머니는 한 치 흐트러짐 없으셨다. 병중인 어머니의 말벗이 되어드리면서, 이렇게 머리를 빗겨드리곤 했지. 아주 좋아하시더군.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밀리 선생님께 머리카락 손질 과외까지 받았지. 아, 밀리 선생님은 어머니의 주치의셨어. 아주 어릴 때부터 나를 돌봐주시기도 했고. 어때? 내 솜씨가 제법 그럴듯하지 않나? 
 
 로샤는 자신의 과거를 얘기를 하면서 내 머리카락이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부드럽게 빗어주었다. 나는 열네 살의 로샤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병상에 누운 어머니에게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대했으리라. 어머니가 사라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그때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잠시 후, 내 머리는 놀라울 정도로 멋지게 땋였다. 
 
[나]
너무 예뻐요, 로샤! 고마워요! 
 
로샤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과장되게 인사했다. 
 
[로샤]
필요하실 때 언제든 부르시지요, 황후 폐하. 
 
 점심때가 되자 시종이 식사를 준비해 왔다. 로샤는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은지, 먹기를 거부했다. 창가에 기대선 채, 그는 식사를 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로샤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중, 뭔가가 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창밖의 눈이... 그쳤다! 그럴 수가 없는데, 이상하다. 
 
[로샤]
카이로스... 쓸데 없는 짓을. 
 
로샤는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로샤]
감정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어 보이는 자가, 묘하게 신경 써주고 있단 말이지. 
 
씩 웃는 로샤의 안색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로샤는 황성으로 옮겨오던 때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로샤]
 별궁에서 내가 사용했던 방이 바로 여기다. 물론 멋진 방도 많았지만, 나는 좁고 아늑한 이곳이 좋았어. 나고 자란 곳을 떠나오는 동안 사방이 내내 황량한 설원이었거든. 끔찍했지. 그래서인지, 넓고 휑한 건 지금도 싫어. 아버지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내게 밀리 선생님과 호위기사 엘리스를 딸려 보내셨어. 그들이라도 없었으면 역병이 아니라 아마 미쳐서 죽었을 거야. 겨울이라 황성에도 눈이 내리고 있더군. 매일 이 작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지. 고열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눈만 뜨면 나는 장가에 앉아서 눈이 그치길 기다렸다. 눈이 그치고 봄이 오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지. 순진하게도. 
 보름 후, 마침내 봄이 찾아왔고 거짓말처럼 내 병도 완치됐지. 스스로 격리를 마치고 나오던 날, 나는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는 정원을 질리도록 뛰어다녔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듣게 됐지. 내 고향 스나이트 성이 폭설에 매몰되었다는 소식을. 영지는 흔적도 없이 괴멸되고 생존자는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더군. 일평생 영지를 위해 헌신하셨던 아버지 역시... 끝내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겠지. 나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의 로샤를 만든 것은 아마도... 모든 것을 잃고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열네 살의 로샤일 것이다. 
 
[로샤]
얼음 나비는 자연재해라고 설명하기엔 너무도 인위적이야. 대륙 역사상 이런 식의 부자연스러운 자연재해는 단 한 번도 없었어. 아무리 봐도 누군가가 분명 목적을 갖고서 계획적으로 감행한 '습격'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존재가 스나이트 성의 생명 전부를 단번에 거둬간 거야. 

[로샤]
 숙부인 선황은 군주의 자질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한심한 작자였지. 세상에 다시 없을 무능하고도 무책임한 황제였다. 그는 나를 부모 잃고 완전히 실성한 어린애 취급 했어. 나는 대규모 영지였던 스나이트 성을 괴멸시킨 얼음 나비에 대비해야한다고 주장했 지만, 이 황궁에서 내 말에 귀 기울여준 이는 카이로스가 유일했다. 
 황제를 포함한 황성의 귀족들은 하나같이 제 안위밖에 몰랐지. 재앙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을 약자들에게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로샤, 헛소리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건 그만둬라. 설령 재앙이 닥친다 해도, 황궁 안에 머무르는 한은 안전하단다." 
 
[로샤]
대륙의 황제라는 자가 그런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군. 그는 여섯 살짜리 자기 아들보다도 더 철없는 인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재앙이 시시각각 다가오자 황제는 성문을 닫아걸기에 급급하더군. 그걸 보고 마침내 결심했지.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내가 나서기로. 저런 자가 황좌에 앉아 있는 한 에르세르에 미래는 없다. 죗값은 나중에 받기로 하고, 당장은 이곳의 사람들을 지키겠다 다짐했어.

 로샤는 눈앞의 사람들이 제 고향과 같은 전철을 밟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표정에서 그가 겪었을 고통과 고뇌가 전해졌다. 
 
[로샤]
누군가 일부러 얼음 나비의 재앙을 몰고 왔으리란 내 예상은 적중했지. 문제는, 그 존재가 너무도 강력하다는 데 있었다. 
 
로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샤]
13년 전 내 고향을 멸망시킨 자는 아마도 실버나이트는 아닐 거다. 그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니까. 분명 더 막강한 배후가 있을 거야. 하지만... 배후는 커녕, 실버나이트조차 도무지 이길 방도가 없더군. 우습기도 하지. 나는 선황을 시해한 폭군으로 손가락질당하고, 실버나이트는 폭정에 맞서는 정의의 기사가 되어 있으니.
 사실, 그간 나는 실버나이트와 여러 번 맞붙었다. 기분 나쁘게도, 그 녀석은 나를 죽이지 않고 매번 일부러 여지를 남기더군. 그는 내게 수치심과 절망을 주며 조롱하고 있어. 녀석은 이 모든 과정을 즐기고 있다. 이 세계를 무너뜨리려는 목표를 숨긴 채 정의로운 기사를 연기하며 모두를 비웃고 있는 거야. 나는 실버나이트를 증오한다. 하지만... 그를 어찌할 수도 없어. 그 녀석의 눈에 내가 무기력하고 무능한 황제로 비칠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화가 치밀어.  
 
다시 열이 오르는 걸까. 로샤는 약간 격앙돼 있었다.

나는 접시 위의 요리를 뒤적거리기만 했다. 
 
[로샤]
어쩌면, 질투였는지도... 수면 거울로 둘을 지켜보는 동안... 그대가 그자를 향해 미소 지을 때마다 화가 치밀더군. 
 
 그의 말을 경청하는 내 머리 위로 그의 커다란 손이 얹혀진다.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로샤는 말했다.
 
[로샤]
잘 알고 있어. 그대는 이 모든 일에서 죄가 없다는 걸.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
 
갑작스러운 말에 손이 멈칫했다. 
 
[나]
로샤,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요. 조금 쉬는 게...
 
[로샤]
아니. 고열 핑계를 대서라도 오늘은 말해야겠어. 
 
[나]
설마... 이런 상황에서 고백하려는 건 아니겠죠? 
 
[로샤]
그래. 솔직히 말해 이번이 처음이다. 영광으로 알아. 
 
[나]
이거 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괜찮겠어요? 
 
[로샤]
전에 내가 그랬지. 실버나이트는 그대를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다고.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더군. 어젯밤... 그자는 분명 그대를 신경 쓰고 있었다. 
 
[나]
......
 
[로샤]
그가 그대에게 잘해줄 수록 그대가 그 녀석에게 넘어갈까봐 조급해지더군. 그대를 향한 내 감정은 우애나 우정과는 다르다. 
 
로샤는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로샤]
남자로서 그대를 좋아해. 나는 그대에게 뜨겁게, 거부할 마음이라곤 조금도 들지 않을 정도로 아주 뜨겁게 구애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게 아니었다면 말이야.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로샤]
월계절 전까지 다른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강림 마법진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 해. 그러면...
그대와 나의 관계도 영영 끝이겠지. 
 
로샤는 씁쓸하게 웃더니 침대로 돌아가 누워버렸다.

 
[로샤]
아아, 그래. 그대의 말이 맞았다. 고열에 시달릴 때 쓸데없는 소릴 하는 게 아니었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젖은 수건을 가져다 그의 이마에 얹어주었다. 로샤는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그의 손은 아주 뜨거웠다. 
 
[나]
몸이 낫고 나서 다시 얘기해도 되니 지금은 일단 쉬어요. 
 
[로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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