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의심과 믿음

2024. 2. 10. 16:55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눈을 뜨니 벌써 아침이다. 방에는 눈부신 햇살이 가득했다. 얼마나 깊이 잤던지 정신이 몽롱했다. 문득, 지난밤의 일이 꿈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러나 내 손엔 밤새 꼭 쥐고 잤던 아인의 손수건이 있었다. 아아, 다행이다. 꿈이 아니었어!

 아침 채비를 마치자마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아인이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그는 병사들을 대동하고 서 있었다. 

 

[아인]

폐하와의 조찬에 그대와 내가 초대되었다 오늘뿐 아니라 매일 참석하라는 명을 내리셨다는군. 

 

 그의 말투는 더없이 사무적이었다. 나는 얼른 아인과 눈빛을 교환한 뒤 그를 따랐다. 

 

-

 

 자리 배치는 예상대로였다. 나는 로샤의 바로 옆이고, 아인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았다. 

 

[로샤]

음식은 입에 맞나? 

 

[나]

네, 아주. 

 

 내 짧은 대답에 로샤는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표정이었다. 그는 메인 요리에 손도 대지 않은 내게 벌써 디저트를 권하며 의미심장한 소릴 했다. 

 

[로샤]

듣자 하니 내 예비 신부께서 요즘 디저트를 지나치게 많이 먹는다던데. 실은 우리 황태자 아인도 단것을 아주 좋아하거든.

 

 나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식탁 아래에서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나]

원래 살던 곳에서도 단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풀곤 했어요. 너무 많이 쌓여 처치 곤란인 초콜릿을 아인 전하에게 몇 번 정도 준 기억은 나네요. 

 

[로샤]

홋, 초콜릿을 주고받다니... 처음엔 질색하더니, 사이가 꽤 좋아졌나 보군? 

 

[아인]

책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아인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런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로샤가 진지하게 명했다. 

 

[로샤]

아인, 내 예비 신부의 호위는 이만하면 됐으니 원래 네 자리로 돌아가거라. 

 

[아인]

특별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로샤]

특별할 게 따로 있겠나. 반란군이 늘 골치지. 다시 순찰에 집중하도록. 사령관의 본디 임무는 반란군 색출과 숙청이니까. 

 

 나를 황궁에 가두고 아인과 떼어놓으려는 건가? 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인]

분부 받들겠습니다. 다만, 제가 성을 나가 있는 동안엔 신녀를 황궁이 아닌 다른 곳에 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로샤]

흐음. 왜지? 

 

[아인]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대마법사의 감시는 지나치게 가혹합니다. 그리고 현재 황궁에 자유로이 드나드는 마탑의 마법사 중 반란군이 또 섞여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로샤는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띄었다. 

 

[로샤]

일리가 있다. 적합한 장소가 있나? 

 

[아인]

별궁이야말로 최적의 장소입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집행인 부대 최정예를 붙여두면 따로 걱정하실 일이 없으리라 사료됩니다. 

 

 로샤는 생각에 잠겼다. 실패인가 싶어질 즈음, 그는 돌연 나를 건너다봤다. 

 

[로샤]

너를 계속 내 눈이 닿는 곳에 두고 싶지만... 그러기에 짐은 너무 바쁘지. 얌전히 굴도록. 골치 아픈 건 질색이거든. 

 

[나]

명심하죠, 폐하. 

 

-

 

별궁으로 이동한 뒤로도 나는 계속해서 로샤에 대해 생각했다.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커져만 갔다. 석연치 않았다. 어째서 그물을 치다 말고 고기들을 놓아준 걸까? 

 

[아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그는 싸늘하게 덧붙였다. 

 

[아인]

그 자식 생각이라면, 그만 둬.

 

그는 지난 훈련 때와 똑같은 망토 한 벌을 내게 건넸다. 

 

[아인]

갈아입고 나와. 갈 곳이 있으니까. 

 

 아인은 눈 내리는 정원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의 어깨엔 그새 새하안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황궁에서 나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다니, 생각지도 못한 자유를 얻었다. 나는 별궁을 떠나 어디론가 향하는 집행인 부대의 대열에 끼었다.

 선두에서 부대를 이끄는 아인은 더없이 강인해 보였다. 제법 긴 대열엔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모든 대원은 제 역할을 훌륭히 수행 중이다. 나만 빼고 말이다. 

 

[아인]

말은 탈 줄 아나? 

 

말이라니, 근처에도 못 가봤다. 나는 솔직하게 못 탄다고 대답했다. 

 

[아인]

가르쳐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군. 

 

 상황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해 뒤에서 몰래 그를 노려봄으로써 소심하게 복수했다. 그건 그렇고... 이 인간, 혹시 날 데리고 공무를 수행할 셈인가? 나는 아인의 망토를 슬쩍 잡아당겼다. 그리고 돌아보는 그를 향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나]

혹시, 지금 반란군을 상대하러 가는 건가요? 

 

 아인의 편에 서겠다는 결심은 변함없다. 그렇다고 해서 잔인한 숙청까지 도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인은 내 생각을 눈치챈 듯 희미하게 미소 짓더니 제 망토 자락을 꼬옥 잡고 있는 내 손을 가리켰다. 

 

[아인]

공개적인 장소에서 잘도 대담한 짓을 하는군. 

 

 화들짝 놀란 나는 곧바로 손을 떼고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멀리서 한 사람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 

 

[주니]

두목! 이것 보세요! 엄청나게 큰 꿩을 잡았어요! 

 

 목소리로 보아 상당히 어린 소년 같았다. 그러고 보니, 비록 망토로 모습을 감추고는 있어도 집행인 부대원들은 저마다의 특징이 있었다. 

 

[아인]

두목이라니, 경망스럽기는... 앤더슨, 신입 단속 좀 잘하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앤더슨]

(조용히 쳐다본다)...

 

[주니]

아, 죄, 죄송해요, 앤더슨 아저씨! 그지만 이 토실토실한 꿩을 보시라고요! 기름이 좔좔 흐르잖아요! 

 

나는 황당해 '꿩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나]

저게... 대체 뭐죠? 

 

[아인]

뭐긴 뭐야. 반란군이지. 우리 신입이 성 밖을 헤집고 다니는 반란군 놈을 겨우 잡아들였군. 

 

아인은 기분 좋게 씨익 웃어 보였다 

 

[아인]

저 녀석은 우리 부대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반란군이 되었을 거야. 더 이상 배를 곯지 않으니 실버나이트 밑으로 들어갈 생각을 버렸다고 하더군. 먹지도 못할 이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 반란군에 가담한 이들 대부분이 저 아이와 같아.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숙청은 무슨 숙청. 

 

숲 깊은 곳에서부터 여러 들짐승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인]

한가롭게 구경이나 하자고 나온 게 아닌 건 알고 있지? 또 한 번 실전 능력을 기울 때야. 

 

[나]

히익! 또 늑대와 싸워야 해요? 

 

나는 몸서리치며 펄쩍 뛰었다. 아인은 즉각 부하를 불렀다. 

 

[아인]

여기 이 앤더슨이 안내해줄 거야. 나는 사냥을 나갈 테니 그동안 열심히 시험을 치르고 있으라고. 

 

시험이라니, 아인은 아직도 내가 못 미더운 걸까? 

 

[아인]

널 못 믿는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에게 네 실력을 보여주라는 뜻이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아인은 제 사람들에게 나를 확실히 각인시길 요량인 것이다. 그런데, 내 능력을 함부로 이들에게 보여줘도 되려나?

 아인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이 중 널 팔아넘길 사람은 없으니 걱정 마. 

 

-

 

 앤더슨은 나를 외딴 계곡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일전에 아인이 했던 것처럼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또 늑대네! 

 

-

 

 그래도 한번 해봤다고, 이번에는 비교적 수월했다. 나는 한 무리의 늑대들을 해치우고 난 뒤 느긋하게 옷을 털어냈다. 어느 한 군데 찢어지지 않은 망토를 보니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앤더슨]

아직 끝이 아닙니다! 방심하지 마십시오! 

 

 뒤를 돌아본 나는 바짝 얼어붙고 말았다. 벌써 이만큼이나 다가온 건 집채만 한 곰이다! 이게 말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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