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2. 13:16ㆍ에르세르 대륙(完)/시작의 장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눈을 크게 뜨고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림의 힘을 내 의지대로 사용했어!
[알카이드]
방금... 마법을 쓴 겁니까...?
[나]
마법?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알카이드는 나를 감시하는 마탑에 소속되어있다. 내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카이로스의 경계심은 더 높아지겠지. 알카이드가 이걸 목격했으니 큰일이다. 알카이드가 다가오더니 내 한쪽 손목을 붙잡았다.
[나]
알카이드?
알카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재 반대쪽 손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또 한 번 밝은 빛이 그의 손끝에 떠올랐다. 알카이드는 그 상대로 조금 전 전투가 벌어졌던 곳을 꼼꼼히 돌았다.
[알카이드]
어떤 형태의 마력이든 사용 후엔 반드시 그 흔적이 남죠. 당신이 얼음 나비를 처리한 흔적에다 제 마력 파동을 덧씌웠습니다. 이제 여기 남아 있는 건 저의 마력뿐이니 염려마세요. 누구도 모를겁니다.
그는 설명을 마진 뒤 내 손을 놓아주었다.
[알카이드]
실례했습니다.
[나]
알카이드... 정말 고마워요.
나를 바라보는 알카이드의 눈빛은 더없이 진중했다.
[알카이드]
오늘 일은 비밀로 묻어두는 게 좋겠어요. 당신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도, 오늘 우리가 자객을 마주친 사실도.
[나]
네, 앞으로 조심할게요. 알카이드도 비밀을 지켜줘요.
알카이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카이드]
중심가를 벗어나자마자 얼음 나비와 자객을 마주쳤으니, 별궁까지 가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마차에 오르시죠.
마부는 다행히 돌아와 있었다. 마차에 타도 지독한 추위는 가시질 않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려고 손에다 입김을 후후 불었다.
[나]
그나저나 이게 다 무슨 일인가요? 그 얼음 나비는 대체 뭐죠? 알카이드를 노리던 자객은 또 누구고? 나도 상황을 좀 알아야겠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사고를 일으키거나 사건에 휘말릴까 걱정돼요.
알카이드는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얼음 나비는 정상적인 생물이 아닌, 에르세르 대륙의 재앙이라고 했다.
[알카이드]
얼음 나비는 아주 빠른 속도로 대륙 전체에 퍼져나갔습니다. 녀석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대항하면 좋을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나]
마법사라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마법사들이 순찰을 도는 것도 다 얼음 나비 때문일테고.
[알카이드]
얼음 나비는 완전히 소멸시킬 방도도 없을 뿐더러, 저처럼 상급 마법을 다룰 수 있픞 마법사의 수도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민들이 황실을 원망합니다. 마법사의 대부분이 황성 안에만 모여있어서 봄 날씨를 유지할 수 있는 곳이 아주 적거든요. 그런 이유로 실버나이트의 반란군에 가담한 이들도 있지요. 방금 전, 절 습격한 자들도 반란군의 자객이에요.
폭군에 대항하는 고결한 실버나이트, 〈시공 속에서〉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러나 내 이야기에선 마법사도, 사람을 통째로 얼려버리는 기이한 나비도 등장한 적이 없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 같았다.
나는 혼란에 잡긴 재, 황궁으로 돌아왔다.
-
이후로 며칠간 나는 황궁에만 머물렀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순 없어 그림 소울의 힘을 강화할 방법도 찾아보고 황궁 안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얻어보려고도 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로샤]
뭔가를 찾고 있는 모양이군.
[나]
네? 그냥 돌아다니는 것뿐이에요, 폐, 폐하.
불쑥 나타난 로샤 때문에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괜히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어색하게 드레스 자락을 들어올리며 예를 표했다.
[로샤]
사랑스러운 신부여, 그대는 다른 이들처럼 예의 차릴 것 없다. 즐길 거리는 찾았나? 궁에는 별로 흥미로운 것이 없지. 혹여 그대가 지루해할까 걱정이군.
즐길 거리? 머릿속에 채린이는 괜찮은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그리고 내가 없으니 고양이 녀석은 어쩌고 있는지 걱정거리가 천지인데 무슨.
[나]
전 적응력도 강하고 혼자서도 잘 놀아서 괜찮아요.
[로샤]
가륵한 여인이로군. 며칠 그대에게 소홀했던 것을 사과하는 의미로 선물을 하나 내리겠다. 장인을 불러와라!
로샤의 명령에 따라 장인의 작품 한 점이 황후 침전으로 옮겨졌다.
그가 선물한 것은 거대한 나무 인형 상자로, 태엽을 돌리면 그 안의 인형 이 춤을 추는 장난감이었다.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장난감은 분명 멋졌지만 이런 걸로 기분이 나아질 리가 없었다.
[나]
와아, 너무 기뻐요.
[로샤]
전혀 기쁜 얼굴이 아니군.
[나]
아, 아니에요! 세공이 엄청나네요. 멋져요!
[로샤]
억지로 그릴 필요 없다. 그대가 장인들을 칭찬한다 해서 짐에게 득 될 것도 없고.
앗, 기분 상했나? 눈치 살피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로샤가 말했다.
[로샤]
됐다.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물감이 필요하다면 황실 창고에 있으니 마음대로 가져다 써도 좋다.
알카이드에게 꾸준히 화구를 부탁한 일이 그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다.
-
로샤는 의외로 순순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카이드]
신녀님...
[나]
이 몸도 똑같이 예의를 자리기 바라시나요, 고위 마법사 알카이드시여?
내 짓궂은 장난에 알카이드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잠시 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알카이드]
적응이 정말 빠르시군요.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있습니까?
[나]
밖에 나가고 싶어요.
지난번과 같은 부탁에 알카이드는 선뜻 응했다.
-
이번에도 어김없이 얼음 나비를 마주쳤다. 나는 나비를 퇴치하러 가는 알카이드를 따라 마차에서 내리려 했다.
[알카이드]
따라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능력은 비밀에 부지기로 했잖아요.
[나]
24시간 동안 보호만 받고 있는 건 사절이에요. 그리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내가 도망가버리면 오히려 알카이드가 곤란해지지 않겠어요?
나는 자신있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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