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선택

2024. 2. 10. 23:37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나는 망연자실히 서 있었다. 그런 내게, 앤더슨이 진지하게 물었다. 

 

[앤더슨]

만약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면... 곧바로 전하를 찾으러 가실 겁니까? 

 

>당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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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4. 죄업

 

[나]

그에게로 가야죠. 여길 나가서 어떻게든 그 사람 찾아야 해요. 

 

[앤더슨]

그러시군요... 잘 알겠습니다. 

 

 앤더슨은 통로를 막고 있는 커다란 바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어깨로 바위를 단단히 받치고 두 다리를 땅에다 고정한 뒤 사력을 다해 밀어올렸다.

 

[앤더슨]

크으윽...!

 

 믿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바위들 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앤더슨이 어렵사리 만들어준 길은 좁긴 했지만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였다. 우리는 재빨리 그곳을 탈출했다. 

-

 황제가 중앙광장에서 친국을 벌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반역자는 심한 부상을 입은 재 포박돼 있었다고 한다. 끔찍한 소식이지만 절망하진 않았다. 그가 살아 있으니 됐다. 게다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았으니 충분하다. 아인은 강한 사람이니 내가 그를 찾아낼 때까지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

 

 그길로 로샤를 찾아갔다. 나를 본 사람들은 내가 돌아올 줄 몰랐다는 듯 깜짝 놀랐다. 

 

[나]

아인을 풀어줘요. 그러면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로샤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로샤]

조건은 그게 다인가? 

 

[나]

네. 만약 아인이 잘못된다면, 폐하는 월계절 당일에 눈앞에서 제물을 잃게 될 거예요. 못 믿겠으면 시험해보시죠. 

 

지그시 나를 바라보던 로사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로샤]

알겠다.

 

-

 

나는 가시덤불 새장이 있는 방으로 끌려갔다. 새장에 갇히기 직전, 가까스로 아인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정신을 잃은 아인의 옷 속에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지도를 숨겨 넣었다. 그런 뒤 아인의 눈꺼풀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나]

아인. 부디 마지막까지 무사하길. 

 

자유를 되찾기만 한다면, 그 무엇도 그를 막지 못할 것이다. 

새장 속에서 나는 아인과의 추억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정원에서의 밀회와 그날 밤 우리를 감싸던 달빛까지, 아직도 생생하다. 

 

-

 

 마침내 월계절이 밝았고, 나는 중앙광장으로 끌려갔다. 그새 광장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바닥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고, 그 앞에 높은 제단이 쌓여 있었다. 로샤를 다시 만났다. 그날 이후 처음이다. 

 

[로샤]

어지간히도 짐이 보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로군. 

 

나는 그에게 답을 얻고싶었다.

 

[나]

강림의식이 성공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나요?

 

 로샤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황제와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건 처음이었다.

 

[로샤]

강림 의식은 이 대륙 전체를 구할 유일한 방법이다. 생명력과 감정, 황족의 피, 그리고 너. 이것들을 제물로 바치면 모두를 구원할 수 있지.

 

잠깐, 황족의 피라면...! 

 

[나]

아인을 풀어주기로 했잖아요! 이 거짓말쟁이! 

 

[로샤]

황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로샤의 얼굴엔 거짓 한 점 없었다. 그렇다면... 자길 희생하려는 거라고? 그는 본인도 제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아인을 황태자로 세우고 억지로 황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려던 건 아인을 강림 의식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려 휘함인가. 로샤는 처음부터 아인에게 황위를 돌려줄 생각이었다는 말이 된다.

 내가 궁에 돌아오지 않았던들 로샤는 아인을 살려뒀을 것이다. 아인을 굳이 중앙광장에 매달고 화려하게 반역자 꼬리표를 달아준 것도 아마 황성 에서 강제로 내보낼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였겠지. 로샤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아인을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로샤의 계획에서 아인은 '살아남아야 할 황실 혈통'이었다. 

 

 그의 눈은 허공 너머 아득한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그간의 잔혹한 일들을 돌아보는지, 아니면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바라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로샤]

짐은 아인도, 그대도 좋다. 그대들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강림 의식은 반드시 완수되어야 해. 그대는 우리 에르세르 대륙 모두를 위해 고귀한 희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대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미래를 뺏고 싶진 않았다. 허나 나는 어디까지나 에르세르의 황제. 만약 다른 상황에서 그대를 만났더라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되었겠지. 그대와 아인이 부부의 연을 맺는다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축복했을 것이다. 

 

 로샤는 안타까운 듯 나를 바라보다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의식을 시작하라 큰 목소리로 지시했다. 

 알카이드가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그는 물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표정은 더없이 엄숙했다. 

 

[알카이드]

여기, 세상에서 가장 큰 영력의 제물을 바칩니다. 황제의 고귀한 생혈로 기꺼이 통로를 닦겠사오니... 허락된 땅에 우리를 인도하소서. 

 

 마법진의 정중앙으로 눈부신 빛이 모여들더니 기등을 이루어 솟구겠다. 그런데 그때...! 땅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고개를 돌린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인! 아인과 그의 심복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지하 통로를 통해 황성으로 침투한 집행인 대원들도 대열을 맞춰 진군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아인의 추종자들과 황실에 반기를 든 호위병, 그리고 일반 백성들이 대거 따르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돌진하던 아인은 말에서 뛰어내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월계절 강림 의식은 꿈에서 수없이 보았지만, 이런 장면은 처음이었다. 나는 몹시 당황해 로샤를 바라봤다. 로샤의 일그러진 얼굴엔 헤아릴 수 없는 절망과 비단이 드러나 있었다. 아인은 검을 들어 똑바로 로샤의 목을 겨누었다. 

 

[아인]

찬탈자 로샤! 네가 저지른 죄는 그 피로 돌려받겠다! 

 

 생명이 스러진 로샤의 푸른 눈은 공허했다. 거기엔 이제 과거도, 미래도, 아무것도 비쳐 있지 않았다. 아인은 그토록 꿈꿔왔던 복수를 마침내 이루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나는 그저 황망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카이로스가 나타났다. 아인이 황성을 점령하는 것은 카이로스의 계산에는 없었을 것이다. 카이로스는 로샤의 죽음을 확인한 뒤, 차분하게 아인을 바라봤다. 

 

[카이로스]

폐하. 

 

 카이로스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재 몸을 낮추고 새로운 황제를 향한 예를 표했다. 

 

[카이로스]

황제께서 승하하셨으니, 이제 전하께서 새로운 황제이십니다. 강림 의식에는 황족의 피를 이어받은 황제의 생혈이 필수불가결입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폐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카이로스는 의식을 계속하려는 것이다. 나는 아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대마법사의 마법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카이로스는 내 목으로 손을 뻗었다. 그 눈은 아인에게 고정된 채로.

 

[카이로스]

의식을 진행하도록 명령을 내리십시오. 

 

 복수를 마진 아인은 꼭 딴사람만 같았다. 그는 진작에 이 상황을 예견한 듯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아인]

로샤가 끝내지 못한 일을 내가 완수하겠다. 하지만 그녀만큼은 안 된다. 그녀를 대신할 제물이 없겠나? 

 

[카이로스]

십만 명의 목숨이라면 가능합니다. 다만, 필요로 하는 수가 너무 많아 성공 확률이 낮으니...'그녀'를 선택하시지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폐하. 

 

[아인]

알았다.

 

 아인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의 눈에서 그동안 찾아볼 수 없던 낯선 감정을 엿보았다. 선혈이 그의 팔을 타고 땅에 떨어졌지만,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인]

반란군으로 십만의 제물 수를 채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 

 

 그는 지극히 태연했다. 마치 저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가위에 눌린 것만 같았다. 나는 여전히 움직이지도 못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붙들려 있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 아인이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 그것은 포옹이라기보다는 속박에 가까웠다. 

 

나와 했던 약속은 모두 잊어라,

더 이상 네가 필요하지 않아.

미안하다.

 

 내가 아는 아인이 아니다. 아인은 본인을 희생해서 로샤를 대신했고, 나를 대신하기 위해 십만 명을 희생시켰다. 그의 선택은 로샤보다 훨씬 더 광적이고 끔찍했다. 그는 제 목숨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내버렸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이렇게나 간단했던가. 

 그는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나는 아인이 스스로가 가장 원치 않았던,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 나는 셀레인 섬에 돌아와 있었다. 동굴에 가 마법진을 발동시기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시공을 넘나드는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아인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돌이길 수 없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고, 그가 내게 직접 말해주길 바랐다. 나를 품에 꼭 안고서 다 꿈이었다고 속삭여주길 바랐다.

 눈보라 속에서 뒤돌아보던 따스한 눈빛도, 그의 검은 머리에 눈꽃이 내려앉은 모습도 그리웠다. 환상이라도 좋으니 ,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그를 보고 싶었다. 훗날 나는 세인트셀터 학원을 떠났다. 떠나던 날 가방 속에는 니체의 〈선악의 저편〉이 들어 있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심연을 응시하는 동안

그 심연 또한 당신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아인은 오래도록 증오에 사로잡혀 살았다. 끝없는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어서 였을까. 아인은 결국 그것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우리는 집념 속에서 만나 하나가 되었지만, 각자의 비탄을 안고 이별했다. 그가 내게 준 이별 선물은 아름답고도 슬픈 저주였다. 

 

남은 평생 동안, 나는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 

사 랑 이 라 는  이 름 의  죄 업 을 .

END. 

 

 

 

>여러 방안을 생각해봐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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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장 황궁으로 갈 생각이냐고 앤더슨이 물었다. 그의 질문에 나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물론 당장 아인을 찾고 싶은 마음은 더없이 간절했다. 하지만 황궁에 무턱대고 간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지? 아인을 찾으려다 오히려 나까지 로샤에게 붙잡히는 꼴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아인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 영영 사라지는 거다.

 애초에 내가 다시 에르세르로 돌아온 건 이곳과 내 세계에 닥칠 재앙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아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일을 다 그르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아인의 부하들과 토끼굴의 선량한 사람들이 남아있다. 수잔나가 여기 왔다는 것은 이곳의 위치가 이미 반란군에게 노출되었다는 뜻. 게다가 그녀는 이곳에서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실버나이트와 반란군이 언제 여길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생각을 멈추고 돌아보니 앤더슨이 지금껏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 돼. 내가 흔들리면 안 돼. 아인이 없으니 이제 내가 이 사람들을 이끌어줘야 해. 나는 품속에서 조심스레 지도를 꺼내 들었다. 아인이 내게 맡긴, 가장 중요한 무기. 이 지도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나]

앤더슨, 사람들에게 안전한 곳을 찾아주는 게 우선이에요. 이 지도에서 반란군에게 발각된 길이 어던지 전부 알려쥐요. 위험한 경로를 전부 봉쇄한 뒤에 이동해야 해요. 시간이 없어요. 서둘러야 해요. 

 

>23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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