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황궁과 새장

2023. 12. 28. 00:31에르세르 대륙(完)/시작의 장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유럽식 천장과 창살이었다. 어느새 나는 가시덤불로 휩싸인 거대한 새장에 갇혀 있었다. 온몸이 두들겨맞은 듯 아프고 머릿속이 몽롱했다. 문득 손이 허전하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채린! 채린이는 어디에...!! 벌떡 일어난 나는 바로 곁에 모로 쓰러져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의 싸늘한 몸을 돌려눕히고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두려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엄습했다. 

 뭔가 잘못됐다. 화려한 장신구와 새하안 원피스를 입은 갈색 머리 소녀. 채린의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이 사람은 절대로 채린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나]
이, 이봐요..!!
 
 아,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몰라. 드물게 자각하지 못하는 꿈 말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기괴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온갖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머릿속을 휘저어덌다. 이 사람은 누구고 재린이는 대제 어디로 간 거지? 괜찮을까? 여긴 어디지? 나, 학교로 돌아갈 수는 있는 걸까? 
 
[???]
움직이지 마.
 
[나]
...?
 
 소름 끼지는 쇳소리에 이어 새장의 문이 열렸다. 열린 쪽을 바라본 나는 반가움에 드디어 말문이 터졌다. 
 
[나]
아아, 로샤! 다행이다! 여긴 어디죠? 경연은 어떻게 된거고 다들 어디...? 아...! 
 
 뒤늦게 로샤의 화려한 복장을 확인한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가 지금 쓰고 있는 저 왕관은... 〈시공 속에서〉의 황제의 것이었다. 
 
[나]
로샤...? 
 
[로샤]
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제법 발칙한 신부로구나. 언제든 약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해두었다. 그대만 준비된다면 말이지. 
 
아니다. 로샤가 아니야. 이 사람은... 이 사람은..! 
 
[나]
잠시만요! 갑자기 약혼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가만... 꽃으로 장식된 방과 거대한 황금 새장, 화려한 복장들... 이건 내 만화 속 황제의 취향이다. 눈앞의 이 남자는 내가 아는 로샤가 아니라 황제 로샤인 것이다. 아니, 그지만 만화라고 쳐도 이건 너무 납득하기 힘든 전개다. 에독자들을 괴롭히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분명 꿈일 거다. 나는 꿈에서 깨기 위해 팔뚝을 꼬집어보았지만... 아프다.
 
[로샤]
이건 무슨 주술이지? 효력은 없어보인다만.
 
[나]
그게 아니라...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대답을 포기해버렸다. 로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로샤]
따라오거라. 모두에게 너를 소개하겠다. 긴 이야기는 그 후에 나누도록 하자꾸나. 
 
 대제 이게 무슨 일인지... 꿈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이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분명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나는 어쩌다 이런 곳에 떨어진 걸까.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얌전히 갇힌 채 고민이나 한탄만 할 순 없으니까. 꿈이든 아니든,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야만 해.
 
[나]
어디로 가는 거죠? 
 
[로샤]
회의장. 다들 너를 기다리고 있지. 
 
 우선은 이 로샤를 따라가 거기서 다음 일을 생각해야겠다. 순간, 묘한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회랑 구석의 어두운 공간에 긴 로브로 온몸을 가린 사람이 서 있었다. 자세히보려 했지만, 그는 순간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
 
 
 능동적으로 움직이다 보면 꿈에서 깨곤 했으니, 이번에도 그러겠지. 그런데 오늘 꿈도 내 만화와 비슷하게 흘러갈까? 회의장이라기엔 너무 넓은 홀이었다. 둥글고 높은 천장 아래에서 화려한 복장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귀족 청년]
벌써 한참이나 지났는데... 의식은 성공했을까요? 
 
[귀족 부인]
저는 마법사들이 영 꺼림칙해요. 수상한 작자들 아닙니까. 
 
[늙은 귀족]
쉿. 마탑을 의심하는 발언은 삼가시오. 왕족이라 해도 큰 화를 입을 수 있다오. 
 
 로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웅성대던 공간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귀족들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예로써 황제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표했다.
 지극히 낮설고도 현실적인 풍경이다.  나는 〈시공 속에서〉의 폭군이 정사를 돌보는 모습을 한 번도 고려하거나 그려본 적 없다. 
 
[로샤]
짐이 없는 동안 잡담은 즐겼나. 마탑을 통해 손에 넣은 이세계의 신녀다. 우리의 혼인식은 월계절 의식과 함께 거행될 것이다. 짐과 운명을 잇는 영광을 누리게 될 신녀를 보라. 
 
 로샤의 깜짝 선언에 귀족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그들의 시선엔 호기심, 우려, 혼란 등이 잔뜩 배어나 있었다. 개중엔 황제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불만으로 가득한 사람도 있었다. 로샤 역시 귀족들의 반응이 씩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그는 잔인한 미소를 피었다. 
 
[로샤]
반대하는 자가 있거든 이 자리에서 고하라. 그 불경한 자를 죽음으로써 설득시켜주겠다.
 
[귀족들]
…황제 폐하, 신녀님, 만세! 
 
로샤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내게 다가와 단숨에 날 안아 올렸다.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로사의 팔뚝을 있는 힘껏 꼬집어보았다. 그가 분노하면 꿈에서 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로샤]
아직도 주술을 부리려는 셈인가. 그래, 성공은 했나?
 
[나]
아직... 노력 중이에요.
 
[로샤]
그래. 갖고싶은 게 있거든 뭐든지 말하거라. 짐의 나라에서 그대가 취하지 못할 것은 없으니. 
 
그는 위험할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로샤]
아무리 이세계의 옷이라지만, 누더기를 걸치고 있구나. 그대를 위해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준비하라 일러두었다. 
 
[나]
그... 다음에는요? 
 
[로샤]
약혼식을 올려야지. 그리고 월계절까지 실컷 즐기자꾸나. 
 
월계절? 만화나 꿈에선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설정이다. 이 낮선 이야기는 대체 언제쯤, 어떤 식으로 끝나게 될까. 
 
[로샤]
헛된 생각은 그만두고 잘 따라다니기만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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