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탐식

2024. 3. 1. 22:43에르세르 대륙(完)/전승의 장 (카이로스)

 거대 얼음 나비와 전투를 벌이는 동안 나는 내내 불안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얼음 나비 때문만은 아니다. 카이로스가 나를 기습할까 봐 걱정됐던 탓이다. 그러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그만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낭패라고 생각하던 순간, 등 뒤에서 강력한 기운이 쇄도했다. 조금 전까지 내 목숨을 위협하던 거대 얼음 나비는 단번에 가루가 되어버렸다. 놀라서 눈을 그게 뜨고 뒤를 돌아보니, 카이로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로스가 날... 도와줬다고? 

 무척 의외의 상황이었지만, 카이로스는 무감한 얼굴이었다. 

 

[나]

카이로스... 또 함정인 줄 알았어요. 

 

 카이로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수를 쓰려다 마음을 바꾼 건지, 아니면 정말로 우연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

왜 날 도와준 거죠? 

 

[카이로스]

......그러게 말이다. 전투에 한눈팔린 널 기습해 월계절이 될 때까지 재워두면 한결 편할 덴데 말이야. 혹시...이전에 우리가 마주친 적이 있었던가? 

 

 카이로스는 꽤나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고선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카이로스]

아니, 쓸데없는 소리를. 방금 질문은 잊어라. 대체 이게 무슨 소동인지... 한심하군. 

 

그는 짧은 한숨을 대취더니 고개를 저었다. 

 

[카이로스]

마탑의 비밀을 다 알았으니 이제 되었겠지? 

 

이것으로 나를 마탑에서 내쫓으려나 본데.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나]

나를 황궁으로 돌려보낼 생각은 말아요.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거 예요. 큰 의문도 아직 남아 있고요. 

 

카이로스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밖으로 나갔다. 

 

[카이로스]

장소를 바구지.

 

-

 

어두컴컴한 계단을 오르던 카이로스가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카이로스]

큰 의문이라는 건 뭐지? 

 

[나]

마법사들은 마력을 계속 쓰니 필연적으로 얼음 나비가 되겠죠. 강한 마력을 더 많이 쓰게 된다면 나비화는 더 빨라질 테고요. 그런데 카이로스, 당신은 어째서 지금까지 멀쩡하죠? 그렇게 강한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데 얼음 나비로 변하지 않은 것은 물론, 늙지도 않잖아요. 당신이 선황 재위 시절부터 지금까지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그리고... 마법사의 힘은 '욕망'에서 비롯된다면서요? 당신의 욕망은 뭐죠? 

 

일순, 카이로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카이로스]

예의 차린답시고 돌려 말하지 않는 건 좋다만...

[카이로스]

조심성이라곤 전혀 없군. 

 

 그는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왔다. 묵직한 체향이 혹 끼치며 길고 섬세한 그의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스치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나를 목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상태로 만들 수 있다. 제물로 쓰려면 그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겠지. 충분히 두려울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전혀 겁이 나질 않았다. 그건, 흔들리고 있는 그의 눈빛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

혼란스러워 보이는군요. 카이로스. 당신은 항상 저를 제거함으로서 문제를 회피하려 하죠.  왜 제 질문에 대답을 못 하시는건가요? 당신은 자신의 과거와 욕망도 마주하지 못하는 겁쟁이인가요?

 

 나는 목덜미에 닿아 있는 카이로스의 손을 살며시 밀어냈다. 카이로스는 의외로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잠시 후,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서 다시 계단을 올랐다. 

 

-

 

 도착한 곳은 마탑 입구의 단풍나무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푸르스름한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법 이 깃든 단풍나무는 어제와 똑같이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아마도 오래도록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겠지, 눈앞의 이 남자처럼. 카이로스는 나무의 수피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카이로스]

아마도... 백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나는 내 나이를 알지 못해. 처음에는 나 역시 평범한 마법사였다. 네 말대로 진작 얼음 나비가 되어 사라졌어야 했는데 말이야. 고비 없는 인생이란 없는 법. 나 역시 숱한 위기를 맞고서 절망에 몸서리쳐봤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최악의 고비를 맞닥뜨릴 때마다 어김없이 나를 찾아온 이가 있었지. 얼굴도 목소리도, 심지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몰라. 그는 형편없이 무너진 채 포기하려던 나를 계속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카이로스는 바람에 실려 떨어지는 단풍잎을 붙잡았다. 

 

[카이로스]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란 게, 그리 거창한 것만도 아니더군. 그는 내게 살아남으라고... 살아남기만 하면 언젠가 반드시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했어. 내 삶은 그로 인해 변했다.

 

 또다시 바람이 불었다. 카이로스는 단풍잎을 소중히 붙잡고서 덧붙였다. 

 

[카이로스]

내 욕망이 뭐냐고? 바로 '생존'이다. 살아남아서 그를 다시 만나려고 했어. 단순하고 유치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욕망이란 본디 그런 것. 

 

카이로스는 그렇게 말하며 손안의 단풍잎을 가만히 응시했다. 

 

[카이로스]

그것도 곧 끝이로군. 월계절이 다가오고 있으니. 

 

카이로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묻고 싶은 이야기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가 오랜 세월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동안 어떤 기분이었을지, 그리고 그를 지탱해준 이는 누구인지, 내가 알 도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을 통해 안 것도 있었다. 푸르디푸른 그의 눈동자에는 긴 세월 동안 짊 어져왔을 막중한 책임, 홀로 곱씹어왔을 고독, 그리고 기약 없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단풍나무를 외면하고 돌아서는 카이로스는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하고 차갑게만 보였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까. 

 시간이 멈춘 듯, 세상은 고요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던 그때. 

 

[???]

카이로스 님, 예쁜 언니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서 왔어요. 

 

돌아보니, 아까 봤던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알로라]

언니, 알로라를 도와취서 고마웠어요! 보답으로 내가 맛있는 아침밥을 줄게요! 

 

 아기 새가 지저귀듯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아이에게 대답하려던 순간, 내 배에서 우렁찬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정신이 없던 나머지,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카이로스는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잠 안 자고 먹지 않아도 잘만 사는 사람이니 이해를 못 하겠지. 나는 알로라의 손을 꼭 잡고서 초대에 응했다. 

 

[카이로스]

미리 말해두는데, 알로라는 마탑 9성 고위 마법사다. 

 

 뭐어? 이렇게 어리고 가냘픈 아이가 마탑의 최강 실력자 중 한 명이라고?!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다. 나는 몸을 숙여 알로라와 눈높이를 맞췄다. 

 

[나]

우와, 알로라는 굉장한 친구구나! 

 

[알로라]

그쵸, 굉장하죠? 알로라는 '탐식'의 마법사예요. 알로라는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얼른 가요, 언니! 알로라랑 같이 맛있는 아침 먹어요! 

 

 카이로스에게 말도 못 붙인 채, 나는 알로라의 손에 이끌려 마탑 안으로 향했다. 귀여운 외모와 다정한 성격의 알로라는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방에 차려진 아침식사는 황궁의 만찬을 방불케 할 정도로 화려하고 푸짐했다. '탐식'의 고위 마법사라 식사 대우부터 남다르구나 싶었다. 그런데, 알로라는 어째서인지 음식에 거의 손을 못 대고 있었다. 

 

[나]

입맛이 없니? 왜 안 먹어? 

 

[알로라]

아아, 언니가 다 먹어요. 나는 지금 많이 먹으면 안 돼서요. 음식보다도... 얼음 나비를 더 먹어야 하니까요. 앗,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언니! 알로라는 뭐든 다 잘 먹어요! 으응, 그치만... 얼음 나비를 먹으면 배가 좀 아프긴 해요, 헤헷. 

 

알로라는 해맑게 웃었다. 씁쓸해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로라]

어, 언니? 왜 그래요? 알로라가 뭔가 실수했어요? 

 

[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걱정돼서 그래. 어린 네가 안다고 이런 힘든 일을...

 

[알로라]

에이, 하나도 안 힘들어요. 알로라는 그냥 먹기만 하면 되는걸요.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쉽고 좋아요! 마탑에 온 뒤론 배고프지 않아서 얼마나 좋은데요. 

 

[남자 마법사]

알로라 님, 지금 바로 외곽으로 지원을 나가서야 합니다. 

 

[알로라]

어? 난 어제 다녀왔는데...? 오늘은 호레스 차례예요. 

 

[카이로스]

호레스는 한동안 운신이 불가능해서. 어젯밤에 '누구한테 당해서 치료 중이거든. 그러니 알로라 네가 대신 가줘아겠다. 

 

가슴이 뜨끔했다. 그 변태 자식이 적당히만 했어도 그렇게 늘씬하게 패주진 않았을 덴데. 

 

[카이로스]

요즘 들어 마력이 불안정해지는 일이 잦더구나. 무리인 것 같으면 오늘은 쉬도록. 

 

[알로라]

아니에요, 괜찮아요! 카이로스 님이 알로라를 불러주서서 기뻐요. 알로라가 가서 다 먹어치울게요! 야호, 신난다! 

 

 고위 마법사인 알로라를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나는 카이로스에게 허락을 구했다. 

 

[카이로스]

마차를 내주지. 

 

카이로스는 웬일로 마탑의 입구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알로라는 나와 함께라는 사실에, 내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집행인들의 차가운 눈빛이었다. 마법사를 대하는 그들의 시선이나 자세가 어떤지 보여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마침, 북쪽에서 한 무리의 얼음 나비들이 우리를 항해 날아들었다. 

 

[알로라]

우와! 맛있는 게 잔뜩! 알로라 너무 기뻐!

 

 알로라는 천진난만하게 달려가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노랫소리가 더 많은 얼음 나비들을 끌어들였다. 

[알로라]

라라...

 

 알로라의 노랫소리가 커질수록 그녀가 내뿜는 빛이 강해졌다. 마법의 빛에 붙잡힌 얼음 나비 무리는 그녀의 입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얼음 결정들이 알로라의 주변으로 희뿌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얼음 나비가 뿜는 냉기가 제법 먼 이곳까지 미쳤다. 저 어린아이는 얼마나 추울지. 그러나 알로라는 한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 계속해서 얼음 나비를 집어삼킬 뿐이었다. 엄청난 얼음 나비떼를 상대하는 그녀는 그저 식사를 즐기는 것처럼만 보였다. 고위 마법사의 전투력은 과연 상상 이상이었다. 황성이 지금까지 버터온 것이 어디까지나 카이로스와 마탑의 덕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법사들이 욕망에 집착하고 심지어 그로 인해 타락한들, 그들이 최후의 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손가락질할 수 없다. 나는 알로라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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