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달빛 아래의 검

2024. 2. 10. 16:49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아인이 내 방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가 저녁식사를 가지고 왔다. 잘 차려진 식사에도 식욕은 일지 않았다. 아인을 생각하니 허기도 모르겠다. 나는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냅킨을 집어 들려던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평상시와는 달리 화려한 냅킨이었다. 이건 손수건 같은데...? 나는 조심스레 그 천 조각을 펼쳐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엔 '정원에서 기다릴게.'라는 문장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애써 숨을 고르며 시녀를 불렀다. 

 

[나]

복도에서 혹시 누굴 봤나요? 

 

[시녀]

네? 아인 전하를 제외하곤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짐작한 대로다. 나는 누가 볼까 얼른 손수건을 접어 숨겼다. 시녀가 식사를 거뒤 간 후,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정원에서 기다릴게.' 아인의 메시지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인을 만나러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로샤가 알게 된다면... 아아, 어떡하면 좋지. 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단을 내리고서 조심조심 문을 열어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

 

[황실 호위병]

해가 진 뒤로는 위험하니 외출을 삼가십시오. 

 

역시나, 호위병이 나를 저지했다. 

 아인이 준 배지를 써보자.

 내가 배지를 꺼내며 황태자의 명이라고 하자 호위병들은 눈짓을 교환하고는 길을 터주었다. 로샤가 내린 야간 통행 금지령 때문에 한밤중의 황궁은 텅 비어 있었다. 넓디넓은 이곳에 오직 내 발소리만 울렸다.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충동적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걸 분명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데... 그렇지만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정원이 가까워지자 지금까지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왔다. 정원 한가운데 위치한 분수의 물소리였다. 

 물소리를 따라간 곳에서 마주한 것은 어둠 속에서도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흑발 청년의 실루엣이었다. 결들고 있는 것이 사람을 해치는 무기라는 것을 믿을수 을만큼 그의 손놀림은 우아하고도 섬세했다. 검날로 별어지는 물방울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휨이 미정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밤새들조차 숨을 죽였는지, 물소리만 제외하면 사방은 온통 고요했다. 나는 예술작품이라도 감상하듯 멀찌감치 떨어진데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귀에 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내 심장은 거칠게 요동쳤다. 마침내 나를 돌아본 아인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다가가 주머니 속에 넣어둔 체리맛 초코 케이크를 건넸다. 

 

[나]

야식 가져왔어요.

 

[아인]

내가 이 맛을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나]

이게 제일 단 맛이니깐요.

 

 아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듣기 좋은 물소리를 음미하며 나란히 앉아 초콜릿을 나눠 먹던 중, 그가 입을 뗐다. 

 

[아인]

너에게 강압적으로 명령하지 않고, 너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할 거야. 

 

나는 눈을 휘등그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

좋아요.

 

[아인]

하지만 너를 계속 이런 식으로 데려갈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봐야겠어. 이건 나의 길이니까. 

 

 나는 발밑의 선명한 두 그림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나]

아인, 애초에 내가 이쪽 세계로 건너온 건 오직 내 의지로 한 일이었어요. 이건 당신만의 길이 아니에요. 내 길이기도 해요. 당신과 나, 우리 둘이 함께하면 반드시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거예요. 

 

 아인은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잘 벼려진 날은 달빛에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아인]

나는 줄곧 무능하고 무력했지. 하지만 절대로 그자에게 굴복하지 않을 거다. 나는 더욱더 강해질 거다. 기필코 그놈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내 손으로 끝장낼 거야. 왕좌도, 너도 내 것이 될 거다.

 

그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인]

이길 거야.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나는 이겨야만 해. 

 

[나]

이미 당신이 이겼어요. 적어도 내 문제에 있어선. 내가 여기 있잖아요. 이렇게 왔잖아요. 아인, 오직 당신만을 만나러. 

 

 아인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 안에선 뜨거운 불꽃이 소리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

결정을 내리기까지 나 역시도 많이 고민하고 큰 위험을 각오했다는 걸 알아줘요. 

 

아인은 내게 눈을 고정한 재 나직이 선언했다. 

 

[아인]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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