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약속

2024. 2. 10. 20:43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새벽이 깊어졌다. 밤공기에 손발이 시렸다. 나는 혹시라도 순찰대에게 들킬까 숨소리도 죽이고 있었다. 돌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려던 순간,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아인의 품에 안긴 채 나는 가만히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에 걸쳐져 있는 달 아래, 하나로 겹쳐진 그림자가 유난히도 새삼스러웠다. 

 

[나]

아인.

 

 응,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잠겨 있었다.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보이는 것 같았다. 

 

[아인]

오늘 익명의 발신자로부터 이것이 도착했어. 

 

 아인은 내게 낡은 양피지 뭉치를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어 조심스레 펼쳤다. 마탑에서 일어났던 비밀스러운 일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 마법사의 일기 같다. 

 

[아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좀 괴롭더군. 아버지를 무능한 황제라고 원망하기도 했었는데...

 

 보관 방법이 나빴던 듯 양피지는 군데군데 해져 있었지만, 내용을 알아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황위를 빼앗기고 시해된 선황의 피가 황궁의 계단 위로 흘러넘졌다는 소문이 대륙 전체로 퍼졌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선황은 생포돼 마탑에 감금되어 있다.그를 살려둔 까닭은 아직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카이로스 예하는 선황의 생혈을 이용해 최강의 마법사를 만들 계획이라고 하셨다." 

 

나는 서둘러 다음 장으로 넘겼다. 손은 어느새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제법 이곳에 익숙해졌다 싶었건만. 끔찍하고 잔혹한 일을 마주할 때마다 괴리감에 몸서리가 처진다. 

 

"오늘 선황이 죽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퓨에나 황후가 자결했단 걸 알고 그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선황은 그간 피를 뽑든 조롱을 당하든 저항 한번 하지 않았다. 나약하고 우유부단 하던 그가 제 목숨에 대해선 이토록 단호할 줄이야." 

 

 등에 닿은 아인의 가슴에서 거친 심장박동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이걸 읽었을까. 

 

[나]

아인.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떤 말로도 그를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아픔이 어찌 달래질까. 

 

[아인]

슬퍼할 것 없어. 이미 지난 일이고 난 다 떨쳐버렸으니까. 

 

[나]

그럴 리 없잖아요.

 

 아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 었다. 고집스러운 면이 딱 그다웠다. 나는 손에 쥔 양피지를 멍하니 바라볼 뿐 도저히 더 읽을 수 없었다 그러다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의문이 있었다. 

 

[나]

아인, 그런데 이걸... 누가 보낸 거죠?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나]

반란군이군요. 

 

[아인]

저들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서겠지. 반란군은 폭군을 무너뜨리길 원해. 나와 목적이 같지. 그리고... 실버나이트가 그런 얘길 하더군. 다른 세계에서 온 네가 우리의 분쟁에 말려들어선 안 된다고. 일리 있는 말이야. 넌 좋은 사람이고 실력도 뛰어나지만 굳이 이 위험한 일에 끼어들어 목숨까지 위협받을 필요는 없지. 네가 왜 나와 실버나이트의 연합에 회의적인지 고민해봤어. 

 

아인은 또 다른 양피지를 내게 건넸다. 

 

[아인]

복수에 눈먼 나보다는 네가 더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겠지. 그러니 네가 괜찮다고 하기 전까진 결정을 보류하겠다.

 

그것은 황성 전체의 지하 수로 지도였다. 

 

[아인]

반란군은 계속해서 그걸 요구해왔어. 월계절 당일 신속하게 황성에 침입할 경로가 절실할 테니까. 자, 단 한 장뿐인 지도야. 너에게 맡길 테니, 이제부터 네가 가지고 있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공연히 그의 망토자락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나]

이렇게 중요한 걸 왜 내게 맡기는 거예요? 

 

아인은 지극히 담담하게 대답했다. 짧디짧은 한마디 였지만 여운은 길었다. 

 

[아인]

너니까. 

 

 나는 하나로 겹쳐진 우리의 그림자를 가만히 바라다보다 천천히 돌아서 그를 마주했다. 

 

[나]

나는 아인에게 보답으로 줄 만한 물건은 없지만...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

손, 내밀어봐요. 

 

 나는 아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끌었다. 그리고 내 가슴 한복판에 그의 손을 얹어두고서 말했다. 

 

[나]

내 마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약속이에요. 아인이 가는 길이 어디든, 내 마음도 함께 갈 거예요. 자정이 넘었네요. 오늘은 당신의 생일. 생일 축하해요, 아인. 

 

나는 살며시 그를 안아주며 속삭였다. 

 

[나]

내게 곁을 내주어서 고마워요. 진심으로. 

 

 한동안 굳은 채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던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서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

 

 아인은 먼 곳에 파견되었다고 한다. 그가 받은 임무는, 평소였다면 굳이 그가 하지 않아도 될 법한 것이라고 한다. 로샤의 의도는 뻔했다. 아인을 황성에서 내보내려는 것이다. 앞으로 더 멀리 보낼 거라고 하던데, 그 의중은 무엇일까? 혹시 월계절 때문에? 그때 아인이 황성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아인은 내게 앤더슨을 붙여주었다. 그가 내 방 앞을 지키고 선 동안, 나는 일부러 방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오전 내내 여러 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뭔가를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주니였다. 아는 목소리가 들린 순간, 나는 문을 활짝 열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앤더슨은 잠시 침묵하다 내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황성은 긴박한 상황이라고 했다. 빈민가에서 반란군 병사들과 탈주 마법사들이 날뛰는 바람에 혼란이 극에 달한 모양이다. 마법사의 처리는 원래 집행인 부대의 몫이다. 그러나 아인이 황성을 비우는 바람에 전투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 거기다 앤더슨까지 내 보호에 발이 묶여 지도부 인력까지 모자라게 된 것이다. 나는 재빨리 아인에게서 받은 망토를 둘러 입었다. 

 

가요. 제가 같이 갈게요. 

 

-

 

 나는 집행인 부대에 섞여 몰래 성을 빠져나와, 순찰을 함께 돌았다. 아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어느 골목 어귀였다. 화려한 차림새의 남자가 울부짖으며 곧장 우리에게 달려왔다. 

 

[귀족 남성]

도와쥐! 가난뱅이 반란군 놈들이 날 해치려 해! 미친 마법사도 있었다고! 어서 가서 죽여버려! 

 

 우리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뛰었다. 골목에 포진하고 있던 반란군 마법사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즉시 맹공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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