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세르 대륙(完)(117)
-
7화. 탐식
거대 얼음 나비와 전투를 벌이는 동안 나는 내내 불안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얼음 나비 때문만은 아니다. 카이로스가 나를 기습할까 봐 걱정됐던 탓이다. 그러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그만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낭패라고 생각하던 순간, 등 뒤에서 강력한 기운이 쇄도했다. 조금 전까지 내 목숨을 위협하던 거대 얼음 나비는 단번에 가루가 되어버렸다. 놀라서 눈을 그게 뜨고 뒤를 돌아보니, 카이로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로스가 날... 도와줬다고? 무척 의외의 상황이었지만, 카이로스는 무감한 얼굴이었다. [나] 카이로스... 또 함정인 줄 알았어요. 카이로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수를 쓰려다 마음을 바꾼 건지, 아니면 정말로 우연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 왜 날..
2024.03.01 -
6화. 마법사의 비밀
[호레스] 크윽! 예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카이로스] 마탑에서는 어떤 욕망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했지. 집념이 강하기만 하다면. 이번엔 이세계 신녀의 집념이 더 강한 듯 하군. 호레스를 손봐주고 나니,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만 같았다. 바닥에 쓰러진 재 끙끙거리는 호레스를 외면하고서 나는 카이로스를 돌아봤다.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실은, 지난 여정에서 마법사가 얼음 나비로 변하는 걸 여러 번 목격했어요. 마법사와 얼음 나비에 뭔가 비밀스럽고 밀접한 관계가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내 추측이 맞나요? 카이로스는 침묵했다. 하긴, 마법사의 비밀을 선뜻 답해줄 리 없지. [나] 주제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단서를 찾고 싶어요. 제발 도와줘요, 카이로스. 아니, ..
2024.03.01 -
5화. 정신력의 근원
카이로스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탐탁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벌써 이번이 몇 번째예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함정을 파고 기습하다니 너무하잖아요! [카이로스] 다치지 않게 붙잡고 저 시끄러운 입부터 다물게 해라. [나] 세상에, 매복까지? 비겁해!! [카이로스] 순진한 소릴 하는구나. 싸움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나] 대마법사씩이나 되시는 분이 품위 없는 소릴 하시네요. [카이로스] 내게 지켜야 할 품위 따위는 없어. 그 순간, 열린 문을 통해 검은 인영이 쇄도했다. [아인] 과연. 명령을 어길 거라 예상했었다. 역시 마법사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이야. 그들의 두목인 당신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카이로스] 아인 전하... 카이로스는 문 쪽을 슬쩍..
2024.03.01 -
4화. 휴전
카이로스는 또 한 번 적당히 나를 상대해줄 뿐이었다. [카이로스] ...... 계속 이래봤자 체력과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아무래도 작전을 바꾸는 게 좋겠어. 나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나] 이제 그만 포기하고 날 받아들여줘요. 어차피 당신은 나를 죽이거나 다치게 할 수 없잖아요. 나는 소중한 제물이니까. 안 그래요? 슬쩍 던진 한마디에 카이로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안 그래도 싸늘한 얼굴이 한층 더 무서워 보인다. 카이로스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카이로스] 지금 협박하는 건가? 기필코 널 마법진에 밀어넣을 것이다. 내 손으로 직접. 누구도 내 계획을 방해하지 못해. [나] 나는 도망치지 않아요. 만약 여기서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땐 반드시 강림 의식의 제물이 될게요..
2024.03.01 -
3화. 단풍나무
[나] 하아... 정말 위험했어. 그래도 무승부라니 일단은 다행이네. 카이로스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대륙 최강의 마법사 앞에서 이 정도의 실력을 보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간 여러 번의 시공 여행을 통해 실력을 기르고 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카이로스는 입을 다문 채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어쩐지, 아까보단 조금 누그러진 듯도 했다. [나] 어때요? 이만하면 당신에게 협상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 것 같나요? 절대 귀찮게 하거나 괴롭히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조사하고 방법을 찾아보려는 것뿐이 라고요. [카이로스] 말 많은 건 질색이니 그쯤 해둬. 차갑게 돌아서서 몇 발짝 걸어나가던 그는 우뚝 멈춰서더니 나를 돌아봤다..
2024.03.01 -
2화. 마탑
가시 덩굴과 장미꽃이 늘어진 새장 안. 에르세르 황궁이다. 만면에 미소를 떤 로샤가 흥미로운 듯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최대한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나] 폐하,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로샤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푸른 눈에 당혹감이 스졌다. [로샤] 초면부터 대뜸 독대를 청하다니. 당돌한 신부로다. [나] 독대는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지요, 폐하. 이 자리에 동석했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어둠 속을 똑바로 가리켰다. 조명이 닿지 않는 그곳엔 카이로스가 있다. [나] 에르세르 대륙 최강의 대마법사, 카이로스. [로샤] 으음? 카이로스를...? 취향이 제법 독특하군. 그보다, 그대가 어떻게 카이로스를 알지? 뭔가 있군 그래. 로샤의 얼굴에서 마침내 웃음기가 사라졌다...
2024.03.01 -
1화. 운명의 윤회
※열람 전,에르세르의 모든 스토리를 읽고오시는 걸 반드시 추천드립니다. . . . . . . . . . . . . . . . . 이번이 에르세르 대륙에서의 몇 번째 여정인지 모르겠다. 결말을 바꾸고자 계속해서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수차례. 그러나 알카이드는 나를 구하기 위해 번번히 내 세계를 망가뜨렸고, 에르세르는 매번 재앙을 피하지 못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결말만 되풀이될 뿐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 에르세르에 대한 정보도 절실했다. 두 세계를 모두 지키고 싶었다.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여정은 계속되어야만 했다. - 나는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운명 앞에서 나는 여전히 한낱 미물인 존재였다. 대마법사 카이로스에 의해 번번이 거..
2024.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