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훔쳐온 평화

2024. 2. 12. 22:23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실버나이트를 유인하기 위한 연극은 계속되있다. 로샤는 침전에만 머무르며 나중엔 일부러 회의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매일 부지런히 그의 목과 쇄골에다 작품을 남겼다. 로샤의 강력한 주장에 못 이겨 내 목에도 정성스럽게 그려 넣었다. 대제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가꿈은 내 자신이 한심해지기도 했지만, 부끄러움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나는 매일 다른 시종과 시녀에게 시중들게 했고, 귀족들에게도 교대로 문안인사를 오게 했다. 유치한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분명 이 소식은 궁 안의 첩자를 통해 반드시 예신에게 전해질 것이다. 

 

[엘리스]

두 분 연기... 조금 어설픈 것 같아요. 실버나이트같이 똑똑한 사람이 과연 눈치채지 못할까요?

 

[나]

오랫동안 공들여 함정을 팔 여유가 없으니 이 방법 뿐이에요. 사생활에 대한 험담은 다른 어떤 소문보다도 빨리 퍼지기 마련이죠. 특히나 윗사람의 품위 없는 이야기일수록요. 

 

[엘리스]

흐음. 도련님 쪽은 연극이 아니라 진심 같으신데요. 

 

[나]

밀리 선생님이 저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계시는 한은 어림도 없을 걸요. 

 

나는 밀리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미소는 언제나 자상하고 온화해, 돌아가신 어머니를 연상케 했다. 이런 날이 영원히 지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다정한 밀리, 티격태격하는 로사와 엘리스. 이 공간에선 긴장도, 경계도 어느새 희미해진다. 

 

[로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나]

지금이 너무 좋아요. 밀리 선생님도 엘리스도 다 좋고... 이 시간이 영원히 이어지면 좋겠어요. 

 

[엘리스]

저는 언제까지나 도련님과 아가씨를 따를 겁니 다. 

 

[로샤]

아아, 엘리스가 영원히 따라온다니. 벌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그래,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로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도, 미래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지도, 그렇다고 마냥 장밋빛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월계절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지금의 이 평화는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라는 걸, 로샤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

 

 어느덧 월계절은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로샤는 완전히 회복되어, 그동안 무더진 검술 연마에 힘썼다. 로샤의 연습 상대를 해주고 있는 엘리스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본인 말로 스나이트 성의 천재 소년 검사로 유명했다더니, 허세는 아닌 모양이다. 

 그날 저녁, 나는 바람을 쐬고 싶어 침전을 나섰다. 

 

[밀리]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쥐요. 

 

[나]

밀리 선생님, 무슨 일이시죠? 

 

[밀리]

바쁘지 않으시면 잠깐 얘기 좀 나눌까요? 

 

[나]

얼마든지요, 선생님. 

 

밀리는 나를 근처의 빈방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더니 갑자기 내 손을 꼬옥 붙잡았다. 오랜 세월 환자들을 돌보던 그녀의 손길이 꼭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밀리]

아가씨가 도련님의 진짜 신부가 아니라는 건 카이로스 예하께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도련님은 그렇게 생각지 않으실 거예요. 그분은 진심으로 아가씨를 좋아하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알아볼 수 있답니다. 

 

 당황한 내가 아무 대꾸도 못 하는 사이, 밀리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밀리]

도련님의 악명은 자자하죠. 권력과 피 에 굶주린 폭군이라고들 하더군요. 저는 도련님께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근에서 지켜본 사람이에요.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분은... 여전히 스나이트 성의 로샤 도련님이시더군요.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도련님은 제국과 신민들을 구하겠다는 일넘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을테죠.

 아가씨, 저는 어디까지나 시중인에 불과해요. 어쩌면, 제가 이러는 게 건방지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죠. 그래도 아가씨께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가씨가 우리 도련님을 선택한다면, 그분은 아가씨의 곁을 평생 지킬 거예요. 반드시 좋은 남편이 되어주실 거예요.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밀리의 간절한 눈빛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나]

제 생각에도 그래요. 로사는 좋은 남편이자, 훌륭한 황제가 될 거예요. 그는 빛이 나는 사람이 에요. 

 

 다음 말은 도저히 나오질 않았다. 지금으로썬 나와 로샤에게 미래란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밀리에게 진실을 알려줄 수도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나]

중요한 일을 끝내고 나면, 저는 반드시 로샤와 함께할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 사람을 생각하고 아껴주서서 감사해요. 우선은 최선을 다해 제 일을 완수할게요. 저는 모두를 실망시기지 않을 거예요. 

 

 밀리와 헤어진 뒤, 나는 착잡한 마음을 안고 황궁 최상층의 테라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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