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또 다른 집

2025. 3. 27. 19:38다음 역, 에덴/안내 (로샤)

시간은 끊임없이 자정을 항해 흐르고 있었다.
 
[로샤]
그만 가야 할 것 같아.
 
[나]
간다고요? 어디요?
 
[로샤]
위치가 발각됐고,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 여기에 계속 머무는 건 위험해. 행선지는... 네 말을 빌리자면 내가 소유한 또 다른 '부동산'이야.
 
로샤의 판단이 옳다. 우리 둘만으론 우리를 노리는 다른 능력자들을 상대할 수 없다. 어젯밤에 상대한 수많은 방랑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어둠이 내려앉은 밤을 틈타 비밀 기지를 떠났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로샤는 큰길을 피해 조심스레 움직였다. 빼곡한 총성과 참혹한 비명은 몇 번이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왔지만, 단 한 번도 정면에서 부딪히지 않았다.
 
소음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나는 우리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앞에 보이는 나무는 점점 빼곡해지고, 건물의 흔적은 점점 줄어들었다. 처음엔 길을 기억하려 했지만, 금세 포기하게 되었다. 이 순간, 내가 로샤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나 혼자선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나는 로사가 물가에서 걸음을 멈출 때까지 고마운 마음을 한껏 담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드디어 도착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눈에 들어온 건 기슭에 정박해 있는 작은 배 한 척이 전부였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밝은 달은 나무 그늘에 가려져 있었지만, 호수 위의 모든 것을 환히 비췄다. 나는 말없이 외딴 배를 바라보았다.
 
[나]
...부동산이라는 게?
 
[로샤]
맞아.
 
[나]
바람 불면 박살 날 것 같은데요!
 
[로샤]
에덴 밖이 어떤지 기억나?
 
물론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봤던 모래 산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
...사막이었죠.
 
[로샤]
그래. 에덴이니까 이런 규모의 저수지가 있는 거지. 능력자들은 저수지보단 사막에 익숙할 거야.
 
[나]
확실히 백 점짜리 계획인 것 같네요. 정말 빈틈이 없을 거라고 확신해요?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는 진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로샤]
장담은 못 하지. 몇 시간만 전이었더라도 자신 있게 대답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미안,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겠어.
 
사막 여행가의 총명함은 그새 많이 무더졌다. 그에게서 회의감과 망설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도리어 마음이 자분해졌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나]
아니에요, 내가 바보 같은 얘기를 했어요. 당신이 맞아요. 누가 됐든 최악의 상황에 놓일 때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는 없죠. 그리고 당신 말대로 어느 누가 '도망친 물고기가 이런 곳에 있으리라 생각하겠어요? 배를 띄우죠, 가이드님.
 
여러 방향에서 불어온 바람이 내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귓가엔 노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모처럼 평온한 시간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에덴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 물 속에 가라앉는 눈앞의 달빛처럼, 언제든 부서질 것만 같은 연약함이었다.
 
[나]
에덴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로샤]
다른 사람이 나고 자란 땅을 그렇게 평가하는 건 실례지.
 
[나]
미안해요...
 
반사적으로 사과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등을 곧게 펴고 앉아 그를 쳐다봤다.
 
[나]
...로샤?
 
당사자는 그저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분명... '다른 사람이 나고 자란 땅'이라고 했다.
 
[나]
로샤!
 
[로샤]
그만 불러, 안 그래도 네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일부러 단서를 홀린 거다... 그래놓고선 마치 내가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이를 간 보고 들은 단서들을 정리해 빠르게 질문을 도출해냈다.
가장 의문스러운 점은 로사를 찾아온 알카이드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정말 이상했다. 알카이드의 호칭을 보면 이미 아는 사이인 게 분명했지만, 둘 사이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지금의 에덴을 이해하기 위해선, 지금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로샤는 노를 놓고, 배가 호수를 자연스레 떠다니도록 내버려뒀다. 그러자 이따금씩 물결이 밀려와 배를 밀어냈다.
 
[로샤]
네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내 이야기를 하지.
 
맑고 깨끗한 물빛이 로샤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눈동자가 유달리 맑아 보였다.
 
[로샤]
난 너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일 거야. 그러니 너보다 많은 걸 경험해야 맞겠지. 하지만 에덴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이미 십 대 소년이었어. 그 전의 기억은 텅 비어 있었지. 눈을 뜨고 처음 본 사람이, 바로 알카이드야.
 
[나]
알카이드요? 그때 알카이드는...
 
[로샤]
그래, 알카이드도 어린아이였지. 왜소한 몸으로 침대 옆에 서서 내게 빵 한 조각을 건네줬어. 그러곤 "로사 형, 무사해서 다행이야.”라고 하더군. 그 빵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음식이야. 아주 인상 깊은 단맛이었지.
 
그때의 달콤함이 되살아나는 듯, 로샤의 얼굴엔 그리움이 가득 떠올랐다.
 
[나]
알카이드가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주었나요?
 
[로샤]
그냥 아주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고만 했어. 그래도 지금부턴 나아질 테니, 걱정 말고 여기서 살아도 된다고 했지. 나는 알카이드 외에 다른 사람은 만나지 못했어. 하지만 기억이 없으니, 이상하다는 생각은 못 했지.
 
로샤가 내 세계를 상상할 수 없듯, 나 역시 그런 극한 상황에서 두 아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로사는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 본 듯했다.
 
[로샤]
안쓰러운 얼굴로 보지 마. 에덴은 너의 세계와 비교가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보낸 날들이 네 생각만큼 최악은 아니었으니까.
 
로샤는 천천히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들려주었다. 로샤의 입에서 나온 에덴의 모습은 흡사 거대한 박물관 같았다. 모든 것이 그에겐 낯설었지만, 그는 이곳에서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배워 나갔다. 아무도 그와 놀아주지 않았기에, 그는 게임 규칙을 직접 만들고, 그 규칙을 스스로 지켰다. 소년 로샤의 게임 속 배경은 바로 끝이 보이지 않는 에덴이었다.
 
[로샤]
어린아이에게 충분히 넓은 곳이지. 알카이드가 에덴 밖은 무척 위험하다고 해서, 처음 몇 년간은 이곳에만 있었어.
 
[나]
그를 정말 신뢰하는군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샤]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알카이드밖에 없었으니까. 알카이드를 믿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지.
 
[나]
하지만 로샤는 훗날 여행가가 되었잖아요.
 
[로샤]
그건 내가 에덴을 떠난 뒤의 일이야.
 
로샤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사막을 떠돌며 모험한 이야기, 처음으로 타인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고, 상인이 될 기회를 얻은 이야기...
 
하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가 믿었던 것들을 뒤로 한 채, 에덴을 떠나게 된 계기.
 
[나]
그럼 계속 사막을 여행하다가 가끔 여기로 돌아오는 거군요. 제가 살던 곳에선 당신 같은 사람을 떠돌이라고 불러요. 에덴은 고향이 되는 기고요.
 
[로샤]
...고향이라. 에덴이 내 고향이라고?
 
그는 잠시 침묵했다.
 
[로샤]
굳이 어떤가를 고향으로 삼아야 한다면, 차라리 사막을 택하겠어. 안 그래도 조만간 그곳으로 돌아갈 예정이거든.
 
내 추측은 들리지 않았다. 로샤에겐 분명 에덴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분명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나]
그럼 처음엔 왜 에덴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건가요?
 
[로샤]
뭔가를 발견했거든...
 
[나]
뭘 발견했는데요?
 
나는 곧장 되물었지만, 로샤는 말을 멈추고는 턱을 문질렀다.
 
[로샤]궁금해? 이 정도면 세 번째 질문으로 쳐야 할 것 같은데...
 
[나]
쩨쩨하게!
 
사실 꽤 오랜 시간 로샤와 함께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잘 알지 못했다. 모든 일에는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다른 이들은 에덴의 주인이 되기 위해 에덴에서 살아가는 거라면, 로샤의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시종일관 전투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나를 자신의 곁에 뒀다. 나는 그가 조건 없이 나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행동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어릴 때부터 나고 자란, 그의 모든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에덴에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까?
 
[로샤]
아가씨, 그렇게 매서운 얼굴로 쳐다보지 말라고... 내 얼굴에 답이 적혀 있는 건 아니거든. 내 잘생긴 얼굴을 기억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면, 더 가까이 와도 괜찮은데.
 
나는 그제야 내 노골적이었던 시선을 의식하고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로샤]
곧 새벽이니 어서 자. 내가 불침번을 설게.
 
[나]
괜찮겠어요? 로샤도 하루 종일 고생했잖아요...
 
[로샤]
중요한 전력을 보호해야 하잖아. 괴물이 나타났을 때 날 앞세울 생각은 아니겠지? 놈들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난 쓰러지고 말걸!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무서운 척 하는 로샤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새 나왔다. 그가 없었다면, 내가 이곳에서 이렇게 웃을 일은 없었을 거다.
 
[나]
그럼 부탁 좀 할게요, 고용주님.
 
나는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고 눈을 감았다. 잠결에 호수의 물결이 뱃전을 갈며 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내 등을 쓰다듬으며 피로를 밀어내주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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