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불

2024. 2. 10. 20:35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별궁으로 돌아온 아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놀라울 정도로 나와 체구와 생김새가 비슷한 시녀를 데리고 왔다. 

 

[아인]

이 집행인 부대 망토를 걸쳐. 네가 걸치고 왔던 겉옷은 저 시녀에게 입히고. 서둘러. 

 

 아인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출발한 마차가 별궁 앞마당을 나서기도 전이었다. 측면 숲지대에서 마법을 이용한 기습 공격이 들어왔다! 

 나를 노린 암살 시도였을 거란 생각에 온몸의 털이 바짝 일어났다. 

 

-

 

 마차로 달려가던 길, 부상당한 시녀가 실려 가는 것을 보았다. 새하안 눈밭엔 그녀가 흘린 피가 낭자했다. 그 마차 안에 타고 있을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

저 사람, 나 대신 다친 거죠? 말도 안돼... 나 대신...

 

[아인]

네가 괴롭다는 건 잘 알겠으니 그만해. 목숨엔 지장 없을 거야. 잘 치료해줄 테니 걱정 말고. 

 

아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인]

네가 무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반란군 마법사의 암살 명단에 황제의 약혼녀도 포함되어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결과지. 그들이 너를 주시하기 시작했어.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잦은 습격에다 이젠 암살 기도까지... 반란군은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아인은 굳은 표정으로 창밖만 내다볼 뿐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무거웠지만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어 그에게 말을 붙였다. 

 

[나]

무섭나요?

 

[아인]

걱정 마. 너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지켜줄 테니까. 

 

 아인의 태도엔 전혀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 안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서 나직이 물었다. 

 

[나]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아인]

솔직히 말하지. 나는 반란군과 연합해 황제를 칠 거야. 네 암살 정보를 미리 빼낸 건 다행이었어. 하마터면 널 다치게 할 뻔했다.

 

"반란군은 아인 님을 이용하려는 것뿐입니다."

순간 앤더슨의 말이 떠올라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나]

아인, 재고해보는 게 어때요? 그들을 믿고 온전히 등을 맡길 수 있겠어요? 

 

일의 전모를 아직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판단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인은 고개를 가법게 저었다. 

 

[아인]

월계절이 코앞이야. 그런 걸 따지기엔 이미 늦었어. 그날 황제를 치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그러면 나는... 너마저 영영 잃게 되겠지. 

 

[나]

아인...

 

한참이나 말이 없던 아인은 그늘진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인]

황궁에 가면 우린 또 멀어져야겠지. 널 볼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니. 나는 내 뜻대로 네 곁에 있을 수도 없다. 이런 내가 얼마나 한심한지...

 

아인의 아픈 마음이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나]

그렇지 않아요, 아인. 한심하다니요. 당신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적어도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낭비하기 싫어요. 어두운 얘기는 그만두고, 뭐든 좋으니 우리 다른 에길 해요. 당신을 좀 더 알고 싶어요. 

 

 아인은 내 이목구비를 머릿속에다 각인이라도 하려는 듯, 꽤 오래도록 내 얼굴을 들 여다보았다. 

 

[아인]

그럼, 옛날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 어린 시절 나와 어머니의 이야기. 

 

[아인]

 어머니는 황후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지. 그녀는 뛰어난 검술사였어. 순발력을 이용한 맹공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도 견줄 대상이 없었다더군. 다수의 기사들이 대검을 들고 동시에 덤벼도 어머니를 이길 순 없었대. 황태자인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도 장군이 되었을 거야. 어머니에겐 어쩌면 병사를 이끌고 얼음 나비를 소탕하는 생활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봐. 집요할 정도로 열렬한 구애에 어머니는 두 손 다 들고 황태자의 청혼을 받아들였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황제에 즉위했고,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나야. 어린 시절, 철없던 나는 검술 스승들을 무시하곤 했어. 대륙 최고의 검사를 어머니로 뒀으니 기고만장했지. 그렇지만 나는 어머니가 검을 다루는 모습을 자주 보진 못했어. 황후란 애초에 그런 '흉악한 물건'에 손을 대면 안 되니까.

 아버지는... 아주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황제였어. 얼음 나비의 위협에 대비책을 세우지도 않았던 데다, 대륙 최고의 검사인 황후에게서 검을 빼앗고 궁에만 묶어두었지. 아버지는 마탑의 보호로 안전을 보장받은 황성 안쪽에만 신경 썼어. 그 외엔 아예 눈을 감아버린 거야. 어째서인지 어머니는 그대로 수긍하셨어. 아버지의 지시대로 얌전히 궁에만 머물렀지.

 아버지는 황제로선 무능한 인간이었지만, 어머니에게 있어선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니까. 아버지를 향한 사랑 때문에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을 구속하고 모두가 바라는 황후 역할을 수행하려 애썼던 거야.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어머니는 도망치지도 못했어. 살 길은 있었을 거야.

 

[아인]

 하지만 어머니는 남편과 아들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싸우는 쪽을 택했지. 다시 한번 검을 든 어머니는 삼엄한 수비를 오로지 혼자 힘으로 다 뚫고서 찬탈자의 바로 눈앞까지 진격했어. 적들에게 포위되어서도, 완전히 탈진한 채로도, 어머니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고 해.

 그녀는 검을 들어 찬탈자의 목을 노렸지만...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만큼은 살려주겠다는 약속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지. 최강의 검사였건만, 어머니는 검을 버리고, 황후의 신분으로 최후를 맞으신 거야.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생생해. 그 고통, 절망, 도무지 풀어낼 길 없는 원한까지...

 

 아인의 목소리는 꽉 잠겨 있었다. 

 

[아인]

내가 로샤에게 반항하지 않고 충성을 다하겠다 약조했을 때... 로샤는 내게 계승의 검을 줬어. 제 어미가 자결할 때 썼던 검을 유품으로 간직해온 아들이라니. 제길...

 

 계승의 검에 그런 사연이 있다니.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 남은, 차마 잊으려야 잊을 수 없고 덮으려야 덮을 수 없는 저 상처를 어찌해야 할까.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픈데, 아인은...

 나는 손을 뻗어 가만히 그의 가슴을 어루만져주었다. 

 

[나]

아인...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던 그는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손을 살며시 잡고서 손바닥에다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

 

 황궁에 들어오자마자 로샤의 부름을 받았다. 아인은 내 곁에 있어주려고 했지만, 황명에 따라 나 혼자 가야 했다. 아인은 알현실로 들어가는 나를 보며 괴로운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로샤가 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의 독대라니 부담스러웠다. 로샤는 느긋하게 왕좌에 앉은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관찰했다. 

 

[로샤]

꽤 피곤해 보이는군. 별궁까지 왕복하는 데 몸에 무리가 가는 듯하니 내일부터는 황궁에만 머물도록. 경비를 두 배로 늘리도록 지시해두있다. 

 

 어쩐지 순순히 날 풀어준다 싶더라니. 그는 내가 조금이라도 자유로운 게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었다. 

 

[나]

황궁 안은 불편하기도 하고 답답해요. 반나절이라도 좋으니 밖에 나가 바람이라도 쐴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로샤는 내게 눈을 고정한 재 입을 뗐다.

 

[로샤]

따뜻한 곳에서 살던 사람이라 그런가? 활력이 넘치는군. 갇혀 있는 것도 싫어하는 것 같고. 마탑의 감시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대가 황궁을 떠나 있는 동안 짐의 심기가 꽤나 불편했거든. 쓸데 없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야. 

 

 부드러운 어조에는 완강한 뜻이 담겨 있었다. 그는 내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로샤]

요사이 아인과 많이 가까워진 것 같은데. 

 

 나는 그를 보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로샤]

무일 그리 긴장하는가. 짐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아인은 중요한 임무를 맡아 곧 먼 곳으로 떠나게 될 거다. 월계절에 있을 우리의 혼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겠지. 애석하도다. 

 

 일순, 로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로샤]

월계절이 되면 그대와 나의 운명은 하나가 된다. 그리고 아인은 새로운 길을 떠나게 되겠지. 아인과 거리를 두거라. 이것은 경고다.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늘어나면 기대와는 다른 결말을 맞게 되는 법. 

 

 마지막 말은 꽤나 의미심장했다. 나를 보는 로샤의 눈빛에 알 수 없는 연민이 스쳤다. 내가 월계절의 제물이 되는 것 이상으로 뭔가가 또 있는 건가. 월계절에 아인이 '새로운 길을 떠나게 된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로샤는 나를 바라보다 별안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샤]

하긴. 운명이 정해져 있다 한들, 마음은 어찌할 수 없지. 

 

그는 내게 물러나라 손짓했다. 

 

-

 

 얼마나 긴장했는지, 나는 황후 침전으로 돌아와서야 밤이 된 것을 알았다. 창밖을 바라보는데, 문이 열렸다 닫혔다. 그리고 돌아보기도 전에 뒤에서부터 끌어안겼다. 익숙한 체온과 체취. 아인이었다. 

 

[아인]

너...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꽉 잠겨 있었다. 

 

[나]

아인, 나 괜찮아요. 

 

[아인]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참기 힘들었는지... 그 녀석이 널 어떻게 해버릴까봐 두려웠어. 그런 자식에게 증오도 원망도 아닌, 두려움을 느끼다니, 제길... 그가 널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 

 

 아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더없는 굴욕이었을 터다. 그러나 나는 안다. 두려움이란 그저 찰나의 감정일 뿐이란 나는 손을 뻗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살며시 매만졌다. 

 

[나]

나도 당신도 그리 나약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우리는 그대로 선 채 오래도록 체온을 나누었다. 더는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다. 

 

[나]

기분이 별로일 때 단걸 먹으면 위로가 된대요. 

 

아인은 그제야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맞장구겠다. 

 

[아인]

초콜릿이 필요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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