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틀어진 관계

2024. 2. 12. 15:56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 

 

[한멜]

실버나이트 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예신]

그녀를 잡아 와라. 다치게 하지는 말고. 

 

[한멜]

명 받들겠습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어느새 반란군 병사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반란군 1]

실버나이트 님을 습격한 여자를 잡아라! 

 

[반란군 2]

황실 물을 먹어 그런지 배은망덕하군! 은인을 암살하려 하다니! 

 

오합지졸이긴 해도 수가 너무 많았다. 혼자서 다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해지던 순간...! 추적자들이 일제히 나가떨어졌다. 

 

[로샤]

숙녀를 괴롭히다니, 기사도 정신이라곤 조금도 없는 놈들이구나! 다친 곳은 없나? 호오, 무뢰배들이 떼로 덤볐는데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구나. 과연 최고의 실력, 대 에르세르 제국의 황후 자격이 충분하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로사가...날 구하러 와줬다고? 

 

[로샤]

감격한 나머지 할 말을 잊은 모양이군. 진정해. 신부가 납치되었는데, 찾으러 오지 않을 신랑이 어디있겠는가?

 

 꿈이 아니네. 이런 상황에 이런 대사라니, 진짜 로샤야. 

 

[나]

로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아니, 그보다 괜찮아요?

 

로샤의 뒤에는 카이로스가 버티고 서 있었다.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에, 나는 약속의 증표로 받았던 귀걸이를 더듬어보았다. 아아, 어쩐지. 계속 작용하고 있으라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이 귀걸이에 카이로스가 마법을 걸어둔 모양이다. 내가 어디 있든 찾아낼 수 있는, 말하자면 위치추적기 같은 거겠지. 

 

[로샤]

무사해서 다행이다. 이만 가지. 

 

로샤가 내민 손을 잡으려던 찰나, 예신이 나타났다. 

 

[예신]

달콤한 말에 속아 그를 따라가선 안 돼. 저들에게 너는 제물일 뿐이야. 네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다. 내 말을 믿어야 해. 진실이 어떻든, 이쪽 세계에서 너를 생각하는 건 오직 나뿐이아. 

 

 또다. 예신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약한 구석을 파고든다. 예신을 만나고 진실에 접근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계를 재앙으로부터 구해낼 방도를 찾은 건 아니다. 강림 의식만이 유일한 해답인 이상, 지금 나는 예신의 말마따나 마법진의 제물일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도 사람인지라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여정의 결과만큼은 전과 다를 거란 예감이 들었다. 당장의 내 안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걸 해내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로샤와 함께라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

재앙을 막을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어쩔 수 없죠. 난 두렵지 않아요. 

 

 로샤가 놀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에게 웃어 보인 뒤, 앞에 있는 예신을 바라보았다. 황제와 실버나이트가 대립하고 있는 지금, 그들과 협상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있다. 나는 심호흡한 뒤 예신에게 말했다. 

 

[나]

날 정말로 붙잡고 싶다면, 더 많은 진실을 알려줘요. 당신은 대체 누구죠? 이 곳에서 뭘 하려는 거예요? ...난 그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신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깊이 가려진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르고, 더 이상 아무런 답도 듣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찰나, 그가 근처의 설원을 가리키며 조용하게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자고 했다. 

 

[로샤]

그건 안 된다. 나도 함께 가지. 내 신부를 데려가는 건 더는 용납 못 한다. 

 

 로샤의 도발에 예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우리는 인적 없는 근처의 설원으로 향했다. 걸음을 멈춰선 예신은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가법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예신]

난 네 만화가 좋았단다. 참 사랑스러운 이야기였어. 

 

[나]

....?

 

〈시공 속에서〉를 말하는 건가? 

 

[예신]

감금당하고, 고통받으면서도 항상 실버나이트만을 걱정하던 소녀를 잊을 수 없어. 가능하다면, 소녀와 실버나이트의 관계가 영원히 변하지 않았으면 해. 

 

 거기까지 말한 예신은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나를 향한 그의 눈빛은 언제나 그랬듯이 온유하고 고요했다. 이번만큼은 그가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진심을 얘기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예신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

실버나이트가 정말로 세상을 지키는 기사였더라면, 소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실버나이트는 소녀에게 소중한 두 세계를 영원히 지켜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요? 

 

 예신은 침묵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걸까. 그래,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실인 거겠지. 그는 결코 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아니며, 나도 만화 속의 소녀가 아니다.

 

[나]

예신, 고마워요. 항상 변치않고 내 곁을 지켜줘서. 그리고, 서로 다른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나를 충분히 존중해줘서.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 었다. 

 

[나]

사실 나도 전혀 생각 못 했어요. 내가 실버나이트와 황제를 두고 후자를 선택할 줄은.

 

 나는 로샤의 옆으로 다가가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운명을 내놓기로 결심 한 것처럼,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잡으려는 것처럼.  

 예신이 돌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예신]

너에겐 선택권이 없어. 절대 황제의 손에 널 넘겨주진 않아! 

 

[로샤]

실버나이트! 그간 잘도 짐의 신민들과 그녀를 미혹했겠다! 

 

 로샤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검을 뽑아 똑바로 실버나이트를 겨누었다. 

[로샤]

고결한 척하는 네놈의 면상, 역겹기 그지없다! 네놈만큼은 짐이 직접 처단해줄 테니 영광으로 알거라! 

 

[예신]

황제라면서 도무지 품위라곤 찾아볼 수가 없군. 이 아이는 절대 줄 수 없다. 

 

[로샤]

크윽!

 

[예신]

 

[예신]

으윽...!

 

[한멜]

발사하라!

 

궁수들이 매복해 있었다니 ! 새카만 화살 비가 우리를 항해 쏟아졌다. 재빨리 검을 거둔 로사는 나를 안고서 퇴각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거대한 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나타났다. 날아오던 화살들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더니 반란군에게로 맹렬히 쏟아졌다. 대륙 최강 대마법사 카이로스의 위엄 앞에 반란군 부대의 전열은 단번에 흐트러졌고 실버나이트까지도 일순 주춤했다. 

 

[로샤]

일단 후퇴한다! 

 

로샤는 나를 안고서 번개같이 말에 올랐다. 우리를 태운 말은 순식간에 반란군 주둔지를 벗어나 드넓은 설원을 질주했다.

 

-

 

로샤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그는 고삐를 부드럽게 당기더니 말을 세웠다. 

 

[로샤]

...카이로스 경, 내 신부를 부탁하네. 

 

로샤가 휘청거렸다. 나는 황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두꺼운 의복 위로 그의 체온이 신명하게 느껴졌다. 온몸이 불덩이였다. 

 

[나]

로샤! 열이 펄펄 끓어요! 

 

[로샤]

걱정 마라. 이 몸은 강철로 이루어져 있지.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나]

강철로 이루어진 사람이 어딨... 아니, 이게 아니지.지금 농담이나 할 때예요?! 

 

[로샤]

카이로스 경, 내 신부를 너무 의심하지는 말게. 우리 생각을 뛰어넘는, 강하고 현명한 여인이야. 

 

[카이로스]

......

 

[나]

로샤!

 

[로샤]

경을 믿고 있겠...

 

로샤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이런 상태의 로샤를 황궁까지 옮기 기는 무리였다. 우리는 서둘러 별궁으로 향했다. 카이로스는 별궁 꼭대기 층에 있는 다락방에 로샤를 눕혔다. 

 

[나]

명색이 황제인데, 이런 좁은 곳에 둬도 괜찮겠어요? 

 

카이로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카이로스]

글쎄. 아마도 이곳을 가장 편해하실 거다. 

 

나는 그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카이로스는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카이로스와의 대화는 기분 좋게 끝난 적이 없었기에 조금 긴장됐다. 그는 이번 일로 조금 당황한 듯 했다. 로샤가 계획한 이번 사냥회는 예상했던 대로 실버나이트를 도발하기 위한 장치였다. 모든 게 순조로웠으나, 마법사들의 폭주부터 시작해 연달아 변수가 생기고 말았다.카이로스는 실버나이트가 기척을 완전히 숨길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했다. 수잔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카이로스]

알카이드와 설린을 제외하고, 마법사는 황궁에 상주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 그 시녀는 마탑에서 내가 카위낸 마법사와는 달리, 마력 파동을 전혀 감지할 수 없더군. 그래서 그토록 지척에 있어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카이로스가 이런 얘길 하는 이유가 뭘까? 로샤는 수잔나의 기습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다 부상당했다. 그리고 결과만 놓고 보자면, 나는 그런 로샤를 버려두고 예신을 따라간 거다. 혹시, 카이로스는 나를 배신자라고 의심하는 걸까. 

 

[나]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실버나이트를 따라간 건 로샤와의 약속 때문이었어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래도 의심스럽다면 로샤가 깨어날 때까지 나를 가둬요. 로샤에겐 내가 설명할게요. 

 

[카이로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판단했다. 폐하는 얼음 나비에 내성을 갖고 있지. 직접적인 접촉으로 발생한 고열은 며칠이면 가라앉을 것이다. 

 

[나]

로샤... 나 때문에 며칠씩이나 고생을 해야 하다니...

 

[카이로스]

죄책감을 씻고 싶다면, 그대가 직접 폐하를 보살피도록 해. 

 

[나]

그래도 될까요?

 

[카이로스]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하지 마라. 

 

카이로스가 나를 믿고 로샤의 간호를 맡기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여전히 냉랭했지만, 이전처럼 적개심이 느껴지진 않았다.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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