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28. 10:49ㆍ다음 역, 에덴/안내 (로샤)
나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방랑자를 물리셨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로샤의 생명도 위험해질 것이다. 마침내 통신기가 빠르게 진동했다. 통신기를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안전 시간이 찾아왔다는 알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패배한 방랑자들은 핏빛 돌로 변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저들은 이제 두 번 다시 빛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호수는 금세 평온을 되찾았고, 전투의 흔적은 아침 해가 떠오르면서 말끔히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
나와 로샤는 여전히 물 위에 떠 있었다. 체력이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사라졌다. 물에 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도저히 배를 향해 갈 수가 없었다. 무게를 분담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그나마 남아 있는 마지막 본능으로 로샤를 붙잡고 있었다. 계속 이대로 있다간 우리 둘 다 호수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말텐데.
...누군가 있다. 순식간에 온몸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사람인가? 아니면 방랑자? 나는 우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자를 힘겹게 바라보았다. 능력자든 방랑자든, 현재로선 그 누구도 쓰러트릴 수 없었다. 이제 나와 로샤에게 남은 건 위기뿐인 걸까?
그러나 물결 너머로 보인 것은 한 소년의 얼굴이었다. 그는 내 곁으로 헤엄쳐 와, 로샤의 손을 붙잡고는 등에 업었다.
[소년]
이 사람은 내가 잡고 있을 테니 따라와.
로샤를 등에 업었지만, 소년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나를 이끌며 배가 있는 방향으로 헤엄쳐 갔다.
투둑. 옷자락에서 떨어져 내린 물방울이 뱃전에 짙은 원을 그렸지만 금세 햇빛에 의해 말라버렸다. 나는 아직 의식이 회복되지 않은 로샤를 부축하며 힘겹게 그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소년이 배를 짓자, 배는 빠르게 기슭으로 향했다. 소년의 팔에는 닻 모양 문양이 있었다. 복장도 다른 능력자들과는 달리 물속에서 움직이기 편한 옷이었다. 그는 대체 누구인 걸까?
[나]
너 다쳤어.
고개를 숙여 보니, 전투 중에 다친 듯 종아리에 난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던 탓인지,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를 인식하고 나니 고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
윽...! 너무 아프잖아...!
나는 치맛자락을 찢어 상처를 대충 싸맸다. 엉성했지만 지금은 그게 최선이었다.
[나]
고마워, 넌 이름이 뭐니? 너도 능력자야?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내 시선을 피하고만 있었다. 배가 기슭에 닿자 소년은 우리를 떠났다. 그는 뭍으로 가지 않고, 마치 언제나 그래 온 듯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나]
…조심해야 해!
그는 맑은 물결을 헤치며 빠르게 사라졌다. 내 말이 그에게 닿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로샤에게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라고 해야지... 나는 흐릿해지는 의식 너머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탈진 상태였던 난 피까지 흘린 탓에 의식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로샤의 상태를 재차 확인하자마자 피로와 걱정이 단숨에 나를 덮쳤다. 곧이어 졸음이 물밀듯 쏟아졌다.
-
...눈 부셔. 반짝이는 무언가가 내 눈꺼풀을 간질였다. 햇빛인가? 몇 시지? 오늘 학교 가는 날이던가? 평소대로라면 고양이 녀석의 침으로 얼굴이 범벅이 됐을 텐데. 아니, 요즘 사건사고가 많았으니 오늘은 정상 수업일려나? 일단 공지부터 확인해봐야겠다...
호수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내 주변은 짙은 나무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기슭에 정박된 배의 선저 곳곳에는 나무 본연의 색이 드러나 있었다. 배에 난 자국을 보니, 지난 밤에 있었던 일이 모두 떠올랐다. 셀레인섬이 아니다... 여기는 에덴이다. 그런데... 배가 저기에 있다면,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정신을 차렸지만,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몸의 감각을 되살리려 노력하는데, 부드럽고 따스한 무언가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살짝 움푹한 곳에 머리를 베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보니 로샤의 날카로운 턱, 그리고 그 아래를 따라 목젖이 눈에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니 전공 수업에서 배운 근거리 관찰이 떠올랐다. 자연광과 물의 선, 명암 대비 모든 것이 뚜렷했다. 무언가가 시야 한 구석에서 반짝였다. 로샤가 착용 중인 목걸이에 반사된 빛 때문에 눈이 부셨나 보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로샤]
일어났군... 괜찮아?
로샤의 손에 쥐어진 목걸이를 가리키자, 그는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로샤]
아... 미안.
그는 곧장 목걸이를 집어넣으려 했다.
[나]
잠깐만요, 그거... 뭐에요?
로샤는 목걸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로샤]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을 때, 놈에게서 뜯어낸 거야.
무척 얇아 보이는 금속 펜던트였지만, 손에 들어보니 꽤 묵직했다. 상단에 새겨진 문양은 거의 닳아 있었지만, 햇빛에 비치면 원래의 형태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십자로 교차된 문양 아래로 갈고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문양이었다.
반사적으로 손이 움츠러들어, 로샤에게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지난번 악몽이 떠올랐다. 그 기이한 익숙함이 늘 불편하게 느껴졌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로샤는 고개를 숙여 내 종아리를 가볍게 쥐었다.
[로샤]
아프겠군...
상처를 너무 허술하게 묶었던 탓에 천은 이미 느슨해져 있었고, 상처는 겉으로 다 드러나 있었다. 로샤는 호숫물을 떠와 내 상처를 깨끗이 닦아준 뒤 다시 천으로 꼼꼼하게 묶어주었다. 그는 내가 아플까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로샤]
호숫물은 상처를 빨리 낫게 해줘. 그러니 금방 괜찮아질 거야. 미안, 나 때문에 이런 곳에 널 데려와버렸어. 네가 싸울 때에도 짐만 됐지.
고개를 숙인 탓에 로샤의 머리카락이 맥없이 축 처져 있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늘어진 머리카락은 처량하게 흔들렸다.
[로샤]
미안...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그러자 로샤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고, 나는 그에게 미소 지었다.
[나]
미안하다고 하지 말아요. 급한 상황이 있잖아요. 저한테 물어봤어도 딱히 좋은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래도 살아남았잖아요, 그것도 이렇게 멀쩡하게. 자꾸 그러면 오히려 부담감이 심해져서 밥도 못 넘기게 될 거라구요.
[로샤]
...배고파?
로샤는 요점을 단번에 파악했다. 대양은 이미 머리 꼭대기에 걸려 있고, 열 몇 시간이나 공복 상태였던 탓에, 이미 배고픈지 오래였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샤]
생겨 온 식량들은 모두 호수에 빠져버렸어. 뭐라도 먹으려면 돌아가는 수밖에 없겠군.
로샤가 몸을 돌리더니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로샤]
자, 업혀.
내가 주저 없이 로샤의 등에 올라탔더니, 이렇게 곧장 업힐 줄 몰랐던 것인지, 로샤의 몸이 휘청거렸다.
[로샤]
...예의상 거절할 줄 알았는데.
[나]
그럴 리가요, 당신 때문에 다친 건데!
로샤가 피식 웃었다.
[로샤]
목 꽉 잡아. 괴롭힌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의 등에 업히자, 내 코가 그의 귓가에 닿았다.
[나]
로샤, 미안한데 냄새가 좀...
[로샤]
호수에 빠졌으니까 그렇지. 평소에는 깔끔하게 하고 다닌다고!
[나]
해명 안 해도 돼요. 어서 가요, 이랴!
[로샤]
....정말이지 호수에 던져버리고 싶군.
[나]
그럼 전 로샤를 꽉 붙잡고 놓지 않을 거예요!
돌아가는 길, 안정적으로 걷는 로샤 덕에 나도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호수를 바라보았다. 금빛 물결이 물고기 떼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로샤의 말대로 에덴은 정말 아름다웠다.
[로샤]
저긴 그린 아일랜드야.
[나]
...갑자기 웬 경치 소개에요?
[로샤]
가이드잖아.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네가 다른 세계에서 왔고, 그럼 이 에덴은 네게 있어 언젠가는 끝나버릴 여행 아닌가?
[나]
여행처럼 가볍고 즐거운 일은 아니죠...
[로샤]
그래... 네가 지금껏 경험해온 것들은 에덴의 최악의 일면이었지. 그래도 나중에 에덴을 회상했을 때, 좋은 기억이었으면 좋겠어. 물론 이 아름다운 섬에 데려다준 것이 로사라는 사람이었다는 걸 기억해준다면 더 기쁘겠지!
[나]
궁금한 게 있어요, 로샤...
[로샤]
오호, 드디어 나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한 거야? 좋아, 인심 썼다. 나에 관한 질문은 백 가지 정도 대답해주지. 키, 취미, 속옷 색깔... 알고 싶어? 대신 나이는 물어보지 마. 그건 나도 잘 모르니까.
[나]
...당신은 에덴을 좋아하나요, 아니면 싫어하나요?
로샤의 등에 귀를 대고 있으니, 그가 말할 때마다 내 가슴께가 울렸다. 이내 그 진동은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한참 뒤에 다시 울렸다.
[로샤]
모르겠군.
그 뒤로 우리 둘은 입을 열지 않았다. 햇빛이 우리 몸을 내리쬐어 옷을 다 말려주었고, 이따금씩 조금 낮은 곳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호숫가에서 멀어질수록 물길은 점점 좁아지고 녹음도 옅어졌다.
[??]
아파... 너무 아파...
나는 로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역시 소리를 들은 건지, 나를 고쳐 업고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쓰러져 있는 사람이 보였다. 가까이 가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나]
아침에 우리를 구해준 사람이에요!
나는 로샤에게 새벽에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로샤는 고마워하는 기색을 내비치긴 했지만, 소년에게 좀처럼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소년]
아파...
[나]
어서 내려줘요!
잠시 망설이던 로샤는 결국 나를 내려주었다. 푸른 호수의 치유 효과는 확실히 뛰어나, 더 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다가가, 웅크리고 앉아 소년의 상태를 확인했다.
[로샤]
만지지 마.
로샤가 나를 저지했다.
[로샤]
저 녀석 눈을 봐.
소년의 옅은 회색빛 눈은 고통으로 인해 가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희미하게 그 너머로 번뜩이는 금빛이 보였다.
[로샤]
멀리 떨어져. 곧 다른 존재가 될 거야.
[나]
그게 무슨 뜻이에요, 로샤?
[로샤]
한계에 다다른 능력자야. 방랑자가 될 운명이지. 정신을 잃고 나면 우리를 위협하는 괴물이 될 거야.
로샤는 힘겹게 말을 내뱉었지만, 너무도 직설적이고 참혹한 내용이었다. 나는 한참 뒤에야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방랑자는 원래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거에요?!
로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침묵은 곧 수긍이었다. 지금껏 싸워온 방랑자들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갔다. 하지만 기억나는 모습은 오직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뿐이었다. 혼란스러웠던 지난 밤, 그들은 그저 내 생명을 위협하는 괴물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연민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유일하게 뚜렷한 기억은 물 아래에서 들려오던 비명뿐이었다.
[방랑자들]
돌아가... 돌아가...
바다로 돌아가라는 건... 경고였을까, 염원이었을까.
[소년]
...아파.
약하게 들려온 신음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밖을 자주 돌아다녀서인지 소년의 피부는 까무잡잡하게 타 있었지만, 앳된 인상을 보니 나보다 어린 것 같았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나]
로샤, 이 아이를 구할 방법은 없나요?
내 질문에 로샤는 미간을 좁힐 뿐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나]
로샤, 우리 두 사람을 구해준 사람이라고요!
로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마음이 점점 가라앉았다. 이 에덴에서, 로샤는 날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식도 경험도 많았고, 포용력도 넓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점점 그는 나나 다른 능력자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알고 있었으면서도 방관자의 태도를 멈추지 않았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평소 열정적인 그였기에, 지금의 냉정한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비쳐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소년의 팔을 어깨에 들쳐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을 준 탓에 다리의 상처가 벌어졌고, 묶어둔 천엔 다시금 피가 묻어나왔다.
[로샤]
어디로 데려가려고?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를 여기에 버려두면 죽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뚜렷이 알고 있었다. 겉보기엔 무거워 보이지 않았지만, 온 힘을 다해야만 그의 체중을 견뎌낼 수 있었다. 고작 두 발짝 뗀 것만으로도 벌써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로샤의 목소리가 등 뒤를 쫓아왔다.
[로샤]
낮의 에덴은 방랑자를 받아주지 않아!
나는 그를 쏘아보며, 그의 무심함에 소리 없는 항의를 보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 없이 내 오른쪽 다리를 바라보던 로샤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로샤]
너같이 고집 센 아가씨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그는 내게로 다가와 내 등에 입힌 소년을 받아들었다.
[로샤]
...가자. 방랑자로 변하기 전에 거기 도착한다면, 아직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돌아가는 길, 나는 로샤의 뒤를 따랐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 아래로 전혀 다른 감정이 요동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어디로 가는 거냐는 질문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끝내 묻지 못했다. 문득 그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함께 싸우고 서로를 생사의 갈림길에서 잡아주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이따금씩 발소리가 겹쳐졌지만, 우리 둘의 그림자는 점점 더 길고 멀게 늘어났다.
처음엔 어렴풋한 추측에 불과했지만, 점점 눈에 익은 건물들이 보이자 확신할 수 있었다. 로샤가 나를 이끌고 온 곳은, 알카이드의 정원에 잘못 들어갔던 첫날의 그 거리였다.
'다음 역, 에덴 > 안내 (로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화. 뱃지 (0) | 2025.03.28 |
---|---|
9화. 보상과 교환 (0) | 2025.03.28 |
7화. 만류 (0) | 2025.03.27 |
6화. 호수의 유령 (0) | 2025.03.27 |
5화. 또 다른 집 (1) | 2025.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