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준비

2024. 2. 11. 19:24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나는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한 적 없던 이야기를 아인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시공 여행을 통해 이미 에르세르의 사정을 알고 있으며 이번 월계절을 경험한 적 있다는 것을 전부 얘기했다. 그리고 지난 여정에서 강림 의식이 실패하고 실버나이트의 음모가 실현된 과정을 아인에게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실버나이트가 아인을 속이고 배신했으며 결국 해치기까지 했다는 합리적 추론도 모두 말했다. 실버나이트의 진짜 계획은 강림 의식을 저지하고 얼음 나비로 대륙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 그리고 로샤와 카이로스는 그런 그를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는 것까지도 전부.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이대로 모른 척 떠나버린다면, 에르세르는 눈보라에 영영 삼켜질지도 모른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는 손을 내밀어 내 뺨을 어루만져주었다. 말하는 동안 무척 이나 격해졌던 감정과 그가 믿어주지 않을까 봐 불안했던 마음이 금세 진정됐다. 

 

[아인]

일단... 네가 한 말은 전부 믿어...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월계절의 황성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너와 나야. 

 

 아인은 냉정심을 유지한 채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아인의 말대로다. 치밀하고 막강한 실버나이트는 우리가 제 앞길에 걸림돌이 되리 란 것까지 계산에 넣어뒀을 터다. 게다가 지도를 가지고 있는 아인은 실버나이트에게 있어서 큰 변수였다. 그러니 그는 아인을 보자마자 제거하려고 달려들 것이다. 나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나는 강림 의식의 제물이니 발각되는 순간, 사로잡힐 게 분명하다. 실버나이트는 말할 것도 없겠지. 그가 나를 살려둘 리 있겠나. 

 

[아인]

돌아간다는 건, 거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각오는 되어 있나? 

 

 아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마음을 읽으려는 듯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을 앞두었다 생각하자 오히려 머릿속이 맑아졌다. 강력한 두 세력의 교전에 휘말리면 아인의 말대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도망칠 순 없다. 그러긴 싫다. 에르세르를,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차가운 눈에 파묻히게 내버려둘 순 없다. 전력을 다해야 해.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해. 나는 아인을 향해 확신에 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이미 각오한 일이에요. 

 

 나는 아인의 손을 끌어와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내 손가락을 맞물렸다. 그리고 깍지 낀 손을 있는 힘껏 쥐고 흔들었다. 

 

[나]

그지만, 죽지 않을 거예요. 죽으려고 여길 온 게 아니니까. 나는 지키고 살리러 온 거예요. 당신과 나, 그리고 이곳의 모든 사람들을. 아직 기회는 있어요. 계획만 잘 세우면 머릿수는 부족한들 뭐라도 할 수는 있을 거예요. 우리가 실버나이트를 막아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짙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 뺨을 살며시 어루만지던 그의 손길이 속눈썹과 콧날을 지나 입술로 내려왔다. 내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가법게 입을 맞추었다. 

 

[아인]

시간이 여기서 멈춰버렸으면 좋겠어. 그럼 영원히 너와 함께할 수 있을 덴데... 이세계에서 온 네가 대륙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데, 에르세르의 황족인 내가 책임을 다하지 않을 수 있나. 

 

 그는 매력적인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속삭였다. 

 

[아인]

실버나이트가 강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게는 '황족의 피'가 흐르고 있지. 제국의 초석을 다진 선대 황족에겐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고 해. 여러 세대를 거듭하며 능력은 약화되었지만, 얼음 나비들에겐 그 힘이 아직도 통하는 모양이야. 전투 중 포위되었을 때 내 피를 본 얼음 나비들이 전혀 다가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내가 가진 힘을 알았지. 

 

[나]

아아,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도...

 

[아인]

이 힘이 내일 있을 전투에서 실버나이트를 상대하는 데 분명 큰 역할을 할 거야. 실버나이트는 인간이 아닐 거란 의심이 들어. 그렇다면 그도 황족의 피를 두려워하겠지. 그래. 황성에 가자. 적이든 재앙이든, 둘이서 함께 맞서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문뜩 불안해졌다. 

 

[나]

정말로 당신의 피에 깃든 힘을 이용해 그자를 물리질 수 있을까요? 

 

그는 씩 웃으며 되물었다. 

 

[아인]

그럼 먹어볼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를 믿고있으니깐. 다만 내일 결전을 앞두고 긴장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릴 수밖에. 실버나이트는 그만큼 상상 이상으로 강한 존재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가야 한다. 눈앞에 펼쳐진 이 길에 목숨이 걸렸다 해도, 우리는 반드시 가야 한다. 선택의 길목에 멈춰 서 있어선 안 된다. 지금 한 걸음 크게 내딛지 않으면 저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영영 도달할 수 없을 테니. 

 

-

 

 나와 아인은 곧장 집행인 부대를 소집해 계획을 세웠다. 황성에 진입하는 것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 쪽은 인원이 많지 않으니 직접적인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러려면 반란군이 밀고 들어와 혼란스러워지는 틈을 타는 게 좋을 듯했다. 우리는 황성 전체의 지하 통로를 잘 알고 있기에 이동과 대피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목표는 실버나이트. 기회가 올 때까진 숨죽인 채 주시하고 있다가 일시에 공격을 감행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힘을 아껴둬야 했다. 작은 싸움에도 절대 휘말려선 안 된다. 부대원들에게 계획과 규칙을 단단히 주지시켜 보내고 나니 벌써 새벽이었다. 작전까지 남은 건 겨우 몇 시간 정도. 잠시라도 쉬면서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우리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앤더슨은 손에 든 술병을 공손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앤더슨]

페나 부인이 엉망진창인 토끼굴을 뒤져 간신히 찾아낸 겁니다. 아가씨게서 만드신 겁니다. 

 

세상에, 그 난리통에도 상그리아가 무사했구나! 

 

[앤더슨]

생일 파티를 준비했었습니다만 아인 님께서 돌아오지 않으셔서, 요리는 이미 아가씨께서 깨끗이 다 드셨습니다. 

 

아니, 잠깐?! 이게 무슨...내가 그걸 다 먹어치웠다고? 앤더슨은 내가 반박하기도 전에 번개같이 물러가버렸다. 아인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인]

양이 상당했을 텐데, 그걸 다 먹었다고? 

 

당황한 나는 조그맣게 변명했다. 

 

[나]

상해서 버리면 아깝잖아요. 

 

 아인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병을 땄다. 나무 잔에다 술을 따라 입술을 적신 그는 무척 이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인]

달콤한 술이네. 아주 맛있어.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겠다며, 아인은 잔을 내려놓더니 스스럼없이 망토를 벗었다. 나는 왠지 어색해져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아인]

어디 가? 

 

나는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나]

잘 곳을 찾아봐야죠. 

 

[아인]

네가 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전부 자기 침대를 양보하려고 할 거야. 

 

듣고 보니 그렇다. 그들은 내가 아무 데서나 자도록 내버려둘 리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

그럼 나한테 침대 양보해줄 거예요? 

 

[아인]

아니.

 

 나는 황당해 그를 바라보았다. 아인도 마찬가지 얼굴을 하고서 나를 마주 보았다. 

 

[아인]

설마 나더러 바닥에서 자라고 할 생각이었어? 

 

 그는 침대에 털썩 눕더니 몸을 벽 쪽으로 붙였다. 그러고는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아인]

같이 누우면 되지. 으음. 그 많은 생일 음식들을 다 먹어치운 사람에겐 좀 비좁으려나. 

 

[나]

...아인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런 거라니까요! 날 두고 갔으면서...

 

 아인은 다시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그리고 미안함이 잔뜩 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인]

이리 와.

 

내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서 있자 그는 팔을 쭉 뻗어 내 손을 꼭 잡았다. 

 

[아인]

미안해. 다시는 안 그릴게. 

 

 그때의 서운함이 아직도 가슴 안쪽에 남아 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떠나던 순간 그의 마음도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을 잘 알기에. 

 

[나]

아인은 잠버릇 없어요? 코를 곤다거나 이를 간다거나...

 

 나는 일부러 농담을 건네며 아인의 옆에 누웠다. 그와 닿지 않도록 손발을 가지런히 하고서 말이다. 아인은 그새 반듯이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벌써 잠든 건가. 

 등잔불 하나만 켜둔 방은 어두침침했다. 나는 눈을 감았지만 쉽사리 잠들 수가 없었다. 점점 좀이 쑤셨지만 뒤척였다간 아인이 깰까 봐 조심스러웠다. 살며시 몸을 돌리려던 순간, 아인이 내 손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아인]

뭐 하려고?

 

 그의 눈, 코, 그리고 까만 머리카락... 이 각도에서 그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

부디 조심해요...

 

걱정이 멈춰지질 않는다. 지난번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적을 마주하기로 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아인]

그자가 강하다는 건 잘 알고 있어. 그는 지금껏 내가 상대한 그 어떤 적보다도 훨씬 더 강하겠지. 하지만, 나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 거다. 나는 대륙 최강 검술사의 아들이거든. 어머니는 몸집이 작은 편이라 상대적으로 힘이 약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무리하게 맞서지 않고 주로 일격필살을 노리는 전술을 쓰셨어.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첫 만남에서 생에 가장 강한 적수를 맞닥뜨렸다고 했지? 상대는 검을 뽑아 드는 순간부터 빈틈이라곤 전혀 없었대. 그러니 정면으로 그의 검에 맞서는 건 미련한 짓이지. 그래서 공격을 빠르게 회피하면서 상대의 체력을 떨어뜨리고 기회를 노렸다고 해. 그리고 전력을 다해 급소만 파고든거야. 어머니는 상대가 허점을 보이던 찰나를 놓치지 않았어. 검으로 하는 싸움이란 일격으로도 깔끔하게 승패가 갈리지. 걱정 마. 나는 계승의 검을 물려받은 후계자,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검사다. 

 

 자신만만한 모습이 오늘따라 더 믿음직스럽다. 나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더 과장하는 것이라 해도 좋았다. 

 

[나]

이겨요, 아인. 반드시 이겨야 해요. 내 허락 없이는 다쳐서도 안 돼요. 

 

그는 싱긋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소중히 어루만졌다. 

 

[아인]

그래. 어서 자.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잠이 단번에 몰려왔다. 괜찮을 거다. 그는 이제 절대로 날 떠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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