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2. 13:43ㆍ에르세르 대륙(完)/시작의 장
그림 소울의 존재를 들키고 말았다.
[로샤]
이제 그만! 짐의 궁전을 무너뜨릴 작정인가?
[카이로스]
알겠습니다.
카이로스는 즉시 내게 얼음 마법을 시전했다. 눈앞에 서릿발이 흩날리는가 싶더니 뼛속까지 냉기가 스몄다. 온몸이 얼어붙어 반항은 커녕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순식간에 의식이 몽롱해지며 시야가 흐려졌다.
[카이로스]
강림 의식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것일 뿐, 다지게 하진 않을 겁니다.
카이로스의 목소리가 점점 더 멀어졌다. 어느새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자마자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가시덤불로 둘러싸인 그 새장 안이었다. 가시덤불은 전보다 훨씬 더 촘촘하게 둘러쳐져 있었다. 도망질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카이로스는 새장 밖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을 이런 무시무시한 곳에다 가두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지.
[카이로스]
잘 지켜보고 있도록.
카이로스는 부하 마법사에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카이로스]
월계절까지는 안전에 만전을 기하라.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나]
내가 뭘 어쨌다고 가둬놓는 거죠? 이거랑 안전이 무슨 상관이에요?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카이로스는 내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새장에서 조금 물러났다. 나는 그의 매정하기 짝이 없는 뒷모습을 보며 격한 울분을 토해냈다.
[나]
설명이라도 좀 해주면 어디 덧나냐!
잘나신 대마법사께선 하찮은 내 목소린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우아하게 서 있기만 할 뿐이다.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샤]
대단한 담력이군. 카이로스 경을 상대로 사납게 맞서다니.
[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죠. 하지만 그러면 뭐 하겠어요? 전혀 먹히지도 않는데.
[로샤]
그의 화를 돋웠으니 전혀 안 먹혔다고 할 순 없지.
하여튼 여기도 독특한 사람들 천지다.
[나]
목적이 뭔가요? 날 이 세계로 부른 이유가 뭐예요, 도대체!
로샤는 생각에 잠겼다가 긴 한숨을 내쉬더니 의외로 순순히 답했다.
[로샤]
에르세르 대륙에 얼음 나비라는 전대미문의 재앙이 찾아온 이후, 그 해결의 실마리는 그 누구도, 심지어 마탑조자도 찾지 못했다. 수많은 방법을 연구하고 시도해봤지만 그중 성공한 건 단 하나도 없었지. 그러던 중, 위대한 대마법사 카이로스가 특별한 방법을 고안했다. 바로 이쪽 세계를 통째로 들어내 얼음 나비가 없는 다른 세계에다 이동시기는 것. 다만, 그 강림 의식의 거대한 마법진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제물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그대이지.
로샤의 설명에는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나]
세계를 통째로 이동시길 마법진을 만들어낼 정도라면 더 간단한 방법이 있었을 텐데요? 얼음 나비를 직접 멸종시길 사람을 소환했어야죠! 아주 무시무시하게 강한 힘을 가진 용사 말이에요! 그게 아니라면 얼음 나비의 천적 같은, 뭐, 불을 품는 두꺼비라든지...!!
[로샤]
과연 일리가 있군. 그대는 그런 용사를 알고 있는 모양이군. 짐에게 소개해줄 수 있는가?
[나]
모, 모르죠. 그러니까 방법을 좀 더 고민해보자는 거예요.
로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라고 어려운 길로 가고 싶을까. 이미 다 시도했고 숱하게 실패했던 것이다.
이곳의 모든 것들은 내 만화와 흡사했기에, 나는 현실 세계로 돌아갈 실마리를 어떻게든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 실마리가 내 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한 했다. 이쪽 세계를 위협하는 얼음 나비를 다 물리치면 돌아갈 수 있다든지...그러나 방금 들은 이야기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로샤의 말대로라면 나는 죽기 위해 불려온 것이기 때문에 돌아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저쪽이 바라는 대로 놀아날 마음은 추호도 없기에 나는 간절히 로샤를 설득했다.
[나]
공들여 날 데려와놓고 기껏 한다는 게 제물로 바치는 거라니, 너무 아깝지 않나요? 만에 하나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다른 방법을 찾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로샤]
언변이 뛰어나구나.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라니...
[카이로스]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폐하. 저 여인이 지닌 힘은 우리의 마법과는 달라, 자칫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계획은 그대로 진행될 것이고, 저는 그 어떤 변수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샤]
신부여, 그대가 이해하라. 카이로스 경은 원래 기분 나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버릇이 있지.
[나]
......
그쪽도 별반 다를 바는 없는데. 로샤는 노려보는 내 시선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웃었다.
[로샤]
그래, 강림 의식의 원활한 진행이 우선이다. 변수가 생겨선 안 되겠지. 남은 며칠간 그대는 편하게 지내거라.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 제공하겠다.
[나]
이런 상황에 편하게 지낼 수 있겠어요? 위선자 폐.하.
[로샤]
귀여운 발톱을 세우는 것까진 좋다만 휘두를 생각은 말거라. 상대가 언제까지나 아량을 베풀어주진 않을 테니. 그대가 지닌 능력이 특별하다 해도 평범한 인간의 기준에서나 그럴 뿐, 대륙 유일의 대마법사인 카이로스에겐 대적할 수 없다. 이 가시덩굴 꽃들은 마법의 힘까지도 차단할 수 있다더군. 그러니 도망질 생각은 말거라. 짐의 친절한 조언을 무시할 시, 반드시 후회하게 될 테니.
정말 날 위해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오히려 나는 절망했다.
[나]
귀찮게 저항하지 말고 얌전히 여기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라는 뜻이군요. 협상의 여지는 조금도 없는 건가요?
로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을 보니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잠시 뒤, 그는 나직이 한마디를 던졌다.
[로샤]
미안하다.
그를 끝으로 로샤는 카이로스와 함께 방을 떠났다.
"신녀님이 의식의 방으로 돌아오셨어."
어둠 속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의식의 방 입구를 지 기는 마법사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계단으로부터 긴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졌다.
[알카이드]
가보셔도 됩니다. 지금부턴 제가 맡죠.
의외의 인물이었다. 보초를 서던 마법사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여마법사]
예하께서 직접 보내신 건가요?
알카이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마법사]
저런... 이곳을 굳이... 괜찮으시겠어요? 힘드실 덴데요.
알카이드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답했다.
[알카이드]
그게 제가 맡은 임무니까요.
알카이드는 감시자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재빨리 의식의 방 내부로 향했다.
-
황궁 지하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의식의 방은 어둡고 음산했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두 개의 등불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고개를 들어 거대한 새장을 바라보던 알카이드는 그는 제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머리를 숙인 그의 입술 사이로는 절망과 고통이 잔뜩 밴 한숨이 새어나왔다.
[알카이드]
임무라...
새장으로 다가선 그의 손끝에서 강한 빛이 떠올랐다. 빛줄기들은 강력한 주술을 하나하나 풀어내며 가시덤불을 타고 올랐다. 결계를 해제하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만신창이였다. 가시덤불을 헤치려 얼마나 발버둥을 졌는지, 팔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얌전히 새장 속에 있으려 했다면 이런 참혹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덴데... 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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