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출전

2024. 2. 11. 20:05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아인]

깼어? 

 

[나]

아인...?

 

[아인]

시간 다 됐어. 준비하자.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그의 곁이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나]

나, 혹시 잠꼬대로 이상한 짓을 하거나 그러진 않았죠? 

 

아인은 나를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한 소릴 했다. 

 

[아인]

안 했어.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말이야. 

 

 아인이 사람을 시켜 전투복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각자 나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눈에 띄지 않고 반란군 틈에 섞이려면 복장부터 조심해야겠지. 각반을 하고 새카만 망토를 걸진 나는 평범한 전투원일 뿐, 이세계에서 온 신녀로는 보이지 않을 터다. 아인이 나를 불렀다. 

 

[아인]

준비는 다 됐나? 황성 문이 곧 열릴 거야. 

 

나는 짐짓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버나이트도 곧 나타나겠지. 우리는 지하 수로로 중앙광장에 진입한 뒤 실버나이트를 막을 계획이다. 

 

드디어 지하 통로 출구가 보인다. 출구로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월계절이 밝은 것이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되었다. 먼저 지하 통로를 올라간 아인은 몸을 돌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인]

가자.

 

아인의 손을 맞잡은 나는 힘껏 돌계단을 밟아 밖으로 나왔다. 

 

-

 

 칼바람에 눈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근처에서 충돌이 벌어졌는지 눈보라 사이로 격렬한 소음이 들려왔다. 최대한 피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소소한 전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나는 그림 소울을 소환해 신중하게 싸움에 임했다.  

 

 쉬울 것이라곤 생각한 적 없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고전했다. 실버나이트는 용의주도했다. 반란군이 흡사 요새의 성벽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어 도무지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런 주제에 기동력은 어찌나 좋은지, 실버나이트는 골목길에 매복했다 갑자기 광장에 나타나기도 하며 종횡무진했다. 지하 수로를 이용해도 겨우 따라잡는 수준이었으니, 실버나이트의 가공할 위력에 새삼 전율이 일었다. 실버나이트가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얼음 나비떼가 나타났다. 대륙 전체를 뒤덮을 재앙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도 많았다. 실버나이트를 뒤쫓는 게 시급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음 나비들이 무고한 이들을 집어삼키는 것을 손 놓고 볼 수만도 없다. 

 

[아인]

전원 방어진 구축! 

 

 아인의 명령에 집행인 부대는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일사불란하게 나아가 온몸으로 방벽을 세웠다. 

 

[아인]

이대론 안 되겠어. 곧장 실버나이트를 치자. 

 

 계획이 바뀌었다. 나는 아인과 눈빛을 교환했다. 아인이 반란군과의 직접 교전을 피하려던 것은 실버나이트의 허점을 찾아 총공격을 쏟아붓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도저히 그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재앙으로부터 보호하는 게 최우선.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실버나이트와의 정면승부밖에 없다. 그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는다 할지라도...

 

[나]

함께 가요, 아인. 

 

-

 

 실버나이트의 흔적을 좇아 도달한 곳은 중앙광장이었다.

 백마를 탄 실버나이트는 은빛 검을 휘두르며 반란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온통 하급 호위병들이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으로 가득했다. 실버나이트를 직접 본 나는 큰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는 예신과 똑같은 얼굴에 비슷한 체형을 하고 있었다. 풍기는 분위기마저 흡사하다니. 나는 실버나이트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는 상대의 우두머리, 또는 강력해 보이는 이를 가장 먼저 노렸다. 그의 검놀림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투박한 데 비해 너무도 막강한 위력을 자랑했다. 실버나이트가 인간이 아닐 것 같다는 아인의 생각에 점점 무게가 실렸다. 모든 공격이 단 일격으로 끝났다. 그가 검올 두 번 휘두를 때까지 서 있는 자가 없었다.  실버나이트가 적을 쓰러뜨릴 때마다 반란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아졌다. 반란군은 큰 소리로 노래하며 열을 맞추어 전진했다. 그러는 사이, 마법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 카이로스가 마법진을 서둘러 발동한 모양이다. 

 

 순간, 실버나이트 주변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얼음나비들이 일제서 날아올랐다. 가까이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던 반란군은 도망칠 새도 없이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반란군 병사]

이게 무슨... 으, 으아악! 

 

 얼음 나비들은 피아 구분도 없이 마구잡이로 날아다니며 제에 닿는 모든 것들을 얼려버렸다. 병사들은 공포에 찬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떼죽음을 당했다. 얼음 나비들은 우리 에게도 날아들었다. 

 아인은 계승의 검을 뽑아 주저 없이 자신의 왼쪽 팔뚝을 그었다. 예리한 검날이 스친 곳에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아인의 피가 닿은 얼음 나비는 순식간에 힘을 잃고 산산이 부서지더니 눈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리 쪽의 변화를 알아차렸는지, 실버나이트의 시선이 정확히 이쪽을 향했다. 등골이 오싹할 새도 없었다. 실버나이트의 검기가 아인에게로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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