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저녁 연회

2023. 12. 28. 00:34에르세르 대륙(完)/시작의 장

시녀들은 내게 눈부시게 화려한 자수가 놓인 붉은색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나중에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어졌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기억할 수 있기를. 평소와는 다르게 소품이나 내부 장식들의 무늬 하나하나까지 눈에 다 들어온다. 이쯤 되면 꿈인지 아닌지 혼란스럽네, 정말...
 잠시 후, 시녀 한 명이 다가와 전했다. 황제가 연회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
 
 넓은 연회장은 각양각색 옷차림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복식을 통해 귀족과 그 하인들, 그리고 황실의 관리나 시종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다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아인?! 너무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의 아인은 황제 로샤처럼 내가 아는 아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나를 보지 못했지만, 봤다 하더라도 내 존재를 모를 테지.
 아인은 귀공자 같은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은밀하고 날쌘 몸짓으로 서빙 카트 위의 무언가를 집어 먹었다. 에플파이와 비슷한 디저트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꼭 훔쳐 먹는 것처럼 보였지만 위화감은 전혀 없었다. 이쪽 세계의 아인은 뭔가 다른 느낌인데? 
 
[나]
아인?!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인파 때문에 여의지 않았다. 간신히 사람들을 뚫고 도달했을 떄, 그는 이미 자리를 벗어나는 중이었다. 
 
[아인]
누가 묻거든, 
 
아인은 시종에게 싸늘한 명령조로 말했다. 
 
[아인]
날 본 적 없다고 해. 
 
 으음? 왜 저러는 거지? 아인은 뒷문을 통해 재빨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곧장 악단이 경쾌한 음악을 연주했다. 연회가 시작된 모양이다. 
 
[로샤]
뭘 그렇게 보고 있지? 
 
[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로샤는 잠시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다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로샤]
짐과 한 곡 추지 않겠나? 
 
[나]
춤을..요?
 
[로샤]
반려자 될 이에게 춤을 청하는 건 이쪽의 전통이거든. 혹여 그대가 불민해 춤추는 법을 모른다 해도 괜찮다. 짐이 리드할 테니 걱정 말거라. 
 
[나]
출 줄 알아요. 학교에서 배웠으니까. 
 
 로샤의 우아한 리드에 나는 현대식 왈츠 스텝으로 응수했다. 로샤의 눈은 내내 내 얼굴에만 머물러 있었다. 내가 능숙하게 호흡을 맞추자 그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진심으로 나와의 춤을 즐기는 듯 보였다. 
 
[로샤]
그쪽 세계의 춤인가? 제법 하는군. 
 
 춤곡이 끝난 뒤, 그는 아까보다 더 정중한 태도로 나를 원래 자리로 이끌었다.

 로샤는 고위 귀족으로 보이는 이들과 술잔을 부딪치고 담소를 나눴다. 그동안에도 그는 내게로 접근하려는 사람들을 모두 차단했다. 나는 구석에 멀뚱하니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월계절 축제에 관한 이야기 같았다. 
 〈시공 속에서〉에선 월계절과 이세계의 신녀가 등장한 적이 없다. 채린과 똑같은 얼굴의 여자나 아인도 마찬가지. 너무 많은 사람과 소리, 냄새가 온통 뒤섞여 신경을 긁어대고 있었다. 낯선 환경에 혼란스럽고 지진 나머지, 눈앞의 산해진미에도 입맛이 달아났다. 
 
-
 
연회가 끝나자 로샤는 또다시 나를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나]
이번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상대가 황제다 보니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법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영 잠에서 깨어날 기미가 없어 불안해졌다. 
 
[로샤]
피곤할 테니 짐의 침실에서 쉬도록 하지. 
 
[나]
네? 저, 저는 다른 방을 내주시면 안 될까요?
 
[로샤]
다른 방이 마음에 드나? 그래도 짐의 침실을 가장 추천하고싶군.
 
[???]
폐하, 잠시...
 
[로샤]
아아, 카이로스 경.
 
[카이로스]
시기상조입니다. 경계하심이 마땅합니다. 
 
[로샤]
경계라... 이 한 줌도 안 되는 소녀가 짐을 해치기라도 한단 말인가? 대마법사께서 그렇게 소심해서야 되겠나. 
 
또다. 급기야 카이로스 선배까지! 긴 끄 자림의 장발 남자는 과연 선배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이로스 선배 역시 내 만화나 꿈에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게다가 이쪽의 카이로스는 선배와는 달리 인간미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을 꿈에서 보다니, 가능하기나 할까. 카이로스는 잘 벼린 칼처럼 예리한 시선으로 나를 주시했다. 
 
[카이로스]
이세계에서 막 도착해 아직 검증도 되지 않은 존재입니다. 안전이 입증될 때까지는 되도록 격리시기고 마탑에서 감시하겠습니다. 
 
[나]
그럼요. 이분 말씀이 맞죠. 저는 다른 방에서 잘게요! 
 
로샤는 어이 없다는 듯 코웃음을 졌다. 
 
[로샤]
보기보다 악취미인 여인이군. 융통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대마법사 편을 들다니. 
 
[카이로스]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폐하. 마탑이 폐하의 손을 들어드린 10년 전으로부터, 제가 폐하의 사생활에 간섭한 적 있었습니까? 자제하시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제아무리 '이세계의 신녀'라 해도 얼마든지 위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로샤]
위해? 오히려 경이 이 여인에게 위해를 끼치고 있지 않나. 됐네. 의미 없는 말싸움은 그만두지. 우선은 황후 침전에 들라 하라. 
 
[카이로스]
그리 전하겠습니다. 
 
 카이로스는 손짓으로 시종을 불러 나를 황후의 침전까지 안내하도록 했다. 안내받은 방에는 푸른색 커튼이 달려 있었다. 옛 유럽에서는 지금과 반대로 파란색이 여성성을, 붉은색이 남성성을 상징했다더니. 우아하게 장식된 방은 아주 넓었고,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지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그런데 저 대마법사님은 퇴근을 안 하시나.... 아직도 문앞에 버티고 서 있네. 
 
[나]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카이로스]
......
 
카이로스는 내 질문은 들리지도 않는 양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나]
용무가 없다면 가주시겠어요? 많이 피곤해서요. 
 
[카이로스]
......
 
나는 문으로 가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으면 그냥 닫아버릴 작정으로. 
 
[알카이드]
카이로스 예하. 황후 침전 주변에 마법진을 치고 인원을 교대 배치해 24시간 보호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겠습니다. 
 
[나]
어...어어?!
 
또 아는 얼굴! 하도 반복되니 이제 놀랍지도 않다. 그보다...
 
[나]
결계를 치고 24시간 교대 배지라니, 그건 보호가 아니라 감시 같은데요? 
 
[알카이드]
죄송합니다, 신녀님, 카이로스 예하로부터 신녀님을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마탑 9성의 고위 마법사 알카이드입니다. 
 
역시... 이쪽의 이름도 알카이드구나. 
 
[알카이드]
제가 직접 침전 밖을 지킬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카이로스를 향해 깍듯이 예를 표했다. 
 
[알카이드]
예하, 보호 조치의 최종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카이로스]
네게 맡기겠다.
 
끝까지 싸늘하기 짝이 없는 태도. 게다가 그는 지금껏 내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알카이드]
예하는 무적 냉정한 분이시지만 신녀님께 위해를 가할 분은 아닙니다. 신녀님께서 조용히 계서주시기만 한다면 말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며시 알카이드를 곁눈질했다. 이쪽의 알카이드는 지금껏 내가 여기서 만나온 사람들 중 현실 세계의 모습과 가장 흡사했다. 더없이 온순한 그의 눈빛 덕에 감시역이라 해도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내가 관찰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알카이드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알카이드]
신녀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오늘은 제게 무척... 힘든 하루였습니다. 하지만 맡은 바 역할엔 미흡함이 없도록 하겠으니 걱정 마세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나]
저, 그럼...알카이드...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왜 다들 나를 '신녀님'이라고 부르는 거죠? 어째서 나를 신녀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알카이드]
......
 
뭐든 도와줄 것처럼 말했던 것과 달리, 그는 선뜻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불편한 주제구나. 내가 다음 말을 찾는 사이, 알카이드는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나]
앗, 잠깐만요, 아직...! 

금세 돌아온 그의 손엔 커다란 은제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트레이 위엔 가벼운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알카이드]
야식을 준비했습니다. 연회장에서는 전혀 못 드시더군요 그래서 따로 준비시켰으니 편하게 식사하세요. 
 
[나]
아... 그러고 보니 허기가 지네요... 어떻게 알았어요? 
 
 이런 상황에 밥이 넘어가겠나 싶었지만, 신기하게도 알카이드가 준비해준 식사를 보니 식욕이 되살아났다. 이세계의 음식이 낯설긴 했지만 적당히 배를 재우고 나니 긴장이 다소 풀어졌다. 식사를 마셨다고 하자 알카이드가 다가와 쟁반을 거두어 갔다. 
 
[알카이드]
첫날부터 많은 일을 겪셨으니, 피곤하실테지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좋은 꿈 꾸세요. 
 
 상냥한 인사를 남기고 알카이드는 방을 나갔다. 덩그러니 나만 홀로 방에 남았다.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니 다시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들끓었다.
 내가 아는 이세계의 세력, 그러니까 내 만화 〈시공 속에서〉에 등장하는 세력은 '실버나이트'와 '황제'밖엔 없었다. 그런데 여긴 그 둘뿐만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저쪽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이곳에도 존재하지만, 그들은 얼굴만 똑같을 뿐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닌 별개의 인격인 듯하다. 이건 내 상상의 범위를 완전히 넘어선 상황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꿈이 아니다. 뭐가 잘못됐는지 나 혼자 엉뚱한 세계로 떨어진 것이다. 
 황제와 마법사가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라니 ...나는 왜 신녀라 불리는 거지? 로샤가 이세계의 신녀를 신부로 맞이하겠다는 이유는 또 뭘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해야 내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고민에 잠겨 있던 난, 어느새 잠들어버렸다.

'에르세르 대륙(完) > 시작의 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6화. 취조  (0) 2024.01.02
5화. 처치  (0) 2024.01.02
4화. 황궁 밖 구경  (0) 2023.12.28
3화. 새벽녘  (0) 2023.12.28
1화. 황궁과 새장  (0) 2023.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