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쓰디쓴 술

2024. 2. 10. 22:23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수잔나가 자리를 뜬 후에도, 아인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나는 그의 망토에 잔뜩 묻은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주었다. 

 

[나]

많이 피곤해 보여요. 

 

아인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

가서 좀 쉬어요. 

 

 그러겠다고 하면서도 아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말을 안 해주니 답답했다. 그래서 조심스레 물었다. 

 

[나]

식사 같이 할래요? 

 

아인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돌연 방에서 나갔다. 

 

-

 

 곧 그는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 손에는 병이 들려 있었다. 테이블에 술병을 내려놓고서, 그는 맞은편에 앉아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

왜요...?

 

[아인]

그냥. 자세히 보고 싶어서. 

 

[나]

언제는 '그런 얼굴'이라면서요. 

 

[아인]

...그런건 좀 잊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농담을 던졌지만, 아인은 정색했다. 식탁 한쪽에 놓인 술병이 내 시선을 끌었다. 그의 생일 선물로 만들어둔 술이 떠올라 아쉬위졌다. 문득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 그와 함께 느긋하게 식사하다니, 믿기지가 않아 몇 번이고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나]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우리가 다정하게 마주 앉아 식사하는 사이가 되나니. 

 

아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건너다봤다. 

 

[나]

당신은 내게 '독약'까지 먹였잖아요. 이 사람 엄청난 냉혈한이구나 싶었어요. 

 

[아인]

그것도 잊고.

 

 아인이 머쓱해하는 모습이 재밌어 나는 한참이나 키득거렸다.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는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선 신경 쓰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오늘 밤 그는 어린왕자였고, 나는 미래의 어린 황후였다. 우리는 끝없이 얘기를 나누었다. 

 평온하기만 했던 밤은 지나고 어느덧 먼동이 텄다. 밤새 기분 좋은 꿈을 꾼 느낌이다. 잔을 재운 아인은 내 잔에도 술을 따라주었다. 

 

[아인]

마지막 잔이야. 함께 하지.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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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어라 딱 짚어 말할 순 없지만, 아인은 평소와 달랐다. 나는 걱정스레 그를 살폈다. 아인은 내게 더 권하지 않았다. 잔을 내려놓고서 그는 내게 손짓했다. 

 

[아인]

그럼... 좀 더 가까이 와. 

 

나는 그에게 바싹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 

 

[나]

아인, 좀 이상해요. 혹시 다른 걱정이라도 있...?

 

 반응도 채 하기 전, 돌연 아인이 뜨겁게 입을 맞취왔다. 데어버릴 듯한 그의 체온과 독하면서도 향긋한 술 냄새에 금세 취해버린 듯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나]

아... 인...

 

 그의 이름은 내 마음속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절대로 놔주지 않을 것처럼 나를 단단히 옭아맸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오직 아인만 보였다. 이 세상에 우리 둘뿐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와의 키스는 그리 로맨틱하게 끝나지 않았다. 부드럽고 달콤하게 시작한 입맞춤은 몹시도 거칠고 절망적인 뒷맛을 남겼다. 잠깐... 뭐지, 이건...?

 아인을 밀어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나를 힘껏 제 품에다 가둬두었다. 머릿속이 흐려지고 의식이 희미해졌다. 안돼...! 아인, 왜...! 

 

[아인]

쉬잇.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내가 완전히 정신을 잃기 직전, 그는 다정하고도 서글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인]

여길 떠나 안전한 곳으로 가라. 그리고... 날 잊어.

 

>21화에서 계속...

 

 

>흔쾌히 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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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3. 이별

 이 시간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 아인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겨우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 졌다. ...설마.

 아인에게 이게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혀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비틀거리다 잡은 그의 손은 차디찼다. 마침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나를 부드럽게 안아 올리며 그는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그 후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정신을 차려보니 마차 안이었다. 창밖엔 설원이 펼쳐져 있고, 맞은편엔 수잔나가 앉아있었다. 내가 왜••• 반란군과 함께 있는 거지? 

 

[나]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아인은 어딨어? 마차 세워! 어서!

 

수잔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 었다. 

 

[수잔나]

실버나이트님의 명령입니다. 그분에겐 누구도 거역할 수 없어요. 

 

[나]

뭐? 누구 맘대로! 멈춰! 

 

 나는 그림 소울을 소환해 무력으로 마차를 세웠다. 마차가 미처 멈추기도 전, 나는 서둘러 뛰어내렸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인영이 눈에 띄었다. 무적이나 익숙한 실루엣... 은백색의 장발을 늘어트리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로브를 입은 그 사람은 한가롭게 정원을 거닐 듯 얼음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내가 너무도 잘 알고 또 믿어온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는 바로 깨달았다. 아니. 이 사람은 예신이 아니야. 이자는... 실버나이트!

 실버나이트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나는 단 한발짝도 움직 이지 못했다. 지근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

안...돼...!!

 

아인이 어떻게 될지 나는 영원히 알수 없게 되었다. 

고집불통 아인은 내 손을 놓아버렸다. 

......

어떤 길이라도 좋아요.

제발, 당신과 함께 갈 수 있게 해줘요. 

나를 버리지 말아요.

다시 한번 그를 만난다면

몇 번이고 그렇게 에원할 텐데...

 

그러나 우리의 운명은 갈림길에 접어들고

결국 이별로 향했다. 

 

이 대 로  영 원 히

서 로  다 른  길 을   가 게  된  것 이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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