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취조

2024. 1. 2. 13:38에르세르 대륙(完)/시작의 장

[나]

처치완료!

 

[알카이드]

굉장하시군요.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사실 나는 엄호만 했을 뿐, 얼음 나비떼를 처치한 사람은 알카이드였다. 

 

[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것쯤은 알고 있어요. 내 능력을 시험해본 걸로 만족이에요. 카이로스한테 끝까지 보고하지 않은 것 같던데... 고마워요. 그 사람한테 들켰으면 얼마나 골치 아팠을지, 생각하기도 싫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알카이드는 사연이 있는 듯한 한숨을 내쉬고서 답했다. 

 

[알카이드]

카이로스 예하는 저의 마법 스승님이십니다. 제자인 제게도 더없이 냉정하시지만... 예하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에요. 

 

[나]

그러니 더 숨기기 힘들었겠죠. 정말 고마워요. 

 

별궁으로 향하는 내내, 마차 안의 분위기는 유독 따스하게 느껴졌다. 돌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알카이드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상황을 확인했다. 

 

[나]

또 무슨 일이에요? 

 

[알카이드]

집행인 부대군요. 

 

 검은 망토를 두른 무리가 진군하고 있었다. 행인들은 겁에 질려 길을 비켰고, 그들의 위압적인 발소리는 점점 가까위졌다. 집행인 부대가 반란군 토벌 목적으로 만들어진 집단이란 에기는 알카이드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 호기심에 차장을 내다본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선두에서 말을 타고 부대를 이끄는, 앳된 미청년...바로 아인이었다. 내가 알던 아인은 우아한 피아니스트였는데, 험악한 반란군 토벌 부대의 우두머리라니 상상도 못했다. 말을 타고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온 아인이 내가 탄 마차를 멈춰 세웠다. 천천히 말을 돌린 그는 마차 안의 나와 알카이드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당황하던 그때, 집행인 부대원들이 우리가 타고 있는 마차를 에워쌌다. 

 

[아인]

내려라. 반란군이 탄 것으로 의심되니 전원 내려 검문을 받도록. 

 

알카이드는 마차에서 내려 정중한 태도로 그들을 대했다. 

 

[알카이드]

이 마차엔 신녀님께서 타고 계십니다. 전 이분을 별궁까지 모셔다드리는 임무를 맡고 있을 뿐, 반란군은 여기 없습니다. 

 

아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알카이드를 무시해버리고선,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놀라우리만치 무례한 태도다. 

 

[나]

......여긴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아인]

과연 그럴까? 

 

[나]

이렇게 작은 마차에 사람이 숨을 공간이 어디 있겠어요?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는 행여나 아인이 내 힘을 눈치챈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내가 그림 소울의 힘을 사용했던 흔적은 이미 알카이드가 덮어두었고, 무엇보다도 아인은 마법을 아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인은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재 부하들을 시켜 마차를 조사하라 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자 아래에서 웬 아이 한 명이 몸부림치며 끌려 나왔다. 

 

[소년]

전 반란군이 아니에요...! 살려주세요! 아악! 

 

[아인]

끌고 가. 

 

남자아이는 곁에 있던 집행인 부하에게 넘겨졌다. 

 

[나]

......

 

 정말로 누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아까 마차가 텅 비어있는 틈을 타 들어왔는지도. 그렇지만 저 아이가 반란군이란 증거는 어디 있지? 빈민가의 아이가 그저 온기를 찾기 위해 마차에 들어왔다 의자 밑에서 잠들었다는 게 더 말이 되지 않나? 

 아인은 마차 곁을 떠나지 않은 재 여전히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인]

불필요한 질문이긴 하나... 년 저 반란군과 서로 아는 사이인가?

 

[나]

궁에서 나은 뒤 줄곧 알카이드와 마차 안에 있었으니 반란군이라곤 만난 적도 없어요. 굳이 반란군과 접촉할 이유도 없고요. 

 

험악한 인상의 한 집행인이 성큼 다가오자 겁에 질린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인]

충고 하나 하지. 누군가 질문하거든, 묻지도 않은 얘기엔 말을 삼가는 게 좋을 거다.

 

아인은 무심한 얼굴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인은 부하 한 명을 불러, 들리지 않도록 지시를 내렸다. 말에 오르려던 아인이 돌연 나를 돌아보았다. 

 

[아인]

황실 별궁에 가는 중이라고 했던가? 

 

[나]

네, 맞아요.

 

[아인]

가봤자 소용 없을 거다. 

 

아인은 조소를 가득 머금은 얼굴로 툭 내뱉었다. 

 

[아인]

전쟁에 징발된 지 오래인데 구경거리 같은 게 남아 있을 리가 있나. 그럼 이만. 

 

 말에 올라탄 아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황량한 대지에 눈보라와 먼지만 자욱하게 일었다. 집행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뛰는 가슴에 손을 얹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카이드]

아무래도 문제가 생기겠군요. 

 

[나]

그 사람 때문에요?

 

[알카이드]

그보다... 집행 사령관의 조사를 받고 있을 때 마탑의 동료 두 명과 그의 제자들이 근처를 지나갔습니다. 

 

[나]

그 사람들이 뭔가 발견했을까요? 

 

알카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알카이드]

당신이 능력을 사용했던 흔적은 다 지웠어요. 다만, 무언가 눈치챈다면 모두 예하께 보고드릴겁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외출을 삼가는 게 좋겠어요. 

 

[나]

네. 황궁으로 돌아가요. 

 

 알카이드는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는 길 내내 나는 방금 겪은 일을 생각했다. 자꾸만 아인이 떠올랐다. 귀족 도련님처럼만 보이던 그가 험악한 집행인 부대의 사령관이라니. 그리고... 그 끌려간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나]

알카이드, 아까 잡혀간 아이는 어디로 가게 되나요? 

 

[알카이드]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할 겁니다. 집행인 부대는 폐하께서 가장 신임하는 집단인만큼 반란군의 처리도 맡고 있죠. 

 

[나]

아까 그 어린애가 반란군이라니, 억지 아닐까요? 

 

그러나 알카이드는 내 생각에 동의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카이드]

글쎄요. 

 

[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어린아이들이 반란군에 가담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닌가 보군요.

 

창을 통해 멀리 내다봐도 이미 집행인 부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알카이드]

맞아요. 그리고 집행인 부대에게 끌려간 반란군 중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자나 어린애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나]

......

 

나는 제발 알카이드가 방금 한 말을 아니라고 번복하길 빌었다. 하지만 황궁에 도작할 때까지 그는 침묵을 지켰다. 

 

-

 

 알카이드가 저녁 식사를 보내줬지만 손도 대지 못했다.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 로샤는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나를 신부로 맞이하려고 하지만, 아직까지 내게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내키지는 않지만, 알카이드를 생각해서라도 궁에만 들어박혀 지내자 다짐했다. 

 그러나 바로 이튿날, 알카이드가 잠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문밖에서 기별이 왔다. 무슨 일인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문을 열자 카이로스와 낯선 마법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젊은 마법사]

어제 순찰 중에 광장에서 신녀님을 목격했습니다. 

 

아아, 이 사람이 알카이드가 말한 그 동료구나. 알카이드는 어제 분명 내 흔적을 지웠다. 그를 믿기에, 나는 섣불리 대응하지 않고 차분히 카이로스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카이로스의 눈은 내 깊은 곳에 감취둔 비밀까지 여지없이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카이로스]

어제 궁 밖으로 나갔었군요. 

 

[나]

바람을 쐬는 것 정도는 허용된다고 들었어요, 대마법사님. 

 

나는 그의 경계를 풀어보고자 무릎을 굽히고 치맛자락을 들어올리며 억지로 예를 표했다. 

 

[카이로스]

......

 

그러나 그는 목석도 울고 갈 만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무안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때, 어디선가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샤]

내가 말했잖나 카이로스 경. 경이 여기 서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신부는 겁에 질릴 거라고.

 

로샤는 유쾌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로샤]

좋은 아침.

 

[나]

좋은... 아침이군요. 

 

하다하다 저 황제가 반가울 줄이야. 

 

[로샤]

보아하니 우리 대마법사께서 그대를 심란하게 하는 모양이군. 

 

[카이로스]

황궁 밖에서 이세계 신녀가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한 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을 확인 중이 있습니다, 폐하. 

 

[로샤]

무슨 소리지? 카이로스 경 휘하의 고위 마법사가 계속 감시하는 중 아니었나?

 

[카이로스]

......

 

[로샤]

아니,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군. 당장 아인을 불러와라! 

 

잠시 후, 아인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아인의 얼굴은 검은 망토의 후드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 모습이 꼭 그림자 속에 숨어 사는 사람 같아 약간 오싹했다. 

 

[로샤]

어제 보고서를 제출했었지. 임무 중에 혹시 신녀를 마주셨나? 

 

[아인]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다는 듯 무미건조한 말투다. 그의 대답엔 최소한의 예의만 있을 뿐,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로샤]

인상조차 흐릿한 걸 보면, 의심스러운 점은 없었다는 뜻. 

 

[카이로스]

......

 

뭐든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로샤. 역시 내 편일 때는 더없이 든든한 타입이다. 카이로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로샤의 의견을 받아들였나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카이로스]

폐하. 제가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로샤]

상대는 가녀린 여인 아닌가. 게다가 곧 월계절인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나? 

 

[카이로스]

월계절을 앞두고 있기에 어떠한 변수라도 용납할 수 없는 겁니다 

 

 카이로스는 곁에 있던 젊은 마법사에게 명령을 내려, 비바람과 우박을 소환했다. 놀란 나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무시무시한 냉기를 어찌할 순 없었다. 양팔이 얼어붙기 시작하자 무슨 일인지, 그림 소울이 제 스스로 실체를 드러냈다. 

 소울의 힘을 사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아무리 멈추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림 소울은 제멋대로 마법사에 맞서 싸웠다. 꼭 나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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