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계승의 검

2024. 2. 10. 17:30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반전은 없었다. 침입자는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마법사와 호위병은 역모자의 유족으로, 황실과 아인에게 깊은 원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아인의 반응을 보니 암살 시도가 처음은 아닌가보다. 그런 아인의 목표도 결국은 복수가 아니던가. 얼음 나비라는 재앙이 초래한 증오와 원한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아인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이런 일을 겪고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

저들의 동료가 더 있는지 확인해봐야겠어요. 

 

아인은 손을 들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인]

아니. 황실에 원한을 가진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아. 그러니 복수하려는 자들을 다 없애기란 불가능해. 그래서도 안 되고. 지금은 로샤를 끌어내린 뒤 에르세르를 재건하는 것만 생각한다. 

 

-

 

 황궁에 도착하자 아인은 날 침실로 데려다주고는 로샤에게 오늘 일을 보고하기 위해 돌아섰다. 아까의 그 지친 목소리와 평소답지 않게 경직된 뒷모습을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당장 달려가 그를 껴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음일 뿐.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아인은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로 가버린 걸까. 나도 안 보고서?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수 정원. 왠지 그곳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인의 뱃지를 이용해 또 한 번 호위병의 감시를 벗어난 뒤 밤을 가르며 달렸다. 

 

-

 

 그와 통했던 걸까. 정원의 분수대엔 정말로 아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달빛 아래, 그는 그리움과 애틋함이 가득한 눈으로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아인이 나를 발견하고서 말할 수 없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인]

이 늦은 시간에 여긴 왜...

 

그는 내가 여길 왜 왔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그에게 나는 일부러 농담을 던졌다. 

 

[나]

볼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뭔지 잊어버렸네요. 이만 가볼게요. 

 

내가 홱 돌아서자 아인은 어울리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

왜요? 가라는 거 아니였어요?

 

그는 졌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인]

...가지 마.

 

나는 장난을 그만두고 아인의 옆에 살며시 앉았다. 내가 신기해하며 바라보자 아인은 소중히 쓰다듬고 있던 검을 내게 건네주었다. 자루에 박현 보석들은 달빛을 반사해 찬란하게 반짝였다. 

 

[아인]

그건 '계승의 검'이야. 황실 대대로 전해지는 보검이지. 계승의 검으로 전투를 치른 사람은 내 어머니가 처음이었다더군. 

 

 부모님의 죽음이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기에, 나는 어쭙잖은 위로를 하는 대신 조용히 경청했다. 

 

[아인]

두 분은 아버지가 아직 황태자였을 때 만났다고 해. 어머니는 변경 지역 백작가의 딸이었고. 

 

아인은 아련한 미소를 띄었다. 

 

[아인]

어머니는 무도회라든지, 평범한 귀족 영에들이 관심 갖는 모든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 

 

나는 아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아인의 아버지는 사냥터에서 사슴을 쫓다가 대열에서 이탈했고, 호위병 두 명과 함께 길을 잃었다고 한다. 숲속을 헤매던 중 그는 자객을 맞닥뜨렸다. 흰 망토 차림의 자객은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두 호위병을 단칼에 해치웠다. 온실 속 화초로 자란 황태자는 어찌할 도리를 몰라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어디선가 작은 체구의 여자가 나타나선 황태자가 떨어뜨린 검을 주위 들고 용감하게 자객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아인]

훗날 어머니는 말씀하셨지. 그때의 자객은 어머니가 그간 상대했던 적들 중 가장 강했다고. 상대의 검술은 정교한 건 둘째치고,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기술이었대. 어머니가 아는 검술과 무술을 전부 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했어. 버티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던 때 마침 일행이 그들을 발견했고, 자객은 수적 열세에 몰려 도망쳤지. 자객을 찾기 위해 전 대륙에 수배령을 내렸지만, 녀석의 행방은 묘연했어. 단서 하나 없이, 말 그대로 증발한 것처럼 사라져버렸대. 

 

 아무리 상대가 막강한 자객이었다지만, 겁에 질려 검을 내버린 남자가 마음에 들었을 리 없다. 퓨에나는 제 이름을 묻는 황태자에게 '당신 같은 겁쟁이에게 알려줄 이름 따위 없다'고 답하는 불경까지 저질렀다. 자존심이 상한 황태자는 황실의 검은 단지 의전용이라 전투에 쓰긴 너무 가벼웠다고 변명했다. 퓨에나는 코웃음을 치며 최고의 검이 주인을 잘못 만난 바람에 허점한 날붙이 취급 을 받는다고 한탄했다. 

 

[나]

어쩐지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사랑 이야기네요. 

 

[아인]

맞아.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여자의 환심을 사는 데 아주 능숙하셨지. 아버지는 말리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어머니께 계승의 검을 선물하셨어. 최고의 검에게 최고의 주인을 찾아주고 싶다며. 이건 황실의 보물이자 부모님의 추억이 어린 검이야. 엄밀히 따지자면 직접 물려받은 건 아니지. 이건 어머니께서 주신 게 아니라...

 

 차마 말을 맺지 못하는 그에게선 헤아릴 수 없는 상실감과 한이 느껴졌다. 아인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아인]

모든 걸 되찾고 제자리로 되돌릴 때까지,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고 계속 나아갈 거야. 마지막까지 너와 함께. 이 검은 그 약속의 증표로 네가 간직해. 

 

 나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을 검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답했다. 

 

[나]

뱃지, 손수건, 보검까지... 대체 몇 개의 증표를 남길 셈이에요? 이래서야 내세에서도 함께 하게 생겼네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런 증표가 없어도 당신을 떠날 일은 없을테니/

 

아인은 더없이 진하고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인]

내게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짙은 어둠 속으로 희미한 달무리가 번지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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