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비밀 작전

2024. 2. 10. 18:41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가웃했다. 황후 침전에 딸린 곁방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

 

[시녀]

전하, 아니 되십니다! 제발 돌려주세요. 귀하신 분께서 어찌 이러십니까. 

 

 지극히 수상한 대화... 대체 뭐지? 혹시나 싶어 문고리를 돌렸는데, 여태껏 한 번도 꿈쩍 않던 손잡이가 돌아갔다. 문을 벌컥 열자,

아인은 무릎 위에다  드레스를 펼쳐놓고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저건... 로샤가 준 드레스?

 

[시녀]

이런 건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이에요, 전하. 제발 돌려주세요. 

 

 나는 시녀를 적당히 달래 내보내고 그가 작업을 끝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나]

굉장한 솜씨네요. 감탄했어요, 진심으로. 

 

 고개를 든 아인의 어색한 표정을 나는 일부러 못 본 척했다. 

 

[아인]

옷을 짓는 게 어렵지, 수선은 어렵지 않아. 

 

 보이지 않는 안쪽까지 치렁치렁 잔뜩 치장해 불편하기만 했던 드레스는 움직이기 편하도록 깔끔하게 수선되어 있었다. 갈아입고서 방 안을 걸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갑옷을 벗고 날개옷을 얻은 기분이다. 가법고 편한 게 너무 좋아 나는 아인에게로 다가갔다. 아인은 내 손을 낚아채 제게로 끌어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생생히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아인]

마음에 들어? 네가 조금이라도 자유로웠으면 해. 너는 인형이 아니야. 로샤의 소유물은 더더욱 아니고. 언제든, 어디든, 자유롭게 달려갈 수 있어야 해. 

 

[나]

고마워요. 가만 보면 아인은 못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아인]

로샤는 나를 망가뜨리려고 그런 곳에 처박아두었지만, 천만에. 그가 밑바닥 인생이라 여기는, 내가 만났던 많은 이들... 그들은 모두 내 스승이 되어주었어. 

 

나는 아인의 손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그를 위로했다. 

 

[아인]

덕분에 특기가 다채로워졌으니, 어떤 의미로는 잘된 일이지. 이상하게도 요즘은 악몽을 안 꿔. 다 너를 만난 덕인 것 같아. 

 

[나]

응, 아인. 모든 게 괜찮아질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로 괜찮아질 수 있을까... 불안이 커질수록 함께 있는 시간은 더욱더 아깝고 소중해져만 갔다. 아인은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성스레 빗어준 뒤 나직이 속삭였다.

 

[아인]

그래, 다 괜찮아져아지. 

 

-

 

아침식사 도중, 로샤가 나를 지그시 건너다보더니 말했다. 

 

[로샤]

오늘 뭔가 색다르군. 드레스 때문인가? 

 

[나]

분위기를 좀 바뀌봤어요. 짧은 치마인 편이 좋아서요.

 

로샤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

 

 어제와 마찬가지로 나는 아인을 따라 별궁으로 이동했다. 아인은 내게 황성 지하 수로의 전체 지도를 넘겨주고 앤더슨을 붙여주며 지리를 익혀두라고 했다. 지하 통로는 아인이 가진 비장의 무기다. 그런 지하 통로의 지도를 내게 통째로 넘겼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믿는다는 뜻이겠지. 나는 열심히 뛰어다녔다. 어둡고 지저분한 환경 탓에 꼴은 엉망이 되었지만 모든 갈림길과 비밀 통로, 출구를 외우기 위해 노력했다. 아인이 내게 보이는 신뢰를 결코 가법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쿵.

 

 굴곡 구간을 달려가던 중, 나는 누군가와 부딪쳤다. 페나 부인이었다. 이런 데서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페나 부인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페나 부인]

세상에나! 아가씨? 어쩌다 여기서 길을 잃었어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대장님이 알면 놀라실 텐데! 

 

 부인은 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쓱쓱 닦아주며 떠들어댔다. 

 

[페나 부인]

아이참, 예쁘기도 하지. 아이고, 그나저나 이걸 들켜버려서 어쩌죠. 뭐, 아가씨라면 괜찮겠지만요. 

 

 페나 부인은 구멍 속에 있는 병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페나 부인]

과일 시럽과 초콜릿 잼을 잔뜩 만들어 여기다 숨겨두었거든요. 대장님에게 깜짝 생일 파티를 해드리려고요. 

 

[나]

아인의 생일...이라고요? 

 

[페나 부인]

생일은 모레지만 우리끼리 예행 연습을 하려던 참이에요. 아가씨도 같이 가요. 

 

-

 

 토끼굴에선 거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생일 파티 예행 연습이라니 금시초문이다. 이 사람들 단순히 놀고 싶었던 거 아니야? 노바는 파슬리를 다져서 레몬, 달걀노른자, 요거트를 넣고 섞으며 특제 소스를 제조중이라고 했다. 한쪽에는 최고급 와인 식초와 달걀노른자에 양고기를 재워두었단다. 

 

[노바]

우리 고향 명절 전통 음식인 양고기 요리를 맛보여드릴게요. 어디에서도 못 먹어본, 굉장한 맛일걸요. 

 

[페나 부인]

전 대장님이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와 푸딩을 만들 거예요. 아가씨께서 맛을 좀 봐주세요. 다들 맛있다고만 하니 영 믿을 수가 없어서. 

 

 그들은 무섭도록 진지했다. 본인들이 놀고 싶어서 이러나 의심했던 게 미안해질 도로 말이다. 나는 새삼 감동했다. 

 

[나]

아인이 평소에 사람들에게 잘해줬나 보네요. 

 

[앤더슨]

그럼요. 모두들 아인 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앤더슨이 돌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앤더슨]

아인 님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것은 이제 이곳의 사람들뿐입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아인 님의 생일마다 호화로운 축제가 벌어졌는데. 서글픈 일이죠. 권력이란 게 대체 뭐기에...

 

[페나 부인]

아가씨도 선물을 준비해야 하지 않나요? 함께 만들까요? 

 

 페나 부인이 불쑥 끼어들더니 내 손매를 잡아끌었다. 

 

[페나 부인]

요리와 케이크는 오래 보관할 수 없으니, 술을 담그면 되겠네요! 생일 파티 때 함께 병을 따고 축하하면 좋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의 선물을 받고 대장님께서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너무 궁금하네요.

 

 당황한 나는 앤더슨을 돌아봤다. 그는 고개를 끄덕 였다. 

 

-

 

 페나 부인은 나를 끌고 한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토끼굴의 유일한 주점이라고 했다. 테이블 위에는 각종 술과 향료, 과일이 놓여 있었다. 오렌지, 레몬, 사과, 체리... 다채로운 과일을 보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상그리아라면 비슷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재료도 다 갖춰져 있고 말이다. 좋아. 한번 도전해보자. 달콤한 걸 좋아하는 아인이라면 분명 좋아해줄 테니까!

 정성을 다했는데도 만드는 건 금방이었다. 밀봉한 병은 가까운 저장고에 넣어두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잔뜩 떠들면서 술을 담그다니. 내가 살던 곳에서도 못 해본, 재밌는 경험이었다. 

 만든 술을 노바와 페나 부인, 앤더슨 등 그 자리의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노바는 색다른 맛이 최고라며 찬사를 보냈다. 페나 부인은 아인이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이걸로 야금야금 보내버리자는 등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속사포처럼 싸댔다. 앤더슨도 기분이 좋은지 모처럼 웃고 있었다. 

 

[나]

앤더슨은 어떻게 생각해요? 아인이 좋아해줄까요? 

 

그는 지체 없이 대답을 내놓았다.

 

[앤더슨]

아가씨의 선물이라면 아인님은 당연히 좋아하실 겁니다. 

 

잔에 남은 술을 쭉 들이켠 그는 입맛을 다시며 솔직하게 덧붙였다. 

 

[앤더슨]

제게는... 조금 달군요/

 

-

 

 토끼굴에서 돌아온 뒤로 나는 들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했다는 걸 알면 아인이 얼마나 기뻐할까. 콧노래를 부르던 중 느낌이 이상해 돌아보니 진작 간 줄 알았던 앤더슨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아인의 오른팔인 그는 집행인 부대원 중 가장 덩치가 크고 위엄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장승처럼 서 있기만 하니, 지은 죄도 없는데 괜히 어까 움츠러든다. 

 

[나]

앤더슨, 무슨 일인가요? 할 말이라도...? 

 

 앤더슨은 묵직한 걸음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러더니 밑도 끝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나는 놀라 펄쩍 뛰었지만, 앤더슨은 무기를 내려놓고 머리까지 조아리며 간절히 말했다. 

 

[앤더슨]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가씨. 꼭 들어주셨으면 하는 부탁이 있습니다. 부디 아인 님께서 다른 속셈을 가진 무리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피를 토할 듯 비장했다. 

 

[나]

알겠으니까 일단 일어나요. 이러지 마세요, 앤더슨. 

 

 내가 있는 힘껏 팔을 잡아끌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나]

다른 속셈을 가진 무리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앤더슨]

그들은 계속해서 아인 님을 포섭하려 하고 있습니다. 실버나이트의 반란군 세력 말입니다. 아인 님께서 그들과 손잡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아가씨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나]

앤더슨, 당신은 아인의 부하잖아요. 어째서 아인의 결정에 반대하는 건가요? 

 

[앤더슨]

저는 과거 퓨에나 황후님을 모셨습니다. 황후님께서 제게 마지막으로 맡기신 임무란 생각으로 지금껏 아인 님의 곁을 지켰지요. 이 앤더슨, 아가씨께도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제발 아인 님을 지켜주십시오. 

 

[나]

아인이 반란군과 손을 잡으면 안 되는 이유는요? 

 

[앤더슨]

반란군은 그저 협력을 핑계로 아인 님의 힘을 이용하려는 것뿐, 아인 님께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 도와주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그들은 믿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인 님은 오로지 복수만 생각하시느라 제 충언을 전혀 듣지 않으시더군요. 조력자는 많을수록 좋다고... 그러니 아가씨, 아인 님께서 실버나이트와 반란군을 멀리하도록 설득해주십시오. 

 

[나]

아아,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아인이 앤더슨의 이야기도 듣지 않았는데 과연 내 이야기를 들어줄까요?

 

[앤더슨]

아인 님께서 아가씨를 바라보는 눈빛을 봤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아가씨를 아끼고 계십니다. 그러니 아가씨의 말씀에는 분명 귀를 기울이실 겁니다. 부디 그분을 지켜주십시오. 못난 부하가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앤더슨의 충심은 보는 사람의 가슴까지 먹먹하게 만들었다. 

 

[나]

장담은 못 하겠지만, 어떻게든 설득하도록 노력해볼게요. 그리고 나는 끝까지 아인의 곁에 있을 테니 걱정 말아요, 앤더슨. 

 

[앤더슨]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가씨는 돌아가신 황후님만큼이나 강인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오늘 일은 아인 님께 부디 비밀로 해주십시오. 

 

앤더슨은 정중히 인사하고 곧장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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