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거래

2024. 2. 10. 22:17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반란군을 물리치고 나오던 길, 어디 숨어 있었는지 조금 전의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나 내 망토를 잡아당겼다. 

 

[귀족 남성]

이봐! 날 황궁으로 데려다다오. 애초에 이런 망할 곳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제길. 재밌는 일이 없나 해서 왔더니 가난뱅이들한테 기습이나 당하고, 에잇. 네 윗사람 몰래 날 좀 데려다다오. 사례는 넉넉히 하지.

 

하는 양을 보니 나쁜 짓을 하러 나왔나 보다. 그리고 제가 한 짓이 알려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지. 

 

[귀족 남성]

...어라...?

 

앗, 이 녀석, 왜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는 거지? 

 

[귀족 남성]

잠깐. 낮이 익어. 분명히 어디서 본적 있는데...? 아, 넌! 이세계에서 온 신녀! 여기에서 하는 거지? 게다가 마법을 쓸 줄 알아? 

 

 들켜버렸다! 이자가 카이로스나 로샤에게 쪼르르 달려가 입을 놀린다면...! 

 

 쌩하니 도망치는 그의 뒷모습을 본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를 쫓아 골목 어귀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정면에서 눈부시고 커다란 빛 기둥이 치솟더니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가까이 가보니 내가 쫓던 남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앤더슨이 다가가 몸을 굽히고 그의 코에 손을 갖다 대더니 고개를 저었다. 

 

[앤더슨]

마법에 당했군요. 숨이 끊어졌습니다. 

 

 주변의 눈밭에 쓰여진 수상한 글자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내게 보내는 메시지가 분명했다. 

 

"처리해드렸습니다. 기억하세요, 당신은 우리에게 빚을 진 겁니다." 

 

 앤더슨은 재빨리 메시지를 발로 문질러 없앤 뒤 나와 눈빛을 교환했다. 큰일이다. 정체를 모르는 상대에게 약점을 잡혀버리다니. 

 

-

 

 황궁에 돌아와서도 나는 도무지 경계를 풀 수 없었다. 눈밭에 메시지를 남긴 자가 언젠가 나를 찾아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녁때가 되었다. 식사가 담긴 카트를 밀고 들어온 사람은 평소에 보던 그 시녀가 아니었다. 짙은 남색 치마를 입은 여자, 아는 얼굴이었다. 수잔나라고 했던가. 실버나이트의 첩자이자 반란군의 궁중 내통자. 저 여자, 지난번에도 나를 데려가려고 했지. 그녀는 마법에 능통했고 죽음이 두렵지도 않은 듯했다. 

 

[나]

원하는 게 뭐지? 

 

수잔나는 뻔뻔스러우리만치 차분한 미소를 지 었다. 

 

​[수잔나]

아인 전하가 저희와 손을 잡도록 신녀님께서 설득해주세요. 저희는 진심으로 신녀님을 구하려 하는 겁니다. 실버나이트께서는 모든 고통과 최악이 우리 대륙의 원죄일 뿐, 이세계에서 온 신녀님의 짐은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당신을 자유롭게 해드리겠습니다. 

 

 수잔나의 태도는 공손하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지난번 여정에서 이 여자의 잔인한 일면을 보지 못했다면 그대로 현혹됐을 것이다. 

 

[아인]

수잔나, 물러서라.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단박에 긴장이 풀렸다. 아인 이다. 그가 돌아왔다! 아인의 목소리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황성에 돌아오자마자 이리로 온 거야? 

 

[아인]

식사는 거기 두고 나가봐. 

 

[수잔나]

전하, 진정 신녀님을 위하신다면 믿어주시죠. 저희는 전하와 신녀님을 돕고자 합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건 황제를 향한 복수 아닌가요? 그렇다면 저희보다 확실하고 든든한 조력자는 없을 겁니다. 

 

 가슴이 조마조마해져 가만히 아인을 지켜봤지만, 아인의 얼굴은 깊이 눌러쓴 망토의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수잔나와 아인은 오늘 외에도 여러 번 접촉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직접 아인을 회유하지 않고 날 찾아와 저런 소릴 하는 걸까? 아인은 수잔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내게 걸어왔다. 가까이서 올려다보고 이제야 확인한 그의 얼굴엔 역시나 피로가 가득했다. 

 

[아인]

네 의견은? 

 

나는 내 뜻을 그에게 전했다. 

 

>전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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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그대로였다. 

 

[나]

저는 반대예요. 피곤해 보여요. 어서 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 아인. 

 

아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제야 수잔나를 돌아보았다. 

 

[아인]

수잔나. 뜻을 알아들었겠지. 이만 돌아가라. 

 

 그녀는 조소와 혐오가 깃든 눈으로 우릴 바라보다 이내 예를 취하고 자리를 떠났다. 아인의 옆을 지나가던 순간, 수잔나가 무어라 속삭였지만 너무나 목소리가 작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19화에서 계속

 

 

>복수가 당신의 목표라면 뜻대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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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2. 붉은 자국

 망설임이 피어났다. 실버나이트가 이끄는 반란군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깨끗하고 모범적이진 않다. 내 약점을 쥐고 이용하려 할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그들이 정의롭지 않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나보다는 반란군이 훨씬 더 큰 힘이 되겠지.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인은 내 생각을 눈치챈 듯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아인]

로샤에 대한 복수든 나라를 되찾는 것이든, 다 내 일이야. 더는 고민도 갈등도 하지 마. 

 

그는 내 손을 꽉 잡았다가 살며시 놓았다. 아인은 반란군과 연합하기로 결정한 뒤 그들에게 나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달라 요구했다. 일은 신속히 진행됐다. 늦은 밤, 수잔나가 황궁 침전으로 와 몰래 나를 데리고 빠져 나갔다. 

 

-

 

 반란군의 엄호를 받으며 나는 황궁을 떠났다. 황성을 나가는 동안 뒤에선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몇 차례나 뒤를 돌아봤지만 아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조금 걱정스러웠다. 아인은 지금 어쩌고 있으려나. 반란군과 함께 적과 맞서 싸우는 중이겠지. 

 실버나이트는 과연 진심으로 아인과 협력하고 싶어 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도구로 이용하려는 것일까? 진실을 알 수 없다. 당장은 그 답을 얻기가 힘들었다.

 협력의 증표로 나는 황성의 지하 수로 지도를 수잔나에게 건넸다. 은밀한 지름길인 지하 수로를 이용하니 금세 추격병들을 따돌리고 성 밖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실버나이트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구나. 막 그 생각을 떠올 리던 순간, 돌연 수잔나가 손수건으로 내 코와 입을 막았다. 

 

옥! 이게 무슨...! 약품 냄새잖아...? 

 

발버등 졌지만 반란군 병사들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손수건에 마취제가 묻어 있었는지, 나는 금세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세인트 셀터 학원이었다. 동기들은 '별들의 경연' 사고 이후 내가 며칠이나 실종 상태였다고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건 그뿐이 아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내려 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소용없었다. 

 그 대신 가슴속이 텅 빈 듯한 허전한 기분,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할 때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조여들었다. 어쨌든 나는 무사히 집에 돌아왔고, 곧 학교에도 나갈 것이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일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이니 현재에 충실해야겠지. 

 

 

그 후 가끔씩,

목덜미에 아주 엷게 붉은 자국이 생기곤 했다. 

 

마 치  누 군 가 가  남 긴  키 스 자 국 처 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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