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유일한 인연

2024. 2. 12. 20:57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로샤가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방문자는 카이로스였다. 내게 볼일이 있다는 그를 따라 내려갔다. 

 

-

 

[카이로스]

실버나이트를 한 번 더 유인해라. 

 

[나]

네...?

 

[카이로스]

의외로 지난번 작전이 꽤 유효했어. 

 

[나]

로샤를 위해서 말인가요? 

 

카이로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서 못마땅한 듯 덧붙였다. 

 

[카이로스]

명령이 싫다면 부탁이라도 하겠다. 실버나이트를 유인해줘. 그가 너에 대한 미련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너는 그의 유일한 약점 이야. 폐하와 에르세르, 그리고 너의 세계를 위해서라도 실버나이트는 기필코 굴복시켜야 한다. 

 

침통한 표정의 카이로스는 꽤 낮설있다. 

 

[카이로스]

너도 이미 눈치챘겠지. 실버나이트는 얼음 나비를 만들고 조종할 수 있다. 그는 재앙의 근원에 가까운 자, 힘으로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니 지금 에르세르인들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강림 의식뿐이야. 하지만 그자가 존재하는 한, 의식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의식이 성공한다 해도, 실버나이트가 마법진의 흔적을 따라 추적할 가능성도 있지. 새로운 세계엔 로샤도 나도 없다. 힘없는 에르세르 인들은 결국 몰살당하겠지. 이것은 언젠가 너의 세계에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다. 그자를 제거하면 모든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  일이 끝나면 내가 널 돕겠다.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들어주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이건... 나더러 예신을 죽이는 걸 도와달라는 뜻이잖아. 하지만 카이로스의 논리에 허점이라곤 없었다. 논리정연한 그의 주장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나를 미끼로 삼는 그 방법 이 먹힐지도 확신할 수 없었고.

 돌연, 카이로스가 몸을 돌리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계단 위를 노려봤다. 거기엔 시녀 한 명이 마법 장막에 가로막혀 서 있었다. 

 

[카이로스]

못 보던 얼굴이구나. 

 

[시녀]

방금 교대했습니다. 폐하께 약을...

 

카이로스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손을 들었다. 그의 마법에 의해 스스로 입을 벌린 시녀의 치아 사이에 무언가가 박혀 있었다. 저건...붉은보석!

 

[시녀]

...!

 

카이로스는 암살자의 목숨을 조용히 거두어버렸다. 

 

[카이로스]

어제부터 벌써 네 번째군. 이 정도로 노골적이고 끈질긴 공격은 처음이라 신선할 정도야. 그자는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런 조무래기들까지 이용하는 비열한 자다. 싸움이란 본디 그런 것.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더러운 진흙탕을 뒹굴며 점잔 뺄 수는 없지 않나. 

 

​[나]

이상해요. 대체 그가 왜 로샤를 노리는 거죠?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카이로스]

이유는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나는 뭔가를 의심하면서도 외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이로스는 그런 나를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로사를 향한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끈덕진 공격은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신은 로샤와 내가 함께 있는 데 동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는 로샤의 곁을 지켜야 한다. 

 

[나]

좋아요, 내가 해볼게요. 그 대신, 예신이 다시 나타나면, 잠시 에기를 나누게 해주세요. 그가 이 세계를 무너뜨리려는 이유를 알아야겠어요. 이유를 알면 막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카이로스]

순진한 소릴 하는군.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일단은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아직도 실버나이트에게 일말의 감정이 남은 모양인데, 일생을 함께할 상대로는 저 위에 누워 있는 남자 쪽이 백배는 더 낫지 않나? 

 

[나]

가,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아무튼 예신에게 넘어가진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카이로스]

그래. 폐하의 신의를 끝까지 저버리지 말기를. 

 

-

 

실버나이트를 자극하기 위해 좀 더 과감한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로샤가 잠든 사이, 나는 예비 황후의 이름으로 귀족들을 불러 모았다. 

 

[나]

휴식 중이신 폐하를 대신해, 이 몸이 폐하의 뜻을 전합니다. 불미스러운 일도 있고 했으니, 사냥회를 일찍 마무리하고 환궁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녁 연회는 예정대로 진행될테니 서운해 마시고, 폐하께서 오늘 특별히 황실 명주를 하사하신다시니 꼭 참석해주셔요.

 

[귀족]

뭐지? 폐하께서는 계속 안 보이시고, 갑자기 환궁이라니 좀 수상한데...? 

 

[귀부인]

그러니까요. 이세계에서 온 여자가 예비 황후랍시며 설치는데,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네요. 

 

[나]

아아, 이런 분위기가 아닌가 보네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가 이세계에서 온 지 아직 일마 되질 않아서 몰랐어요. 감히 나 따위가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명을 내리다니, 너무 건방졌죠? 지금 바로 올라가서 폐하께 잘 말씀드릴게요. 파벨 백작과 리베 부인이 제 말을 의심하니 직접 내려오시라고. 

 

두 귀족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 무릎을 꿇었다. 

 

[파벨 백작]

화, 황후 폐하! 황후 폐하를 모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인데, 어찌 저희가 감히 황후 폐하를 의 심하겠습니까! 불손한 행동으로 심기를 어지럽히다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황후 폐하! 

 

 두 사람은 땅바닥에 이마를 대고 바짝 엎드려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용서를 구했다. 말 몇 마디에 까무러칠 듯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니, 황제에 대한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다. 

 

[나]

좋아요,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폐하의 전언은 여기까지니, 모두 물러가도록 해요.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재 카이로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리를 떴다. 

 

[카이로스]

제법이군. 가장 의심 많고 뒷말하기 좋아하는 이가 누군지 물은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나]

저 많은 사람들 이름과 얼굴을 어떻게 다 일일이 외우겠어요? 잔머리가 세상을 구하죠. 

 

[카이로스]

폐하께서 신뢰하고 곁에 둘 수 있는 수행원을 요청했었지? 데려왔다. 

 

[밀리]

밀리라고 합니다. 랑셀에서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지요. 

 

[엘리스]

저는 엘리스라고 합니다. 성문 호위병으로 플라워 거리에 살고 있어요! 도련, 아니, 폐하께 드리려고 가져왔는데... 하아... 꽃은 역시 어울리는 사람에게 가야 하는 법. 저의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그는 내게 빨간 튤립 한 송이를 건넸다. 아름다운 꽃에서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 좋은 사람들 같아. 그런데... 이름들이 낮설지 않은데? 

 

[로샤]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가 들리는군. 게다가... 남의 신부에게 수작까지? 

 

[엘리스]

수작이라니 무슨 말씀을. 저는 그저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로서 도련님의...

 

[로샤]

짐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놈이 있다. 잡아다 매우 쳐라. 

 

[엘리스]

이크! 밀리 선생님! 

 

[밀리]

도련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저희가 곁에서 다시 한번 모시겠습니다. 

 

'도련님' 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생각났다. 두 사람은 로샤가 황성으로 건너올 때 그의 곁을 지켰다던 주치의와 호위기사였다. 스나이트 성의 재앙을 피한 그들은 로샤에게 있어 마지막 남은 고향 사람들. 이들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로샤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더니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로샤]

아직까지 여기 남아 있었다니... 황궁에서 내보내며 분명히 말했을텐데. 멀리 떠나 평범하게 살라고. 왜 내 말을 듣지 않은 거지? 나는 황위를 찬탈한 폭군이야. 당신들이 알던 열네 살 도련님이 아니라고. 

 

[밀리]

무슨 말씀이세요. 도련님은 여전히 도련님 이신걸요. 

 

로샤의 말을 부드럽게 받아넘긴 밀리 의사는 더없이 인자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밀리]

아아, 어쩜 이리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마님께서도 분명 하늘에서 기뻐하고 계실 거예요. 

 

[엘리스]

부럽습니다, 도련, 아니, 폐하. 저는 미녀가 그렇게도 많다던 플라워 거리에서 그토록 오래 살았건만 지금껏 혼자... 크흡. 

 

[밀리]

엘리스, 아직도 여자에게 인기가 없군. 그 번지르르한 말과 대도가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엘리스]

번지르르한 말과 태도가 문제라면, 저보다 더 심한 도련, 아니 폐하의 경우는 설명이 안 되는데요? 게다가 도련, 폐하는 억지부리기 대장이신.... 

 

[로샤]

가벼운 주둥이 역시 그대로군. 슬슬 고칠 방법을 찾아봐야겠는데. 

 

엘리스는 전혀 아랑곳 않고서 품에 안고 있던 튤립 다발을 로샤에게 안겨주있다. 

 

[엘리스]

꽃은 정말 도련님 드리려고 가져온 겁니다. 겨우 한 송이 비는 걸로 속 좁게 굴지 마세요. 

 

 우와, 굉장한 사람이다. 로샤를 상대로 저 렇게나 깐족거리다니. 신기하면서도 왠지 즐거웠다. 로샤와 엘리스는 계속해서 티격태격했다. 보다 못한 밀리 의사가 끼어들어 말렸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로샤는 내내 웃고 있었다. 냉소도 가식적인 미소도 아닌, 진짜 미소였다. 저 두 사람이 그저 고향 지인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로샤의 소중한 인연, 로샤의 가족이었다. 

 

-

 

 황제의 환궁 행렬이 위풍당당하게 이어졌다. 로샤는 호전되는 중이다. 나는 그에게 좀 더 자고 체력을 비축하라고 권했다. 

 

[로샤]

내가 어지간히도 걱정되는 모양이군. 

 

[나]

서로 협조하기로 했잖아요. 나를 지키려다 다진 몸으로 구조하러 와주기도 했고...

 

[로샤]

그대는 다른 세계에서 오랫동안 실버나이트의 보살핌을 받았지. 그와의 인연을 단번에 끊기 힘들다는 걸 잘 알아. 솔직히, 나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대는 날 선택했지. 운명이 내 편일 때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줬어. 고맙다.

 

 마차 좌석에 길게 드러누운 채 지그시 나를 바라보던 로샤는 이내 스르르 잠들었다.

 

 순조롭게 환궁한 나는 곧장 로샤와 함께 황제의 침전으로 들었다. 로샤가 침대에 누워 쉬는 동안 나는 책을 뒤적거렸다. 어느새 저녁 연회 시간이 다가왔다. 로샤를 깨운 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술연지를 꺼내 들었다. 

 

[나]

당신이 제대로 모습을 비치지 않은 탓에 사람들 사이에 의심이 피어났을 거예요. 구구절절 핑계 댈 것 없이 화끈하게 가죠. 폭군 옆에는 요비가 있는 법. 로샤는 저한테 빠져 두문불출 한 걸로.

 

[로샤]

내가 수면거울로 그대의 세계를 관찰하며 그대들이 '텔레비젼'이라고 부르는 상자를 본 적이 있다. 그대와 함께 조금 본 적이 있는데, 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군. 허나 내가 아무리 폭군이라지만 그대 이전엔 그 누구도 나의 여인으로 삼은 적이 없었다. 그대만이 유일한 내 신부라는 뜻이지.

 

[나]

그걸 어떻...! 아아, 수면 거울 짜증 나. 아무튼.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애정을 보여줄 수 있는 노골적인 증거가 있으면 더 좋겠죠. 여기 앉아봐요. 어디가 제일 눈에 띄는지 보자고요. 

 

'흔적'을 어디에 남기지? 아주 광란의 밤을 보냈구나. 나는 연지로 로샤의 목과 쇄골 여기저 기에 입술 자국을 그렸다. 미술과 전액 장학생이자 인기 만화가의 빛나는 실력을 이런 데다 당비하다니, 제국 어쨌든 내가 빚어낸 작품은 가까이에서 봐도 진짜 키스마크 같았다. 그러나 로샤의 눈에는 또 다른지, 거울을 본 그는 상당히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로샤]

하, 이럴 수가. 망측하도다. 이다지도 노골적이고도 부끄러운 짓을. 아아... 정말로 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이렇게 보니 나만 당한 것 같잖아! 나도 답례하는 게 맞지 않겠나? 사랑에 빠진 한 남자로서, 연지 따위는 쓰지 않겠다. 그대 목에 직접 딱 한 개만...? 윽!

 

누군가가 다가와 로샤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로샤]

선생님, 어린애도 아닌데 때리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밀리]

도련님, 마님의 당부를 잊으셨어요? 숙녀분께 이런 식으로 구시다니요! 좋아하는 상대라면 더욱더 우아하고 정중하게, 매너를 지키셔야 합니다! 

 

[로샤]

아, 예, 예, 알겠습니다. 

 

-

 

 로샤는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에스코트했다. 복도에서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는 엘리스를 보고서 로샤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세 사람은 전혀 격의 없는 사이구나. 보기 좋네, 정말로.  

 

-

 

 저녁 연회는 순조로이 진행됐다. 내가 로샤에게 남긴 '증거'는 제법 효과를 발휘했다. 귀족들은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느라 바빴다. 덕분에 황제의 신변에 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간단히 불식시켰다.

 만찬이 끝나고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춤을 추는 사람들 앞에서 보란듯 로샤를 데리고 침전으로 향했다. 

 

 밀리는 로샤의 상태를 확인하고 살뜰히 돌봤다. 그리고 내게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이라고 당부했다. 젖은 수건을 갈아주던 때, 그는 또 뻔뻔하게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로샤]

냉찜질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대가 이 옆에 누우면 금방 좋아질 것 같은데. 

 

[나]

어머나. 에르세르의 폐하께서는 다시 소파에서 주무시고 싶으신가 보네요.

 

 나는 찬물로 적신 수건을 로샤의 이마에다 철씩 내려놓았고, 그는 작은 신음을 홀렸다. 밀리와 엘리스는 저쪽에서 웃음을 참느라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로샤]

뭘 구경하고 있는 거야! 다 나가! 

 

로샤는 애꿏은 두 사람에게 버럭 화를 냈고, 밀리는 물러가면서 나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밀리]

아가씨, 도련님은 제 예상보다 빠르게 호전되고 있어요. 모두 아가씨 덕입니다. 

 

[나]

그럴 리가요. 로샤의 체력이 워낙 좋아서 그런 거겠죠. 

 

[밀리]

정말 고마워요. 도련님께서 저렇게 즐거워하시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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