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대치

2024. 2. 10. 22:25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

눈 앞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

아가씨를 감히 멋대로 데려가겠다고? 건방지구나. 

 

앤더슨...?

 

 여긴... 토끼굴...? 내가 왜 여기 있지? 이상한 건 한두 가지가 아니 었다. 앤더슨과 대치하고 건 사람은... 수잔나! 대체 저 여자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토끼굴의 존재는 비밀인데! 아니,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나]

아인...! 아인은? 

 

앤더슨이 침묵하자, 수잔나가 내게로 걸어왔다. 

 

[수잔나]

전하가 진정으로 원하시는 건 당신의 안전입니다. 그러니 저희와 함께 가시죠, 신녀님.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 발 물러섰다. 앤더슨이 집채만 한 몸으로 내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있다. 

 

[앤더슨]

전 아가씨를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아가씨를 위해 기꺼이 목숨도 바칠 것입니다. 

 

나는 수잔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입을 뗐다. 

 

[나]

아인은 어디에 있지? 

 

수잔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수잔나]

모르시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미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이 함께하는 걸 원치 않으세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돌아서 걸음을 재촉했다. 아인을 찾으러 가야 해. 그를 되찾아야 해! 

 수잔나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

비켜. 

 

말싸움할 여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수잔나]

황궁으로는 가실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폭군에게 대항하도록 부추기는 것, 그리고 당신을 찾아 실버나이트님께 데리고 가는 것. 그게 바로 제 임무랍니다. 

 

 그녀에게선 광기마저 엿보였다. 문득 그녀가 황후 침전을 나가기 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말인지는 몰라도, 그게 아인을 흔들었을 거란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나]

비키라고 했지! 

 

 수잔나는 유감스럽단 얼굴로 머리를 가로젓더니, 이내 반란군 부하들을 불러왔다. 집행인 부대원들도 속속들이 나타나 그들과 싸웠다. 내가 그림 소울을 소환하며 입구로 달려가던 참이었다. 사람들의 비명과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주니]

습격입니다! 저장고와 마구간 쪽이에요! 

 

주니의 뒤로는 토끼굴의 주민들이 허등지등 도망치고 있었다. 

 

[페나 부인]

아가씨! 도와주세요! 

 

[남자아이]

놈들이...! 얼음 나비가 쫓아와요! 

 

[앤더슨]

제가 맡겠습니다! 

 

 앤더슨은 도끼를 크게 휘둘러 단번에 얼음 나비들을 베어버렸다. 도끼의 위력은 엄청났다. 둔중하고도 예리한 무기. 문득, 아인이 말해준 집행인 부대가 도끼를 사용하는 이유가 떠올랐다. 집행인 부대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얼음 나비를 상대로도 전혀 겁내지 않고 용감히 맞서 싸웠다.

 저 출구로 나가 당장 아인을 찾으러 가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아인이 목숨을 걸고 지켜왔던 사람들을 버릴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이를 악물고 발길을 돌렸다. 

 

[나]

모두 물러서요! 여기서부던 내가 맡을게요! 

 

얼음 나비와의 치열한 전투는 계속되었다. 수잔나는 그 혼란 속에서 집요하게도 날 따라왔다. 

 

[수잔나]

전하께서 신녀님께 중요한 물건을 맡기셨지요? 

 

지하 수로의 지도를 말하는 거겠지. 반란군이 군침을 흘린다던 그 지도 말이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가장했지만, 수잔나는 의기양양한 미 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수잔나]

순순히 넘기시죠, 신녀님. 

 

 아인에게서 지도를 받은 이후, 한 번도 몸에서 떨어뜨려놓은 적 없다. 지금도 품 안에 잘 갈무리돼 있는 상태다. 절대 뺏길 수 없어. 앤더슨이 수잔나를 막아섰다. 수잔나는 기분 나쁘도록 음침한 목소리로 협박했다. 

 

[수잔나]

신녀님, 저는 마법사랍니다. 게다가 반란군에는 저 말고도 마법사는 많습니다. 마법으로 지금 이 안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목숨을 다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평범한 인간들은 저항조차 못 하겠지요. 신녀님.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지도를 넘기고 순순히 저를 따라오세요.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수잔나는 악랄하게 빛나는 푸른 눈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분노한 앤더슨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

무고한 이들을 얕보고 목숨을 위협하는 주제에 정의로운 척하지 마! 폭군을 몰아낼 실버나이트? 웃기지 마. 너흰 그냥 무식한 폭력 집단일 뿐이야. 

 

 더한 소리도 퍼붓고 싶었지만, 저 여자만이 아인의 행방을 알 것이기에 꾹 참았다. 

 

[수잔나]

당신이 뭘 안다고 실버나이트님을 욕되게 하는 거죠? 실버나이트님께 선택받은 것은 전하께도 크나큰 영광입니다. 황제와 귀족들은 오직 자신들만 살 궁리뿐이죠. 실버나이트님께선 월계절에 우리 모두를 직접 빛의 땅으로 인도하실 겁니다. 

 

 실버나이트가 월계절에 모두를 빛의 땅으로 인도한다고?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말이 돼? 

 

 

아 인 은  이 용  당 한  거 야 .

 

 

 헛소리를 지껄이는 저 입을 다물려주고 싶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여정에서 본 아인의 기이한 상처는 보통의 전투에서 입을 수 있는 부상과는 양상이 달랐다. 뛰어난 검술과 전투 실력을 갖춘 아인에게 그만큼이나 큰 치명상을 입히고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날 수 있는 상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어쩌면 흑막은...! 

 

[수잔나]

어서 지도를 내놓으시죠. 당신은 느긋할지 몰라도, 이 사람들, 그리고 전하께선 그렇지 않을 테니까요. 

 

지도라니, 무슨 지도? 아까부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도대체? 

 

 이 지도는 절대 반란군 손에 들어가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다. 

 

[수잔나]

재밌군요. 전하께서도 똑같은 소릴 하시던데 말이에요.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던 도구가 실은 하등 쓸모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뭐라고?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수잔나]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던 자가 황태자이자 집행인 부대 사령관인 아인이란 걸 알게된다면 황제의 표정이 어떨지 정말 궁금, 크억...

 

 방심한 틈에 등 뒤에서 날카로운 비수로 심장을 찔린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주니]

어디서 헛소리를! 집행인 부대를 물로 본 벌이다! 

 

 조금 전 수잔나의 말로 미루어 보아, 아인은 반역죄로 황실에 넘겨진 게 틀림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기는 게 시급했다. 나와 앤더슨은 이동하는 대열의 제일 뒤에 서서 토끼굴 주민을 엄호했다. 

 얼음 나비를 피해 마지막 사람들까지 대피한 순간, 통로가 크게 흔들렸다. 

 

[앤더슨]

길이 무너진다! 모두 서둘러라! 

 

출구가 바로 눈앞이다. 곧 나갈 수 있...! 

 

[나]

아, 안돼! 

 

 지하 통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출구는 바윗덩어리들로 꽉 막혀버렸다.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에르세르 대륙(完) > 분쟁의 장 (아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화. 재기  (0) 2024.02.10
22화. 선택  (0) 2024.02.10
20화. 쓰디쓴 술  (0) 2024.02.10
19화. 거래  (0) 2024.02.10
18화. 약속  (0) 2024.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