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새벽녘

2023. 12. 28. 00:36에르세르 대륙(完)/시작의 장

얕은 잠에 빠진 나는 꿈속에서 원혼과 나비 떼에 공격당했다. 하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들을 소환해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내 그림이 가진 힘이 그대로 느껴지는,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문득, 이런 꿈을 꾼 데는 이유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알카이드를 불렀다. 
 
[나]
알카이드, 거기 있어요? 
 
잠시 후, 문밖에서 그가 답했다. 
 
[알카이드]
네, 여기 있습니다. 
 
[나]
알카이드, 부탁이 있어요. 
 
[알카이드]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선 얼마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나는 알카이드에게 종이와 펜을 부탁했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알카이드는 내가 원한 물건들을 착실히 구해다 주었다. 
 
[나]
고마워요! 
 
 양피지와 목탄이라니, 이렇게 고전적인 회화 도구는 처음이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게 꿈이 아니라면 나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림을 그리며 나는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날이 밝아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는데 로사가 내 옆에 서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당황한 나는 황급히 양피지를 뒤로 숨겼다. 
 
[로샤]
흡사 귀신이라도 본 사람 같군. 그건 뭐지? 
 
[나]
아, 이, 이건... 그냥 낙서요. 
 
[로샤]
그냥 낙서라면 숨길 이유가 없을덴데. 
 
손을 뻗는 로샤를 피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 물러났다. 나는 황제가 몰락하고 그의 대항자가 승리를 거두는 장면을 그렸다. 만에 하나, 이곳의 세계관이 내가 아는 것과 동일하다면 로샤에게만큼은 절대로 이 그림을 들켜선 안 된다. 어느 쪽일까. 이쪽 세계에도 그가 존재해 황제와 맞서 싸우고 있을까. 
 
[로샤]
왜 그리 놀라지? 실버나이트라도 그렸나? 
 
역시...! 로샤가 언급한 이름을 듣는 순간 몸에서 힘이 빠지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내 그림을 본 게 틀림없다. 로샤는 계속해서 나를 향해 다가왔고, 나는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곳까지 몰랐다. 어느새 나는 침대와 그의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 

[로샤]
아주 아름답게도 그려놨더군... 그자가 그리운가?
 
[나]
오해예요! 저는 실버나이트라는 사람 몰라요! 그림 속의 남자는 제가 살던 곳에 있는 예신이라는 사람이라고요! 
 
[로샤]
셜린의 수면 거울로 보아서 이미 알고 있다. 실버나이트는 그대 곁에서 '예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더군.
 
[나]
말도 안 돼요. 예신은 돌아가신 저의 엄마의 부탁을 받고 절 보살펴준 사람이에요. 실버나이트가 아니라...!
 
[로샤]
다시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일부러 짐을 화나게 하려는 속셈이 아니라면.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서 벗어나려던 순간. 침대 모서리에 걸린 양피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그는 침대 옆에 우뚝 선 채 바닥에 널브러진 양피지를 말없이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공교롭게도 찢어진 부분은 쓰러져 있는 황제 쪽이었다. 실버나이트는 괜찮았지만, 황제의 몸은 처참하게 둘로 갈라져 있었다. 로샤는 찢어진 양피지 조각을 주위 협탁에다 내려놨다. 예상과는 달리,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알카이드가 달려 들어왔다. 
 
[알카이드]
신녀님! 비명을 들었습니다. 무슨 일...! 폐, 폐하...
 
[로샤]
별일 아니다. 물러가거라. 
 
양피지 조각을 맞취보는 로샤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로샤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
 
 다시 혼자가 되었다. 실버나이트는 여기서도 역시 로샤의 숙적인가 보다. 그리고 내가 이세계에 떨어진 건 '마탑'이란 곳과 관련이 있는 것 같고. 나를 데려올 수 있었다는 것은 원래 세계로 돌려보낼 수도 있다는 뜻 아닐까. 방법을 아는 사람이 있을 거야.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나]
좀 전엔 고마웠어요, 알카이드. 
 
알카이드가 나의 감시역인 것은 알지만, 나를 도와주는 마음은 진심 같았다. 
 
[나]
방에만 있기 답답하네요.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잠시 고민하던 알카이드가 제안했다. 
 
[알카이드]
아침 식사를 하러 가시겠습니까? 
 
[나]
좋아요.
 
-
 
황궁의 조찬은 무적 호화로웠다. 테이블 위엔 보기 좋은 요리와 디저트들이 가득했다. 알카이드는 나와 함께 다이닝룸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문 앞을 지키기 위해서인 듯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구로 돌아가 그를 불렀다.  
 
[나]
알카이드. 
 
내가 다시 나오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
아직 이쪽 세계에 익숙하지 않으니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함께 식사해요. 
 
알카이드는 머뭇거렸지만 이내 안으로 들어와 여러 요리들을 차근차근 소개해주었다. 
 
[알카이드]
이 소고기 스튜는 에르세르 대륙의 전통음식입니다. 기넘일이 되면 집집마다 만들어 먹곤 하죠. 향이 진한 차와 잘 어울립니다. 
 
더없이 평온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평범했던 나의 일상이 떠올랐다. 
 
[알카이드]
이쪽은 디저트입니다. 이것 말고도 특별히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원하는 것? 많지. 마법사와 월계절, 현실 세계로 가는 방법 등 궁금한 게 천지니까. 하지만 그런 질문들을 던져봐야 알카이드가 대답할 수 있는 권한 밖일 터. 그를 난처하게만 할 것 이다. 나는 민트와 비슷한 향을 풍기는 차를 한 잔 따라 그에게 건네주었다. 
 
[나]
식사를 마진 뒤엔 혹시 주변을 산책할 수 있을까요? 
 
[알카이드]
신녀님...
 
[나]
내 이름이에요. 편하게 불러쥐요. 
 
[알카이드]
신... 아니, 죄송합니다. 존함으로 부르는 게 익숙지 않아서...
 
나를 이름으로 불렀지만,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여전히 어색했다. 내가 황제의 신부라 불편한 걸까, 아니면 감시자 입장이라 친근하게 대할 수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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