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12. 23:04ㆍ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카이로스는 작정을 한 듯했다. 고위 마법사들을 포함해 마탑의 마법사들을 대거 동원해 퇴로를 완벽히 차단해버렸다. 그들은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어내 강한 마력으로 예신을 결박했다! 예신의 움직임이 차단된 순간을 틈타, 로사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찰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로샤의 검은 예신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막상 그 모습을 직접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로샤가 기회를 잡은 건 잘된 일이지만, 아무리 적이라 해도 예신이 다치는 것을 보니 가습이 아팠다.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다 얼른 입을 들어막아버렸다. 예신은 그런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

다.
[예신]
네 표정을 보니 일부러 당해준 보람이 있네. 평범한 인간의 무기로 나를 해칠 수는 없...?

갑자기 예신의 표정이 변했다.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당황한 눈으로 자기 상처를 내려다봤다.
[예신]
크윽, 이... 시건방진...!
[로샤]
그래. 황족의 피다. 받기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네놈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내 답례다. 평범한 무기로는 안 된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 강력한 정화의 기운이 것든 황족의 피는 효과가 있는 모양이군.
로샤는 예신의 몸에서 검을 빼내더니 그대로 목을 겨누어 휘둘렀다. 그러나 예신은 거대한 마법진의 속박을 풀고서 간단히 몸을 피했다. 예신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뻗어나간 빛의 파편들은 무수히 많은 얼음 나비들로 변해 일제히 날갯짓을 시작했다!
얼음 나비는 퇴로를 차단한 마법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그들을 지나쳐 빠른 속도로 황궁 내부를 뒤덮었다. 카이로스는 실버나이트의 제압을 포기하고 모든 전력을 황궁 방어에 투입하도록 지시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예신은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지극히 무감정한 눈빛으로 우리를 주시했다. 예신의 저 아름다운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는 날이 과연 있기는 할까. 나는 절망에 잠겨 로샤의 손을 잡았다.
[예신]
내게 부상을 입힌 두 인간이 모두 금발의 황족이라니, 우연치곤 기막히군. 그러고 보니, 둘의 외형이 닮은 듯도 한데... 가만. 넌 선황의 아들이 아니라 북부 출신이라 했던가? 아아, 그렇다면 그놈의 아들이로군.
예신은 날 바라보더니 스산한 얼굴로 말했다.
[예신]
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구나. 네가 원하는 건 다 줄 수 있단다. 하지만 이자는 안 돼. 이놈만큼은 기필코 죽여버려야겠거든 제 아비와 똑같은 길을 걷게 해주는 것도 좋겠군. 스나이트 성이었던가? 무너뜨리는 데 사흘 걸렸지, 아마.
[로샤]
스나이트 성을 괴멸시킨 게... 네 짓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 그건 13년 전의 일이고 너는 고작...!
[예신]
시공을 넘나드는 사람에게 육체의 나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고향 다음은 나라 전체가 될 것이다. 기대해도 좋아. 너와 네 아비가 죽을힘을 다해 덤빈들, 나에게는 겨우 모기 두 마리가 문 것에 지나지 않아. 덧붙이자면, 네 아비 쪽은 따끔하지도 않았다.
로샤는 지금껏 잘 참아왔지만, 그만 흔들리고 말았다. 그는 불길 이 이글기 리는 눈으로 예신을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로샤의 팔을 붙잡고서 그를 달랬다.
[나]
절대로 넘어가선 안 돼요. 당신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예요. 알잖아요.
나는 덜덜 떨리는 그의 손을 꽉 잡고서 간절히 속삭였다.
[나]
흥분을 가라앉혀요. 예신과 정면으로 부딪쳐선 안 돼요.
[예신]
나를 상대로 너는 절대 승리할 수 없다. 네가 얻어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공포와 절망뿐. 그동안 궁금했겠지. 알려줄까? 스나이트 성의 최후가 어땠는지 말이야.
로샤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그는 악에 받쳐 검을 빼 들고서 예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예신은 공격을 회피하는 동시에 손을 휘둘러 얼음 나비를 소환했다. 나는 로샤에게로 달려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나]
로샤, 제발! 내 말을 들어요! 당신이 이럴수록 허점만 내보일 뿐이라고요!
얼음 나비떼를 거느린 예신은 죽음의 선고와도 같은 한마디를 던졌다.
[예신]
사흘 뒤, 황성은 제 2의 스나이트 성이 될 거다. 로샤, 이것은 나의 답례다. 사흘 동안 네 아비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절망에 몸부림치거라.
예신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향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담담하게 고개를저있다.
[예신]
아직도 고집을 꺾지 않았구나. 편할 대로 하렴. 사흘간 어떤 공격도 너에겐 통하지 않을 거야. 모든 것이 끝난 후 널 데리러 오마.
내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는지, 예신은 허공에 은빛 고리를 소환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하늘은 한층 더 어두워졌고 맹렬한 폭설이 시작되었다. 끔찍한 풍경이었다. 얼음 나비들이 하늘 전체를 메우고 있었다. 그 작은 괴물들은 일제히 날갯짓하며 재앙을 퍼뜨렸다. 예신이 말한대로였다. 우리는 폭설이 황성 전체를 집어삼키는 광경을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로샤는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로샤의 손을 꼭 잡고서 힘주어 말했다.
[나]
장담할게요. 예신, 아니, 실버나이트는... 이번만큼은 실패할 기예요. 당신에겐 내가, 그리고 많은 조력자들이 있어요. 당신의 사람들이 함께 싸워줄 거예요. 우린 절대 지지 않아요.
로샤는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가법게 입을 맞췄다.
[로샤]
그래. 걱정 마. 나는 스나이트 성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기까지 왔으니까. 고맙다.
[카이로스]
부하들을 지원하러 가보겠습니다.
[나]
나도 도울게요! 예신의 공격은 나를 피해 갈 거라고 했으니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카이로스는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내가 얌전히 지시에 따르기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에르세르 대륙(完) > 아이리스의 장 (로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화. 먹구름 (0) | 2024.02.17 |
---|---|
19화. 밀리의 부탁 (0) | 2024.02.12 |
17화. 선택 (0) | 2024.02.12 |
16화. 훔쳐온 평화 (0) | 2024.02.12 |
15화. 유일한 인연 (0) | 2024.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