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최강의 검술사, 함께하는 여행

2024. 2. 11. 20:08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실버나이트의 검은 너무 빨라 보이지도 않았다. 세찬 눈보라 사이로 비치는 것은 포물선을 그리는 검광뿐. 신속한 동작에 빈틈이라곤 없었다. 실버나이트는 실로 눈과 재앙의 화신 그 자체였다. 지난번 여정에서 실버나이트가 어떻게 아인을 쓰러뜨릴 수 있었는지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실버나이트에게서 허점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런 압도적인 적을 상대론 숨 쉬는 것조차 힘에 부칠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인은 나와 달랐다. 급소를 노린 실버나이트의 공격을 아인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흘려보냈다. 동시에 제 피를 흩뿌리며 얼음 나비까지 막아냈다. 순백의 그림자는 희뿌연 눈보라 사이로 수많은 나비들을 지휘했고, 검은 그림자는 선명한 붉은색으로 그들을 베어냈다. 절대적인 힘의 충돌은 그림처럼 선명했다. 이런 명승부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것이다. 아인이 저토록 분투하고 있는데 내가 한가하게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마법진을 향해 달려갔다. 지금 내 자리는 아인의 곁이 아니다. 나는 나의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실버나이트가 갑자기 얼음 나비를 소환해 사람을 도륙하는 이유는 단 하나겠지. 강림 의식에 필요한 것은 살아 있는 자 십만 명의 목숨. 실버나이트는 아마도 뒤늦게 그 사실을 안 모양이다 그러니 로샤가 그 숫자를 채울 수 없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십만 명 대신 나를 제물로 바치면, 강림 의식은 성공할 수 있다. 아인을 포함한 모두가 새로운 세계로 이동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만 희생한다면. 얼마 남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 저 앞에 로샤와 카이로스가 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있는 힘껏 뛰었다. 아인을 보면 미련에 발목을 붙잡힐 것만 같았다. 

 

아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끝내는 못 했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안녕, 아인.
이젠 헤어질 시간이에요. 

 

 아인에게 새로운 세계와 미래를 줄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은 아깝지 않다. 이 마음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겠다. 비록 한발 늦었지만. 로샤와 카이로스는 나를 발견하고 표정이 굳었다. 

 

[나]

어서 강림 의식을 시작해요!! 내가 제물이 되면 다른 사람들은 희생할 필요 없잖아요! 

 

 나는 큰 소리로 그들을 재촉했다. 그런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카이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카이로스]

뒤를 보아라. 

 

 고개를 돌린 나는 예상치 못했던 광경을 목도했다.

 아인은 온몸에 숱한 상처를 입고도 실버나이트와 당당히 겨루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는 붉은 핏방울이 꽃잎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아인은 여전히 정면으로 실버나이트에 맞서지 않았다. 그는 모든 공격을 피해내며 실버나이트의 주변을 끈질기게 맴돌았다. 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느새 불안했던 마음은 사라졌고, 그가 질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의 투지는 검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실버나이트와 맞서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오직 아인뿐이다. 여기저기서 터져나온 탄식은 곧 중앙광장 전체로 퍼져갔다. 

 

[반란군]

실버나이트가 얼음 나비를 퍼뜨린 원흉이었다고...? 

 

[호위병]

저길 봐! 실버나이트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에 우리에게 저토록 강한 검술사가 있었다니...! 

 

[반란군]

실버나이트를 막을 사람이 있다니 다행이야. 겉보기엔 평범한 청년 같은데, 누구지? 

 

[앤더슨]

평범한 청년이 아니다. 저분은 선대 황제 폐하와 퓨에나 황후 폐하의 외아들이시자 황위 정통 계승자! 바로 아인 님이시다! 

 

[반란군]

뭐? 선황의 후계...? 그렇다면 저분이 우리의 진짜 군주! 

 

 두려움과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외침은 카이로스의 마법진에 반응해 한층 증폭됐다. 도무지 공격이 통하지 않자 실버나이트는 얼음 나비들을 한꺼번에 풀었다.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다시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아인은 자신의 백성을 비단 속에 내버려두지 않았다. 중앙광장의 모두가 아인만 바라보았다. 이 순간, 아인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순간, 실버나이트의 검이 아인의 어깨를 스쳤다. 충격이 제법 컸는지, 아인은 잠시 비틀거렸다.

 실버나이트가 방심하던 찰나, 아인은 계승의 검을 그대로 뻗어 적의 몸통에다 깊숙 이 찔러 넣었다. 말 그대로 회심의 일격이었다. 아인이 정말로 해냈어! 실버나이트의 기세가 주춤했다. 새벽에 아인이 내게 했던 말 그대로였다. 그는 계승의 검을 물려받은 후계자,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검사다. 갑자기 주변이 눈부시게 밝아졌다. 실패인 줄로만 알았던 강림 의식이 시작된 것이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 속에서 카이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로스]

세계 간의 통로를 여는 강림 마법진의 영적 제물은 단순히 '십만 명의 목숨'이 아니라 '무한한 감정들'이지.  우리가 너를 제물로 선택했던 것은 운 좋게 십만 명의 사람을 모은다 하더라도 그 감정을 한데 묶는 것은 불가능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 아인 전하의 승리를 통해 군중들의 감정은 완전히 합치되었다. 그 말은 곧... 마법진이 성공적으로 작동했다는 뜻이지. 굳이 너를 제물로 희생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로샤]

오랜 염원을 이루어쥐서 고맙다. 지금 가는 곳은 너와 아인이 열어준, 소중한 세계다. 스스로 만든 미래에서 마음껏 즐기거라. 부디 영원히 행복하길...

 

-

 

 카이로스와 로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주변의 광경이 사라지더니, 나는 어딘가로 빨려들어갔다. 어느새 나는 광활한 우주를 지나 암흑 속에서 유영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시공간 속에서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눈물 나도록 따스한 체온, 너무도 익숙한 촉감.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손을 꼬옥 맞잡았다. 아인. 시공의 거센 흐름 속에서도 그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냈다. 이 손을 절대로 놓지 말아야지. 영원히 그와 떨어지지 말아야지. 갑자기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내동댕이쳐져 바닥을 구를 줄 알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받아 안고 안전하게 내려준 것이다. 또 한 번 아인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떠보았다. 우리는 숲에 있었다. 설원도 동토도 아닌, 신록이 우거진 숲. 얼음 나비의 재앙 따위 감히 발붙일 수도 없을,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아인은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투로 입은 부상은 시공을 이동하는 도중 회복되었는지, 그는 아주 건재했다. 내게 손을 내밀며 아인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인]

다 끝난 건가...

 

[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정말로 다 끝났어요. 

 

[아인]

하지만... 우린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니깐, 내 말은... 돌아가지 마.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월계절이 지나고 마침내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재앙을 완전히 벗어난 이곳에는 과거의 원한 대신 미래의 희망만이 뿌리내리고 꽃필 것이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그림은 네가 직접 바뀌 그려야 해. 바꾸어보렴..."

 이번 시공 여행을 통해 내 바람은 이루었다. 그러니...

 

[나]

아인이랑 함께하기로 약속했는걸요. 과거에 내가 어디에 있었든지는 상관없어요. 앞으로 내가 있을 곳은 당신 곁이에요. 

 

또 한 번 전혀 모르는 세계에 떨어졌지만 이번엔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아인과 함께 살아간다면 그곳이 바로 '우리 집'이니까.

 정착할 준비를 하는 동안 사람들은 황실의 정통 계승자가 저희를 이끌어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아인은 권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는 굳이 부하들을 되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나와 함께 느긋하게 유랑하며 자유로운 검술사가 되길 원했다. 나 역시도 그런 생활이 싫지는 않았기에 그를 따르며 행복한 시간을 만끽했다. 

 

 우리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숲을 벗어난 곳에 터를 잡았다. 그중엔 황성 사람들도 있었고, 대륙의 다른 지역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집을 짓고 뿌리를 내렸다. 제법 마을처럼도 보인다. 에르세르 제국은 사라졌지만 서서히 새로운 사회가 탄생하고 있었다.

 아인은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필요한 물품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갈 때를 빼곤 대부분 나와 함께 숲에 머물렀다. 우리는 생계를 잇기 위해 함께 과일을 따거나 사냥을 했다. 가끔씩 큰 짐승을 잡으면 바깥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주기적으로 숲을 찾는 사람도 있었다. 은둔 중인 아인에게 지도자가 되어달라 부탁하러 오는 것이다. 끈질긴 읍소에도 아인은 완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인과 나는 오랜만에 마을을 방문했다. 상점에서 머리 장신구 하나를 사가지고 나오는 길, 우리는 분쟁을 목격했다. 다른 마을의 약탈이 있었단다. 그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다치고 애써 지은 집이 몇 채나 무너졌다. 약탈자들은 아인을 알아보고 그가 차고 있는 계승의 검을 곁눈질하더니 쌩하니 줄행랑졌다.

 마을 주민들은 아인에게 지도자가 되어 달라 다시 한번 간청하며 지난 이야기까지 꺼냈다. 황실 적통 후계자인 아인이 실버나이트를 물리치고 모두를 얼음 나비의 재앙으로부터 구해낸 이야기 말이다. 

 

[마을 연장자]

이 세계에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귀족들의 신망은 바닥에 떨어졌고 악한 지도자를 따른 반란군은 명분이 없으니... 우리는 누굴 믿고 따라야 합니까. 그러나 전하는 다릅니다. 전하는 모두를 하나로 모아 질서를 유지하고 제대로 된 국가를 재건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애걸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는 집요하게 매달렸다. 혼란 속에서 삶의 터전을 세우고 안전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건 나 역시 동의하는 바다. 아인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애초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데다 새로운 세상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기에,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아들로 태어난 순간 그에겐 사람들을 이끌어야 할 책무도 부여됐다는 것을 아인은 알고 있었다. 

 

[나]

이 정도로 부탁하는데 한번 해보는 게 어때요? 

 

[아인]

그랬으면 좋겠어? 

 

[나]

아인은 약자를 돕고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잖아요. 

 

 아인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을 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재앙을 피하려 넘어온 세계라지만 그 안에도 분쟁과 위기, 그리고 불확실성은 존재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면 훨씬 더 나은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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