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수집가

2024. 7. 6. 19:21다음 역, 에덴/안내 (로샤)

 겁에 질린 세 사람을 보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

시간이 없어서요. 이제 지나가도 될까요?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허등지등 일어나, 눈 깜짝할 사이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을 물리치고 나자 조금 진정이 되었다. 움직임만 신중히 한다면 이곳에서도 내 한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다. 

 

짝짝짝.

 

 해 질 녘의 공기를 가르고 맑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나]

또 누구야?!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바로 앞 골목에서 로샤가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추친 그는 휘파람을 불었다. 

 

[로샤]

멋진걸. 데이트를 방해하는 녀석들은 저런 꼴을 당해도 싸단 말이지. 

 

 나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나]

언제 온 거예요? 

 

[로샤]

음, 언제더라... 아마도 네가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즈음? 하도 안 오기에 헤매는 줄 알았지. 

 

 진작에 도착했으면서 도와주기는커녕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니. 로샤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던 걸까. 대비책을 준비해놓고 있었을테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문자로 말했던 저녁 식사는요? 하루 종일 걸어 다녔더니 배가 너무 고파요. 

 

[로샤]

미안하지만 조금 더 참아야겠는걸. 집에 가기 전에 살게 좀 있어서. 

 

[나]

...살 거요? 

 

[나]

 에덴에도 '쇼핑'이란 개념 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로샤]

응.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사주지. 사탕 줄까? 

 

[나]

세 살짜리 어린아이 취급하지 말아요! 

 

 로샤는 씨익 웃으며 길을 안내 했다. 그는 블랙 스트릿의 복잡한 뒷골목을 능숙하게 가로질러, 은밀하게 숨겨진 작은 문 앞에서 멈췄다. 

 

-

 

 ...문 너머엔 놀랍게도 거래소가 있었다. 비좁은 공간에 항아리와 허름한 주머니들이 쌓여 있었고, 빵이나 설탕, 의약품 같은 생필품 외에 수공예품 같은 것도 갖추어져 있었다. 물자가 부족한 에덴에선, 이만하면 작은 마트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신기한 마음에 두리번거리고 있자, 바스락거 리는 소리와 함께 한 청년이 잡동사니 더미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거래소의 사장이 틀림 없었다. 

 

[거래소 사장]

어? 로샤, 마침 잘 왔어! 필요하다고 했던 물건이 막 들어왔거든, 사막에서부터 가져왔지! 꽤나 애먹었다고. 마음에 들면 값은 제대로 쳐줘야 할 거야! 적어도 빵 다섯 조각은 받아야겠어! 

 

 두 사람은 구면인 듯, 사장이 로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낮선 얼굴을 발견한 사장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그의 얼굴엔 더욱더 짙은 웃음이 떠올랐다. 

 

[거래소 사장]

아무래도 이쪽 아가씨 마음에 들어야 할 것 같네. 

 

[로샤]

그러면 좋지, 제이슨. 

 

[나]

로샤, 사려는 거예요...? 저랑 관런된 거예요? 

 

[로샤]

생화. 저녁식사 테이블을 장식할 꽃이 없어서 걱정했거든. 마침 제이슨에게 물건이 있다길래 서둘러 왔지. 

 

 진지하게 설명하는 로샤의 모습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이 극한 상황에서 고작 테이블을 장식할 꽃 한 송이를 구하려고 한다고? 로샤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 건가? 그때 로샤의 주머니가 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부터 제이슨의 시선이 그 주머니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제이슨]

귀여운 아가씨, 내가 아주 신선하고 예쁜 꽃을 가져왔거든. 분명 아가씨랑 잘 어울릴 거야! 

 

 제이슨의 말에 나도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잡동사니 더미 속을 뒤지던 그는 곧 조심스럽게... 선인장 하나를 들어 올렸다. 로샤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로샤]

이게... 생화라고? 

 

 나는 옆에서 폭소를 터뜨렸다. 아무래도 이 사장은 생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제이슨도 장사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챈 듯, 조심스레 나를 따라 웃었다. 

 

[제이슨]

아... 하하하, 그럼 그냥 빵 세 조각에 가져가든가...

 

 로샤는 제이슨의 흥정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로샤]

다른 거래소에 가보지. 

 

[제이슨]

엇, ...두 조각, 빵 두 조각! 아가씨는 어때? 

 

 로샤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제이슨은 목표를 바꿔 내게 다가왔다. 그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간절한 눈빛으로 허리를 굽혔다. 계속 보고 있기 힘든 모습이었다. 사실, 나는 작은 생명을 보살필 자신이 없어서 예전부터 꽃시장에 가면 선인장을 골라오곤 했었다. 

 

[나]

로샤, 저 사실 선인장 꽤 좋아해요. 강한 식물이니 에덴에서 키우기 딱 좋겠어요.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식은땀이 나려던 찰나, 로샤는 빵 두 조각을 꺼내 제이슨의 손에 쥐어주곤 내게 선인장을 건네주었다. 

 

[로샤]

 널 위해 산 거니, 네 마음 가는 대로 해. 이렇게 연약하고 작은 존재가 이 험한 환경에서 얼마나 살아남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는 그의 말 속에 뼈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그마한 초록색 선인장을 만져보자, 뾰족한 가시에 찔려 손가락이 따끔했다. 

 

[나]

걱정 말아요, 분명 오래 살 거예요. 

 

 제이슨이 연거푸 감사 인사를 하며 우리를 문까지 배웅해줬다. 밖은 이미 완연한 밤에 잠겨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줄곧 선인장을 들고 있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녹음에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로샤]

동정심은 좋은 거지. 하지만 여긴 그런 게 통하는 곳이 아니야. 

 

 로샤가 내게 충고했다. 그의 진심어린 충고에 고마워하려던 그때... 잠깐! 등 뒤에서 한껏 소리를 죽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

쉿...

 

 나는 로샤에게 손짓하며 다시금 확인했다. 틀림 없어, 십 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최소 다섯 명은 있다! 

 

[나]

따라와요.

 

나는 작게 외친 뒤 로샤의 손목을 붙잡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내 속도에 맞춰 빠르게 따라붙었지만, 줄곧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적이나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하지만 상대의 실력과 머릿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정면 승부는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내게 끌려다니면서도 아무런 의문을 드러내지 않던 로샤는 한 골목을 지나친 뒤에 아쉬운 듯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로샤]

저긴데...

 

 아무래도 목적지가 그 골목에 있었던 것 같다. 

 

[나]

뒤 돌아보지 말아요. 로샤, 제 말 잘 들어요. 누군가 우리 뒤를 밟고 있는데, 한 명이 아니에요. 아까 절 막았던 그 사람들인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 함부로 거처를 드러냈다간 위험해질 거예요.

 

 그에게 상황을 빠르게 설명하자, 로샤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로샤]

우릴 따라오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라면, 내 경호원 같은데.

 

[나]

...그걸 왜 이제 말해요!  

 

 나는 그를 매섭게 노려봤지만, 로샤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로샤]

나처럼 연약한 사람이 돌아다니려면 기본적인 조치는 취해야 하지 않겠어? 난 아픈 거라면 질색이거든. 그래서 식량과 에덴에 남을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고 그들을 고용했지. 

 

 로사의 고용 조건 중 에덴에 남을 기회'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나]

그 말은, 당신만 따라다니면 에덴에 남을 수 있다는 건가요? 

 

[로샤]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말해두지. 

 

그럼 제게도 그 기회를 줘요! 

 

[로샤]

정말 내게 고용된다면, 날 보호하는 게 의무가 될 덴데? 물론 네겐 특권을 주지. 24시간 내내 날 지킬 필요는 없어. 

 

 로사의 후한 인심에, 나는 그에 대한 경계심을 거의 내려놓았다. 

 

[나]

...근데 정말 싸울줄 몰라요? 

 

 나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결코 말랐다고는 할 수 없는 넓은 그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로샤]

...이건 무슨 상황이지? 

 

수십 명의 건장한 용병들이 나를 겹겹이 에워싸며 손에 쥔 무기를 번뜩였다.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총알에, 나는 차마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로샤]

그렇게 긴장할 필요들 없다고. 자, 다들 진정하고... 적당히 느긋하게 있어도 좋아, 특히 이렇게 분위기가 좋을 말이지. 

 

[용병들]

예!

 

 차가운 눈빛과 느긋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 이 모순된 미소는 로샤의 얼굴에 모호하고도 무해해 보이는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

당신을 가까이한 건 위험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로샤]

무서워졌이?

 

[나]

아니에요. 근데... 먹을 거 없어요? 저 진짜 배고픈데...

 

 로샤는 웃음을 흘리고는 나를 데리고 골목길 안으로 몇 걸음 걸어 들어갔다. 지저분하고 낡은 문 앞에 멈춰 선 그는 몸을 돌려 날 초대하는 듯 손을 내밀었다. 

 

[로샤]

어서 와.

 

 초라해 보이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치였다.

 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깨끗한 바닥과 벽면, 테이블 위의 촛대와 주전자, 은제 술잔 등 여러 가구와 소품이 테이블 위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달콤한 코코아와, 얇게 썬 소시지와 빵이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버터 나이프도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있는 힘껏 뺨을 꼬집어 보았지만... 아픈 걸 보니, 역시 꿈은 아니다. 난 아직 에덴에 있는 게 분명하다. 

 

[로샤]

편히 앉아. 

 

 나는 말을 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러자 집주인인 로샤 역시 조금 긴장한 눈치 였다. 

 

[로샤]

손님을 초대한 건 처음이라, 아무래도 익숙지 않군. 그렇지, 괜찮은 와인이 있는데. 가져올 테니 잠시 기다려주겠어? 

 

 로샤는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내 장가로 다가갔다. 바닥에 자물쇠가 달린 문이 있었 는데, 아무래도 지하 저장고인 듯했다. 로샤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복잡해져만 갔다.

 분명 그는 나와 같은 시기에 에덴에 들어왔는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이런 곳을 찾아낸 걸까? 로샤가 나보다 빨리 입장 자격을 얻었다 해도, 규정대로라면 기껏해야 며칠 전에나 얻었을 것이다. 고작 며칠 만에 이렇게 공간을 꾸밀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로샤는 경쟁자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에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장에서 그의 역할은 무엇일까? 

 

[로샤]

근사한 와인을 가져왔어. 

 

 얼마 지나지 않아 로샤가 소장품을 들고 돌아왔다. 짙은 황혼 속에서,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로샤는 나를 위해 진절하게 의자를 빼주었다. 눈앞에 놓인 음식의 유혹을 못 이기고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의문들은... 우선 배부터 채우고 생각하자. 

 빵 두 조각과 바뀌온 선인장도 테이블 한 켠을 장식하고 있었다. 방 전체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서인지, 로샤는 몇 번이나 힐끔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루 동안 잘 먹지 못해 배가 고팠다. 하지만 느긋하고 우아하게 식사하는 로샤를 보니 허겁지겁 먹을 수가 없었다. 부드러운 빵과 육즙 가득한 소시지, 거기에 와인까지. 다만 와인은... 행여나 취할까 봐 몇 모금 홀짝이기만 했다. 텅 비어 있던 위장이 조금씩 재위지는 게 느껴지자, 만족스러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

그럼 여긴 당신 소유의 부동산인 건가요? 

 

 나는 상인이라는 로샤의 신분에 최대한 맞춘 어휘를 골라 물었다. 

 

[로샤]

'거점 중 하나'라는 뜻이라면, 맞아. 여긴 쉽게 찾을 수 없지. 그러니, 마음 놓고 쉬어도 좋아. 

 

 나는 다시금 주변을 살펴보았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벽에 걸린 그림, 정확한 시간을 가리기는 탁상시계...

 

[나]

잘 꾸민 곳이네요. 신경을 많이 썼나 봐요. 

 

[로샤]

응, 내 비밀 기지야. 네 시선이 닿는 것들은 전부 내 구상에 맞춰 하나하나 찾아온 거지. 마음에 들어? 

 

[나]

네, 마음에 들어요. 꼭 진짜 집 같아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저절로 우리 집이 떠올랐다. 에덴에는 지하 셀터나 로사의 비밀 기지 같은 곳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 진정한 셀터는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영원히 따뜻하고 밝은 그곳뿐이다. 하지만 일이 해결되기 전까진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생각에 나는 체넘하듯 살짝 웃었다. 고개를 들자 로사의 진지한 눈빛과 마주셨다. 

 

[로샤]

무슨 생각 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그에게 나에 관한 일을 알려취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행히 로샤는 더 물어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품을 했다. 

 

[로샤]

시간이 늦었어. 잘 시간이군. 넌 손님이니 침대는 네가 쓰도록 해. 

 

[나]

그럼 당신은요...? 

 

 나는 사양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소파 위에 담요를 깔고 누운 뒤였다. 어쩔 줄 모르며 침대 옆에 서 있는데, 한참 뒤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샤]

...침대 시트 새거야. 걱정 마. 

 

[나]

그걸 걱정한 건 아니었어요...

 

[로샤]

그럼 어서 자. 나도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앞으로는 더 힘들이질 테니까. 귀중한 수면 시간을 당비하는 건 사치거든.

 

 그의 말이 맞다.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그의 말처럼 침대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하루 종일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닌 터라 무척 피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파 쪽에서도 로샤의 숨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그 희미한 인기척에도 어쩐지 마음이 진정되는것 같았다. 나도 담요를 뒤집어쓴 채 금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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