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지하성

2024. 2. 10. 17:24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곰은 온 계곡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포효하며 돌진했다. 아..., 나 고작 이런 식으로 죽는 거야? 찰나, 아인과의 검술 수업이 떠올랐다. 

 

[아인]

아무리 몸집이 큰 상대라도 급소를 찔리면 절대 저항하지 못한다. 차분히 목표를 조준하고 힘을 집중해. 그러면 반드시 이길 수 있어. 

 

 나는 곰의 심장에 공격을 퍼부었다. 할 수 있어. 나는 해낼 거야. 아인이 말했던 대로, 반드시 이기고 말 거야.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 내 발밑에 납작 엎드린 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잡은 곰까지 더해져, 사냥 전리품은 아주 풍성했다. 

 

[주니]

두목! 땔감 다 모았어요! 

 

 아까 그 주니라는 소년은 한가득 지고 있던 나뭇짐을 내려놓고서 곰을 해체하는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주니는 감탄을 연발했다. 

 

[주니]

정말 굉장해요! 곰이라니! 이렇게 큰 놈은 다 같이 나누어 먹고도 남겠어요! 두목! 두목의 애인도 토끼굴로 같이 가는 거죠? 직접 잡은 곰이니 제일 좋은 부위를 줘요! 

 

 토끼굴? ...아지트인가? 아니, 잠깐! 그보다...! 애인이라니!! 아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돌아보았다. 

 

[아인]

주니의 말대로야. 직접 잡았으니 너도 맛봐야지. 토끼굴로 함께 가자. 

 

 아인의 신경은 온통 곰고기에만 쏠려 있나 보다. 아인뿐 아니다. 그 호칭을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끄러움은 오로지 내 몫인 건가. 사냥감을 실은 수레들이 대열을 이뤄 움직였다. 행렬은 이상하게도 산의 절벽 쪽을 항해 가고 있다. 

 절벽 아래, 동굴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폐광인 듯, 입구에는 버려진 돌덩이와 널빤지 같은 것들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부대원들이 능숙하게 폐자재를 정리하자 갱도가 나타났다. 

 

[아인]

가자.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두려움이 치밀었지만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눈을 질끈 감은 뒤 용감하게 안으로 뛰어들었다. 

 환한 대낮에도 지하 통로는 깊은 밤처럼 컴컴했다. 기세 좋게 달려 들어오긴 했는데,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아아, 이 익숙한 체온. 아인이다. 

 

[아인]

괜찮아. 날 믿고 따라와. 

 

 손을 맞잡고서 나란히 걸은 지 얼마나 됐을까. 통로가 밝아졌다. 그와 동시에 아인은 살며시 내 손을 놓았다. 어둠 속에선 이토록 다정하건만, 환한 빛 아래에선 그릴 수 없다니. 조금 슬퍼졌다. 

 

 

그 목적이 어디에 있든, 일단 지금 나는 황제의 약혼자.
아인과 나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어둠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눈앞에는 작은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이런 건 상상조차 못 했는데.

 

[아인]

'토끼굴'에 온 것을 환영해. 씩 살기 편하진 않지만, 지하는 얼음 나비의 습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지. 

 

 지하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에르세르에 온 뒤, 이토록 활력이 넘치는 장소는 처음 본다. 공기는 포근하고 따스했으며 사람들은 생기가 넘겠다. 게다가... 집행인 부대가 줄지어 들어서는데도 놀라거나 겁먹은 이는 한 명도 없다. 황성에선 모두가 길을 터주고 피하기 바빴는데 말이다. 심지어 우리를 향해 미소 짓는 사람도 있었다. 적어도 토끼굴에서 집행인 부대는 두려운 존재가 아닌가 보다. 유심히 살펴보니 대다수는 노약자였다. 

 

[나]

이 사람들은 다 어디서 왔죠? 

 

[앤더슨]

토끼굴은 바깥세상에 발붙일 곳 없는 이들이 모인 곳입니다. 

 

 부대원들은 사냥해 온 것들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뉘주고 있었다. 더 없이 상냥하기만 한 그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 식사재료를 얻은 토끼굴의 주민들은 밝은 표정으로 끼니를 준비했다. 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아인이 내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인]

대다수는 집행인 부대원의 가족이야. 인간 백정 취급받는 집행인이라 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건 아니라고. 

 

인간 백정이라니... 집행인 부대에 대한 인식은 바닥이구나. 

 

[아인]

그들에게도 공평하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 지하에 숨어 살지라도 가족들과 행복한 한때를 보낼 수 있는 기회 말이야. 저 녀석들이 날 따르는 건 이것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려면 어때. 그동안은 보안을 위해 출입을 엄격히 제한했지만, 월계절을 앞두고는 굳이 막진 않고 있지. 다들 가족과 조금이라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을 테니까. 

 

 아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월계절은 시시각각 다가오며 우리의 숨통을 조여들었다. 아인에게 있어 월계절은 일생일대의 목표이자 마지막 기회다.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이다.

 문득, 이전 여정에서 보았던 아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쓸쓸히 홀로 맞아야만 했다. 아인이 지금껏 곱씹어왔을 외로움을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있는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아인]

갑자기 무슨...? 

 

[나]

없었잖아요... 당신에겐 아무도 없었...

 

 뜨거운 내 눈물이 아인의 어깨를 흠뻑 적셨다. 한참이나 굳은 채 움직이지 않던 아인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아인]

아니. 네가 있잖아. 내 애인. 이젠... 괜찮아. 밤새도록 이러고 있는 것도 좋겠군. 모두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인의 짓궂은 농담에 나는 화다닥 그를 놓아주며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그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아인]

가지 마.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줘. 

 

 아인의 품은 참을 수 없으리만치 뜨거웠다. 나는 더욱더 깊이 그에게 빠져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찾아 손가락 사이사이를 맞물려 아프도록 깍지를 꼈다. 이 손을 절대로 놓지 말자는, 무언의 서약이었다. 

 

-

 

토끼굴은 흡사 잔칫날 분위기였다. 

 

[주니]

누님, 곰고기로 꼬치구이를 했어요! 어서 이리 오세요! 

 

누님이라고? 반죽도 좋네. 

 

[주니]

혼자서 그 흉포한 짐승을 해치우다니, 역시 두목의 애인이라 그런지 어마어마합니다요! 자자, 누님이 잡은 곰, 배불리 드세요! 

 

 이 친구 좀 어떻게 해보라는 표정으로 아인과 앤더슨을 돌아봤지만, 둘은 어깨마 으쓱할 뿐이다. 다소 어이없긴 해도, 간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주니]

누님, 노바는 제가 아는 사람 중 최고의 요리사예요! 

 

 나는 주니가 최고의 요리사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이름이 노바라던 그 남자는 왼팔이 없다. 그는 오른팔 하나로도 능숙하게 요리하고 있었다. 

 

[노바]

입맛에 안 맞으면 말씀하세요. 

 

[주니]

헤헷. 누님, 절대 입에 안 맞을 리가 없어요. 저는 노바의 요리가 맛없다고 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본 적이 없거든요. 

 

 노바는 커다란 꼬치를 접시에 양껏 담더니 내게 권했다. 혼자 먹기엔 양이 많았다. 

 

[노바]

후추랑 레몬즙 둘 다 드릴까요? 입에 맞으면 와인 식초도 추가할 수 있습니다.

 

노바는 그 인심만큼이나 푸근한 미소를 보였다. 접시를 들고 아인에게로 갔다. 

 

[나]

노바 씨도 집행부대의 일원이었나요? 

 

아인은 대답 대신 엉뚱한 소릴 내놓았다. 

 

[아인]

집행인 부대가 굳이 무겁고 비효율적인 도끼를 기본 장비로 사용하는 데는 그릴 만한 사정이 있지.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단박에 뼈까지 잘라내기 위해선 무겁고도 예리한 무기가 제격이거든. 

 

아인의 말뜻이 짐작 갔다. 모두들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있었지만, 나는 완전히 입맛을 잃고 말았다. 

 

[아인]

대륙을 통틀어 적수가 없을 정도로 우리 부대는 강하다. 그런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유일한 상대가 바로... 얼음 나비지. 봐서 알겠지만, 얼음 나비가 몸에 닿는 순간 그 부분부터 즉각 얼어붙어. 그건 멈춰지지도 않을뿐더러, 멈출 수는 더더욱 없어. 그 기우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냉기가 더 퍼지기 전에 닿은 부분을 잘라내는 것뿐이야. 

 

 내 짐작이 맞았다. 노바는 왼팔을 내주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 모양이다. 

 

[아인]

그런 사정으로 도끼를 들고 다니게 됐는데, 로샤는 백성들에게 위압감을 준다며 마음에 들어 하더군.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 누군가의 목숨을 거두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양심의 가책만 내려놓을 수 있다면 단숨에 급소를 치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누군가를 구하는 일은...

 

나는 아인의 손등에다 가만히 내 손을 얹었다. 전혀 흔들림 없는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인 역시 두려움을 알고 갈등하는 '사람'이다. 그저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뿐. 

 

[아인]

누군가를 구하는 일은... 글쎄, 잘 모르겠어. 좀 더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해. 

 

나는 조심스럽게 아인의 손을 그러쥐었다. 아인은 제게 주어진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다. 아인의 눈에 배어 있던 지독한 냉기는 어느새 부쩍 줄어들어 있었다.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인]

우울한 얘긴 이제 그만. 노바가 애써 만든 요리들이 다 식겠어. 

 

우리는 근처의 오두막에 들어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나와 아인, 그리고 앤더슨이 함께했다. 그새 진수성찬이 자려져 있었다. 노바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한 요리까지 올라 꼬치, 생선, 고기에 과일까지 식탁이 풍성했다. 아인은 고기를 크게 베어 물며 씩씩하게 식사했다. 고사한 황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 역시 체면 안 따지고 이것저것 집어 먹었다. 그간 맘졸이며 깨지락대던 때에 비하면 모든 음식이 꿀맛이었다. 배가 터질 것 같은데 한 부인이 냄비를 들고 왔다. 

 

[부인]

우리 애가 꿩을 잡아 와서 스튜를 끓여보았어요. 맛 좀 보세요. 

 

 부인은 테이블에 스튜를 내려놓더니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부인]

아유, 대장님의 배필이라더니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두 분의 아기는 무척 예쁘겠지요. 

 

아인은 황당한 듯 피식 웃었다. 

 

[아인]

페나 부인, 너무 급하신 거 아닙니까. 

 

[부인]

제가 결혼할 떄, 제 남편은 대장님만 했다구요?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아끼고만 있다 다른 사람에게 뺏기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어디선가 주니가 나타나 득달같이 끼어들었다. 

 

[주니]

에이. 두목이니까 가능한 거지, 한 손으로 곰도 때려잡는 우리 누님을 누가 감히 넘보겠어요? 안 그래요, 누님? 

 

참다못한 앤더슨이 나섰다. 강력한 꿀밤을 먹은 주니는 드디 어 그 시끄러운 입을 다물었다.

 

[주니]

으아, 아저씨 너무해요! 내가 어쨌다고요! 누님, 도와주세요!!

 

 작은 오두막엔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했다. 징징거리는 주니와 수다에 여념이 없는 페나 부인, 인상을 잔뜩 찌푸린 앤더슨, 그리고 아인...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인은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애틋했다. 아인이 휘황찬란한 황궁보다 이곳을 편안해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다. 겉보기엔 허름하나, 토끼굴 사람들의 마음은 티끌 하나 없이 순수했다. 

 

-

 

 토끼굴에서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인은 집행인 부대를 이끌고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아인은 앤더슨에게 나를 부탁하며, 지하 통로를 통해 곧장 황실 별궁으로 돌아가라 지시했다. 아인은 황성의 배수 시설과 지하 수로를 이동로로 사용하고 있으며, 집행인 부대의 최고 통솔자인 그는 모든 비밀 통로를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그와 함께하기로 했으니 나 역시 지하 통로들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

 

 지하 수로는 무척 어둡고 길었으며 굴곡 구간이 많았다. 어두운 통로는 겨우 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미로처럼 읽혀 있었다. 앤더슨을 놓치고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그를 뒤따랐다. 

 

-

 

 마침내 도달한 곳은 황실 별궁 외곽의 출구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오늘 아침 사냥터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 이 지하 수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지름길이었다. 지하 비밀 통로 체계는 아인이 숨겨둔 비장의 무기일 터다. 이 통로만 있으면 누구든 단시간에 황성의 각 거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아주 은밀하게 말이다. 

 나는 아인을 기다리며 여태까지의 일과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아인이 별궁으로 귀환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아인은 다른 사람과 대화 중이다. 상대가 묘하게 낮이 익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알카이드 사건 때 내 손을 치료해준 그 마법사였다. 

 

[마법사]

사령관께서 어제 또 큰 공을 세우셨다면서요? 황궁에 숨어든 반역자 마법사들을 몰살하셨다더군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마법사는 평온한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하는 말의 뉘앙스는 그렇지 않았다. 아인 역시 뭔가 눈치를 챘는지 금세 눈빛에 날이 섰다. 

 

[마법사]

반역자 낙인이 찍힌 채 무참히 살해된 마법사들 중엔 제 동생도 있었지요. 저 높은 곳에 계신 황제 폐하께는 한낱 벌레만도 못한 목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단 하나뿐인 소중한 아이였습니다. 혈육을 잃는 아픔이 어떤 건지, 황제도 직접 느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법사는 살기등등하게 마법을 퍼부었다. 그러나 아인은 간단히 공격을 피하고선 눈 깜짝할 새 역공에 들어갔다. 아인의 전투에 군더더기라곤 전혀 없었다. 마법사는 아인의 발치에 쓰러진 채 미동도 없다. 제 동생의 곁으로 떠난 마법사를 내려다보며 아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인]

쓸데없는 짓을... 날 죽이면 그 녀석은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춤을 출 거다. 

 

 아인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측벽 쪽에 수상한 인영이 어렸다. 소리 없이 스며든 침입자는 호위병 제복을 입고 있었다. 설마... 습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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