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세르 대륙(完)(117)
-
10화. 치자꽃의 기억
반란군 주둔지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실버나이트는 차분히 연설했다. 폭군은 간악한 대마법사와 함께 어둠의 의식을 벌이기 위해 이세계에서 나를 납치해 왔다고. 그는 가엾은 자들을 반란군으로 거두어준 것처럼 이세계의 신녀 역시 구원할 것이며, 나아가 황제의 사악한 음모를 저지하고 이곳의 재앙을 끝낼 것이라고 했다. 실버나이트의 음성은 부드럽고 우아했다. 그는 반란군의 수장이라기보다는 자상한 교수님에 더 가까웠다. [한멜] 아무 걱정 마세요, 실버나이트 님. 이세계 신녀님은 저희가 잘 돌보겠습니다! [반란군 병사 1] 폭군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저희가 이분을 반드시 보호하겠습니다! [반란군 병사 2] 신녀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는 내게 먹을 것을 권했지만, 이런..
2024.02.12 -
9화. 재회
처형 명령을 접한 죄인들도 합세하여 반발했다. 그들은 모두 스스로를 얼음 나비화 시켰다. 수많은 얼음 나비들이 날아다니며, 후원은 다시 눈보라에 휩싸였다. 끔찍한 살풍경을 마주하고 있자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몹시도 씁쓸하고 서글퍼졌다. [로샤] 종종 있는 일이지. 대마법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 말거라. [카이로스] 폐하.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카이로스의 시리디시린 눈동자가 돌연 내게로 향했다. 그는 차분하고도 냉철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카이로스] 폐하도 아시다시피, 마법사란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불필요한 자극은 삼가심이 좋겠습니다. 로샤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로샤] 아아, 그런 거였군. 이해하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짐이 감히 경의 마법사들을 데려다 ..
2024.02.12 -
8화. 마법사의 반란
로샤의 사냥 실력은 놀라웠다. 그는 혼자서 사슴과 늑대 여러 마리, 심지어 곰까지 잡았다. 누구도 그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로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로샤] 그대는 내 승리의 여신이군. 잡은 곰은 요리에 쓰기 전에... 최고의 털을 골라 짐의 신부에게 목도리를 해주는 걸 잊지 말도록. [귀족 1] 폐하, 정말 대단하십니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맹수를 잡으시다니! [귀족 2] 곰이라니, 저는 멀리서 그 그림자만 보고도 벌벌 떨다 도망쳤을 겁니다. [귀부인] 타고난 제왕의 기운 앞에 대자연마저 무릎을 꿇는군요. [귀족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귀족들의 노골적인 아침을 받으며 우리는 별궁으로 돌아갔다. -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후원에 들어선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에 파묻혔던 얼음 정..
2024.02.12 -
7화. 폭군
황실 별궁에 도착하자마자 이상한 광경을 마주했다. 수갑과 족쇄를 찬 마법사들이 노역 중이다. [로샤] 흐음. 사냥터 청소는 완료된건가? 좋아. 사냥 후 후원에서 성대한 만찬을 열 테니, 저놈들에게 정리를 맡겨라. 알고 있겠지? 저녁에슨 봄처럼 싱그러운 꽃들이 만발해있어야 할 것이야. 마법사 한 명이 로샤의 앞으로 나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마법사] 폐, 폐하! 저희는 방금까지 사냥터의 눈을 치우느라 대부분의 마력을 소진했습니다. 또다시 마력을 사용한다면 위험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폐하, 부디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마법사는 머리를 조아리며 에원했지만 로샤는 더없이 싸늘했다. [로샤] 자비는 이미 베풀 만큼 베풀었다. 제국을 배신한 네놈들을 척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말이야. 염치라는 게 있다면 목숨..
2024.02.12 -
6화. 아침 사냥
똑똑! 탁! ...싫어. 시끄러위. 누가... 내 얼굴을 치는 것 같은데?! [나] 헉! 로샤?! [로샤] 나는 아주 귀족적으로 그대의 머리 맡을 두드렸지만 일어나지 않더군. 20분동안 손이 빨개지도록 두드렸는데. 커튼 속에서 꿈쩍도 안하길래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했지. [나] 아, 아니. 그럼 부르면 되잖아요!! [로샤] 싫은걸. 만일 문 밖에서 누군가 짐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온 황성이 수군대겠지. 황제가 예쁜 아내를 얻고서도 매일 소파에서 잔다고. 자,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빨리 일어나도록. 오늘은 사냥을 나갈거다. 사냥이라... 말을 타고 교외로 사냥을 나가는 것은 에르세르 귀족들의 전통 오락활동이라고 어제 본 책에 씌여있었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한가롭게 놀러다니는 건 좀... [나] 혹시 그것도..
2024.02.12 -
5화. 실버나이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세상에... 뭐야, 나 늦잠 잔 거야? 아무래도 독한 술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었다. 이 심각한 상황에 팔자 좋게 늦잠이라니, 말도 안 된다. 로샤가 얼마나 비웃을까. 정말 한심해. 한숨을 푹 쉬고서 옷을 갖추고 휘장을 걷었다. 그런데...어라? 로샤 역시 잠들어 있었다. 옆으로 누워 우아하게 자는 모습이 역시 귀족은 다르구나 싶었다. 그러나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조금 안쓰럽게도 느껴졌다. 더 자게 두고는 싶지만, 황제의 늦잠은 여러모로 곤란하겠지. 정중히 깨워야겠어. 나는 숨을 죽이고서 살금살금 그에게 다가갔다. [로샤] 누구냐! [나] 아, 미안해요. 일어날 시간이 지난 것 같아서 깨우려던 참이었어요. 무시무시한 검이 똑바로 내 목을 겨누고 있었..
2024.02.12 -
4화. 동맹
자객을 쓰러뜨린 나는 연회장으로 달려가다 카이로스 일행과 마주겠다. 카이로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서둘러 테라스로 향하려던 참, 로샤가 나타났다. [로샤] 왜 그렇게 당황하지? 혹시, 짐이 자객에게 당했을까 걱정이라도 한 건가? [나] 괘, 괜찮으세요? [로샤] 저런 피라미들에게 내어줄 것은 털끝 하나도 없다. 잔당은 호위병들이 정리하고 있으니 그런 표정하지 마라.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군. 로샤는 환하게 웃으며 성큼 다가오더니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샤] 그렇게나 걱정해주다니, 고맙다. 그리고... 그대의 머리카락에선 좋은 향기가 나는군.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상황이라니, 나는 어찌할 줄 몰라 얼굴을 푹 숙였다. [로샤] 카이로스 경, ..
2024.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