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재기

2024. 2. 10. 23:55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앤더슨과 머리를 맞댄 덕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주 계획을 세우고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며 나는 아인이 얼마나 철저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가 내게 준 지도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빨간색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확인해본 결과 모두 피신처였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 피난용 임시 거처를 곳곳에 준비해두었던 것이다. 
 
-
 
 그리고 난 그중 하나에 머무는 중이다. 페나 부인 모자와 노바도 함께였는데, 오두막의 수가 많지 않아 한곳당 최대한 많은 인원을 배치해야 했다. 그리고 난 그중 하나에 머무는 중이다. 페나 부인 모자와 노바도 함께였는데, 오두막의 수가 많지 않아 한곳당 최대한 많은 인원을 배치해야 했다. 식량과 약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앤더슨]
아가씨께서 우려하셨던 대로 반란군이 지하 통로로 잠입하기 위해 시도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 통로들은 모두 바로 봉쇄했습니다.  
 
앤더슨이 목소리를 낮추고 상황을 보고했다. 
 
[나]
봉쇄되지 않은 통로는 경비를 강화해주세요. 그들은 지도가 없으니 무작정 헤집고 다닐 거예요. 우리 위치가 발각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해요. 그리고 혹시... 그의 소식은 아직인가요? 
 
어느새 내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앤더슨]
네, 아직... 하지만 계속해서 찾는 중입니다. 저희 모두 아인 님과 아가씨를 진심으로 따르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곧 그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앤더슨의 침착한 모습에 나 역시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거처와 식량 문제가 해결된 터라, 나는 이번 여정을 돌이켜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에 맞닥뜨렸다. 
 
[로샤]
월계절이 되면 그대와 나의 운명은 하나가 된다. 그리고 아인은 새로운 길을 떠나게 되겠지. 아인과 거리를 두거라. 이것은 경고다.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늘어나면 기대와는 다른 결말을 맞게 되는 법. 
 
'새로운 길'... 도대체 무슨 뜻이지? 아인을 황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낸 것도, 굳이 그의 임무도 아닌 일을 맡긴 것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명확한 사실은 단 하나. 월계절 당일, 로샤는 아인이 황성에 없기를 바란다는 것뿐.

 
...왜일까?
 

 
반란군과 실버나이트는 실제로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로샤가 폭군이며 아인을 해칠 사람인가 하는 전제 자체를 되짚어봐야 한다. 지난 여정의 마지막 순간, 로샤와 카이로스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로샤는 반정을 일으켰으면서도, 선황제의 적자인 아인을 굳이 황태자에 봉했다. 또한 나와 아인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했을 덴데 추궁하지조차 않았고, 아인을 황성에서 먼 곳으로 보냈다. 전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다. 설마... 로샤는 아인이 위험에 처하는 걸 원치 않는 걸까?!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달리 짚이는 게 없었다. 
 
그동안 로샤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아인을 처리할 수 있었을 덴데, 그러지 않았다. 명확한 이유를 말할 순 없지만, 로샤가 아인을 해치지 않으리란 생각이 굳어졌다.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찾으러 가지 않아도 그는 무사할 것이다.  
 
 곧 로샤가 중앙광장에서 반역자를 처단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나는 나를 불러들이려는 함정일 뿐이니 무시하라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 난 뒤 앤더슨에게 아인과 퓨에나 황후의 예전 부하들을 최대한 끌어모으라고 지시했다. 전력을 늘려놓으면 아인이 돌아왔을 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내겐 아인의 배지와 지하의 지도가 있다. 아인과 퓨에나 황후의 부하들에게 그보다도 확실한 증표는 없을테지. 이어서 나는 황성 주변의 감시를 강화하도록 했다. 아인이 이미 황성 밖으로 보내졌다 하더라도 행적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서 마음을 다잡았다. 침착해야 해. 내 판단을 믿자. 차분히 기다리면 그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아인은 반드시 돌아올 거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는 밤낮을 달려 내게 올 것이다.
 
 지하에 있어서 그런지 시간 감각이 엉망이었다. 그러나 토끼굴 주민들은 익숙하게 생활을 이어갔다. 커다란 양다리가 담긴 접시가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노바]
속이 든든해야 힘이 나죠. 드세요. 
 
 그러고 보니, 아인은 사람들이 정성껏 준비해준 생일 음식을 구경조차 못 했구나. 
 
[노바]
대장님이 돌아오셔서 아가씨가 홀쭉해진 모습을 보면 속상하실 거예요. 입맛이 없더라도 남기지 말고 다 드세요. 
 
페나 부인도 치즈 오믈렛을 들고 와 내게 권했다. 
 
[페나 부인]
얼음 나비 때문에 허등대느라 거의 다 놓고 왔어요. 있는 재료로 대충 만들었지만, 맛은 괜찮을 거예요. 
 
 똑똑, 오두막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다른 사람들도 음식을 잔뜩 가져왔다. 아인을 위해 준비했던 것일터.

 내 테이블에는 어느새 지난번처럼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거하게 차려져 있었다. 
 
[앤더슨]
어서 드십시오, 아가씨. 지금 저희에게는 아가씨가 아인 님이나 다름없습니다. 아가씨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이끌어주고 계시니까요. 저희는 아가씨를 믿습니다. 
 
 기대로 가득한 그들의 눈빛을 받으며 나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모두 아인의 사람들이다. 그러니 아인이 돌아오는 날까지 이들을 지켜줘야 해. 목이 꽉 메였고 식욕도 없었지만 이들을 안심시기기 위해 씩씩하게 굴었다. 모든 요리를 맛보고 연방 맛있다며 감탄사를 올렸다. 
 
[나]
자자, 다들 같이 먹어요! 
 
시끌벅쩍한 저녁식사였다. 
 
[나]
맛있는 거 든든하게 먹어두자고요! 내일도 할 일이 산더미니까요! 
 
그 많던 음식이 전부 사라졌다. 떠들썩한 분위기 덕에 불안이 한결 가셨다. 잔뜩 취한 주니가 내 앞에 어질러진 음식을 가리켰다. 
 
[주니]
이야아아. 누님은 정말 굉장해요. 그걸 전부 해치우다니! 역시 곰을 때려잡는 분이라 그런지 곰처럼 많이 드시네요! 
 
 나는 접시 위의 양다리뼈를 집어 들고서 짓궂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나]
뭐라고? 곰을 때려잡은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것 같은데, 직접 보여줄까? 
 
 한바탕 웃음이 휩쓸고 지나갔고, 저녁식사는 끝이 났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도무지 잠을 이를 수 없었다. 나는 잠을 포기하고 지하 통로로 나가보았다. 
 
-
 
 나는 황성 외곽의 출구로 가 집행인 부대 병사에게 말을 내달라 부탁했다. 일전에 타본, 온순한 말이었다. 말에 올라 주변을 돌다 보니 어느새 황실 별궁 근처의 숲에 이르렀다. 
 여기서 아인은 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전투 기술을 가르쳐줬었지. 늑대와의 대결은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쳐지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그립다. 늑대든 곰이든 얼마든지 몰고 와도 좋으니 그가 내 앞에 나타나줬으면 좋겠다.
 불과 며칠 전이건만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질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초조해졌다. 아인을 만날 수 있을까? 내 판단과 결정은 과연 맞을까? 싸늘하고 매서운 밤바람이 아프도록 내 뺨을 스쳤다.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단순히 체온이 식어서 때문만은 아니다. 약해지지 말자. 나는 자신만만한 '누님'으로 있어야 한다. 아인이 없는 동안, 내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줘야 한다. 아인을 위해서라도.

 말머리를 돌려 지하 통로 입구로 돌아왔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앤더슨이 서 있었다. 혹시 날 기다린 건가...? 
 
[나]
앤더슨, 혹시 내가 나가는 걸 봤어요? 
 
앤더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했겠군요. 
 
[앤더슨]
아닙니다. 아인 님도 밤에 혼자 말을 몰고 나가곤 하셨습니다. 하지만 늘 돌아오셨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인 님은 아가씨께, 그리고 우리에게 꼭 돌아오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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