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기다림의 밤

2024. 2. 10. 20:38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하루가 다 가도록 아인을 만나지 못했다. 그 덕에 나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난번의 시공 여행에서 본 바로, 아인은 월계절 당일 로샤에게 복수를 감행하려 했다. 당시에도 그는 아마 반란군과 손잡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인은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아인은 누구에게 공격받은 걸까. 황실 사람? 아니면...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

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도로 그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밤은 깊어가는데 아인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겨우 하루 못 봤는데 이렇게 심란해지다니. 월계절은 점점 다가오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자니 너무도 답답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인은 오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문득, 아인이 새 임무를 받아 멀리 떠날 거라던 로샤의 말이 떠올랐다. 가기 전에 꼭 만나야 해. 나는 고민에 잠겼다. 

 

>일단 자고 내일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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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1. 잿더미

 밤이 너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얘기해야겠다. 그가 떠나기 전에 만날 수만 있으면 되니까. 

 

-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니 침대 머리맡에 편지가 한 통 놓여 있었다. 누가 이걸... 그리고 언제 가져다 놓은 거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편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불안이 깊어가던 순간, 편지가 저 혼자서 불이 붙더니 활활 타올랐다. 

 

[나]

아얏!

 

 나는 놀라 편지를 놓쳐버렸다. 그와 동시에, 불꽃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네가 이 편지를 받았을 즈음

난 이미 멀리 떠나 있겠지.

 

...아인? 역시, 아인이 보낸 거였어.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편지에 글씨 대신 목소리를 실어 보내다니, 마법사의 도움을 받은 게 분명했다. 가만. 마법사라면...! 타오르는 불길 사이로 아인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많은 고민 끝에 결정했다.

원하는 것을 되찾기 위해

어떤 힘이라도 이용할 생각이었지만,

이 위험한 길에 너를 도저히 끌어들일 순 없어. 

내 일은 내 손으로 직접 마무리 짓겠어.

날 도우려 했던 네 마음, 고맙다. 

잊지 않을게.

반드시 너를 데리러 돌아올게.

혹시라도 내가 오지 못하게 된다면...

아니, 이런 얘긴 그만두지. 

 

나 의  승 리 를  기 원 해 줘 .

 

[나]

......

 

 아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다 타버린 편지는 재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안돼•••! 그를 만나지도 못하고 보내버렸어. 난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나를 막으려는 호위병과 마법사들을 피하려다 그림 소울까지 소환해버렸다. 나중에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돼버렸다. 아인도 없는데 능력을 드러내다니. 혼자서는 모두를 상대할 수도 없는데, 경솔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거센 손아귀에 붙잡혀 바닥에 짓눌린 것, 그때 이마에 닿은 돌바닥이 시리도록 차가웠던 것, 그리고...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대마법사 카이로스가 던진 한마디뿐이다 .

 

[카이로스]

역시 너는 위험한 존재다. 

 

 

그 후, 나는 정신을 잃었다.

희미한 의식 저편, 로샤의 격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다시 새장에 갇혔다. 카이로스는 나를 신문했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카이로스]

실버나이트 따위와 결탁하다니. 황태자가 어리석은 짓을 했군. 월계절까지 년 이곳에 갇힌 재 철저히 감시받을 것이다. 

 

아인이 결국 실버나이트와 손을 잡았다고...? 

 

 아인은 내가 다칠까 봐 홀로 떠난 것이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이대로 강림 의식의 제물로 죽게 되는 건가.

 그리고 아인은? 아인은 과연 그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로샤는 아인의 원수다. 그리고 로샤의 적인 실버나이트는 그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다. 아인은 단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스스로를 무모하게 내던졌다. 아인을 막았어야 했는데... 좀 더 일찍 그에게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을 알려주고 적극적으로 그의 손을 잡아주었어야 했는데. 

 

나 는  후 회 하 고  또  후 회 했 지 만 ,

이 미  모 든  게  늦 어 버 렸 다 . 

 

 

>아인에게 만나자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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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은 점점 더 맑아졌다. 아인을 만나려면 어떡해야 할까.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려야 하는데...

 그 순간, 테이블에 놓인 손수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아인이 했던 방식 그대로 그를 정원으로 불러내는 거다. 나는 손수건에다 그에게 전할 메시지를 적어 곱게 접은 뒤 시녀를 불렀다. 그리고 아인이 떨어뜨리고 간 물건이니 서둘러 돌려주라고 부탁했다. 누가 봐도 평범한 손수건이니 의심받을 리는 없을 것이다.

 시녀가 방을 나간 후, 머리를 정리하고 아인이 나를 위해 고쳐주었던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에르세르에 온 이래 이렇게 내 모습을 신경 쓴 적 있었던가. 새벽 시간, 나는 또 한 번 침전을 빠져나갔다. 

 

>18화, 약속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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