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세르 대륙(完)(117)
-
21화. 결단
내 예상이 맞았다. 내가 없는 곳에서 카이로스가 홀로 맞았을 마지막 순간이었다. 수면 거울로 알로라를 보고 있는 그의 푸른 눈에 참담한 빛이 어렸다.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낸 카이로스는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단풍잎 두 장... 내가 준 단풍잎들에다 마법을 걸어 여태까지 간직하고 있었구나. 카이로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내게 했던 약속이겠지. [카이로스] 통로가 개방된 지 제법 오래... 신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순 없어. 이어진 양쪽 세계가 다 무너지기 전에 내가 나서야 한다. 강림 의식은 치르지 못하게 됐지만, 시공의 통로가 열렸으니 방법은 있다. 내가... 가겠다. 모든 것을 짊어지고, 내가 갈 것이다. 미련은 없다. 끝내 너를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 글..
2024.03.24 -
20화. 희생
다시 만난 카이로스는 내게 가장 익숙한 모습이었다. 마탑의 대마법사. 그는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다. 오로지 목표만을 위해 살아가는 냉혈한. [로샤] 카이로스 경, 감옥에서 호레스라는 자를 꺼내갔다더군. 상당히 질 나쁜 중범최자라던데, 그런 놈을 왜 데려갔지? [카이로스]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으니 선황의 피를 주입해 고위 마법사로 만들어볼 생각 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카이로스를 보며, 로샤는 헛웃음을 흘렸다. [로샤] 나도 나지만... 가끔 경을 보면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나 싶어 놀라워. 아버님은 어린 나를 불러놓고서 마법사 카이로스가 얼마나 숭고한 영혼을 지닌 이인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곤 하셨다. 그런 경이 나의 황위 찬탈을 돕고 선대 황제를 마탑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니. 아..
2024.03.24 -
19화. 역설
다시 만난 카이로스는 한결 성숙해져 있었다. 그의 외모와 태도에선 위엄이 느껴졌다. 카이로스는 북부 스나이트 성의 주인인 페리와 손을 잡은 듯했다. 페리의 금발과 투명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보는 순간 곧바로 로샤가 떠올랐다. 부자는 눈빛마저 닮아 있었다. [페리 공작] 얼음 나비가 북부 전역에 퍼지고 말았다는 소식을 몇 번이나 전했건만, 친애하는 황제 폐하께선 여름이 오면 다 해결될 테니 그저 기다리라고만 하더군. 친동생 이지만 한심한 녀석 이지. 제가 놀고먹는 황성은 따뜻하고 평화로우니, 변방의 일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거다. 그래도 천성은 선한 놈이라 믿고 황위를 넘겼건만 저렇게 무책임할 줄은 몰랐다. 이런 상황에 카이로스 그대가 내 편에 서준 건 천운이야. [카이로스] 성주님을 제외한 황족은 모두..
2024.03.24 -
18화. 눈보라
카이로스는 고요해진 설원을 가만히 바라봤다. [카이로스] 아무것도 안 남았군. 그 말이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미하는지, 다른 뜻이 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눈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카이로스는 홀로 중얼거렸다. [카이로스] 이런 건... 전혀 예상 못 했는데. 그들을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슨 말을 할지, 그런 것만 줄곧 생각했거든. 원망하고 비난할까, 아니면 용서하고 축복할까. 혹시 주책없이 반가워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만 했지. 하지만 다 상관없어졌네. 조금... 허무한걸. 카이로스는 탈진해 눈밭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얼음 나비가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이렇게 추운 곳에서 정신을 잃으면 위험해. 마음이 ..
2024.03.24 -
17화. 아이리스 마을
세월이 제법 호른 것 같다. 마을에 들어서는 카이로스의 뒤를 많은 이가 따르고 있었다. [촌장] 카이로스 님, 어찌 이 누추한 곳을 다 방문해주셨는지요. [소년] 그 유명한 마법사 카이로스 님을 직접 만나다니! 일마 전에 사냥꾼 아저씨가 카이로스 님의 도움을 받았다면서요? [사냥꾼의 아내] 그래. 카이로스 님이 아저씨를 얼음 나비로부터 구하고 치료까지 해주셨지. 우리 가족의 은인이시란다. [소년] 정말 멋져요! 저도 커서 카이로스 님처럼 얼음 나비도 해치우고 사람들을 돕는 마법사가 될래요! 사람들의 칭송에 카이로스는 어색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카이로스]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때의 카이로스는 웃을 줄도 알고 꽤나 상냥해 보인다. 조금 신기하네. 그는 강해져 다른 이를 돕겠다던 약속을 착실하게 ..
2024.03.23 -
16화. 살고자 하는 욕망
카이로스가 눈치 못 채게 몰래몰래 얼음 나비를 처치했지만, 카이로스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잠깐! 카이로스의 손등에... 얼음 결정이 맺히고 있잖아? 폭주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어! 카이로스는 마법사, 그것도 동료가 얼음 나비로 변하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듯했다. 그와 동시에, 그간 처치했던 얼음 나비들 중에 마법사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폭발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그의 몸도 통제를 벗어났다. 카이로스의 폭주를 막아야 한다. 안 그러면 영영 기회는 없다. >카이로스에게 네 욕망을 떠올려보라고 속삭인다. 더보기 급박한 찰나, 카이로스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법사의 정신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욕망. 카이로스를 욕망에 집중하게 하면 마력도 제어할 ..
2024.03.23 -
15화. 소년시절
다시 만난 카이로스는 앳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설원을 누비며 동료 마법사들과 함께 얼음 나비를 사냥 중이다. 현상금 사냥꾼이 된 카이로스는, 북부의 한 귀족으로부터 얼음 나비를 퇴치하고 경작지를 지켜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상당히 위험한 의뢰였지만,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만큼 보수는 넉넉했다. 카이로스는 그와 비슷한 또래의 마법사 두 명을 동료로 두고 있었다. [카이로스] 이나! 드레이크! 북쪽 숲 입구에 마법진을 설치해. 나머지 세 군데는 내가 맡지. [드레이크] 알았어, 대장! 이나라는 마법사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웃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카이로스] 이나? [이나] 가, 아무것도 아니야. 마을 의원이 별 이상 없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드레이크, 어서 가자.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난 뒤, ..
2024.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