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마탑

2024. 3. 1. 21:41에르세르 대륙(完)/전승의 장 (카이로스)

 ​가시 덩굴과 장미꽃이 늘어진 새장 안. 에르세르 황궁이다. 만면에 미소를 떤 로샤가 흥미로운 듯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최대한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나]

폐하,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로샤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푸른 눈에 당혹감이 스졌다.

 

[로샤]

초면부터 대뜸 독대를 청하다니. 당돌한 신부로다. 

 

[나]

독대는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지요, 폐하. 이 자리에 동석했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어둠 속을 똑바로 가리켰다. 조명이 닿지 않는 그곳엔 카이로스가 있다. 

 

[나]

에르세르 대륙 최강의 대마법사, 카이로스. 

 

[로샤]

으음? 카이로스를...? 취향이 제법 독특하군. 그보다, 그대가 어떻게 카이로스를 알지? 뭔가 있군 그래. 

 

 로샤의 얼굴에서 마침내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나를 관찰했다. 

 

[나]

폐하, 제게 쏟아주시는 관심은 감사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에르세르 인들을 구하기 위한 강림 의식이 월계절에 치러질 예정이고, 저는 그날의 제물이라는 것을 알아요. 

 

로샤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로샤]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을 낱낱이 고하라. 

 

[나]

폐하는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폭군이 아니세요. 모두를 살리고자 기꺼이 손에 피를 묻혔고, 강림 의식에서 순국할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로 신민들을 아끼신다는 것도 알아요. 저를 인형으로 대하지 말아주세요. 그러면 저는 폐하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 될 것입니다. 저 역시 폐하처럼 에르세르를 재앙으로부터 구하고 싶어요. 

 

 로샤는 눈을 가늘이더니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응시했다. 그는 경계를 거두지 않은 채 입을 뗐다. 

 

[로샤]

이상한 일이로군. 어떻게 나는 물론, 에르세르에 대해서도 그렇게 잘 알고 있지? 

 

[나]

에르세르에 온 게 처음이 아니니까요. 제겐 시공을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월계절도 숱하게 겪었고, 수없이 많은 미래도 봤죠. 

 

 당연히 비웃겠지. 거짓말 말라고 화를 내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로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무섭도록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나]

제가 봤던 미래들은... 무척 끔찍했어요. 세상은 폭설에 묻혀버렸고, 대륙의 모든 사람은 얼어붙었죠. 도망칠 곳이 없어진 여러분 중 몇 명은 제가 사는 세계로 넘어와, 그곳 사람들의 육체와 생명을 빼앗기도 했어요.하지만 그 세계에서도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어요. 폐하께선 밀리 선생님을 지키고 싶으셨을 거예요. 그래서 그녀를 황성 밖으로 내보냈지만... 그분이 탄 마차는 얼음 나비로부터 공격을 받았죠. 그리고 결국...

 

 로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간의 여정에서 나는 밀리를 여러 번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살아남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비단 그녀뿐이 아니다. 둥지가 무너지면 그 속의 알도 무사할 수 없는 법. 밀리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로샤가 반드시 동요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로샤는 마침내 인상을 찌푸리며 차갑게 내뱉었다. 

 

[로샤]

다음 말은 신중히 골라야 할 것이다. 짐의 심기를 이미 상당히 많이 건드렸거든. 만약 단 하나라도 거짓이 섞여 있다면, 엄벌을 내릴 것이다. 

 

 과연 밀리의 이야기는 양날의 검이었지만, 효과가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로샤는 냉정히 분석하고 판단하려 애썼다. 

 

[나]

제가 본 미래들을 모두 말씀드리기 전에, 이 자리에 함께해아 할 사람이 더 있어요. 집행인 부대 사령관이자 황태자인 아인, 그리고 고위 마법사 알카이드를 불러주세요. 폐하, 카이로스, 아인, 알카이드. 네 분은 에르세르의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어요. 믿어주세요. 저는 여러분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여기에 왔어요.  

 

 로샤는 굳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슬슬 불안해졌다. 혹시 인내심을 잃은 걸까. 

 

[카이로스]

죽음을 모면 하고자 급조한 헛소리로군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에 일일이 귀 기울이지 마소서. 

 

 그럼 그렇지. 카이로스는 로샤가 흔들릴까, 극도로 경계했다. 나는 고개를 홱 쳐들고 카이로스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나]

위대한 대마법사라면서 어쩜 그리 편협한지 모르겠네요. 나를 이런 곳에다 가둬두면 문제가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하나요? 실버나이트가 얼마나 막강한지, 당신도 나만큼이나 잘 알텐데요. 알다시피, 황궁 곳곳에도 그의 첩자가 숨어들어 있죠. 내가 혹시 마음을 바꿔 실버나이트 쪽에 선다면 어떨까요? 당신들의 정보나 계획을 전부 그에게 전해준다면? 그래도 정말 괜찮겠어요? 

 

나는 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카이로스]

최고 차원의 감시를 붙여줄 테니 그렇게 안달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 시끄러운 입은 내가 손을 쓰기 전에 직접 다무는 게 좋을 것이다. 

 

 아오, 카이로스! 아무튼, 두고 보자고. 나 혼자선 당신을 절대 못 이길 걸 알기에 이 작전을 택한 거니까. 아니나 다를까, 로샤가 손을 들어 카이로스를 제지했다. 

 

[로샤]

카이로스 경. 물론 저 말을 다 믿을 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리따운 숙녀의 입을 거칠게 들어막는 건 너무하지 않나. 

 

 로샤는 아인과 알카이드를 회의장으로 데려오도록 시종에게 지시했다. 그리곤 카이로스를 차분하게 설득했다. 

 

[로샤]

일단 끝까지 들어보지. 결정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듯하네. 

 

 잠시 후 나는 삼엄한 감시하에 회의장으로 이동했다. 이윽고 알카이드와 아인도 나타났다. 설린을 잃은 알카이드는 그늘져 있었고, 아인은 내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했다. 나는 짧은 인사를 건넨 뒤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실패로 돌아갔던 나의 지난 여정들을 세세하게 풀어놓았다. 개개인의 사연도 빼놓지 않았다.

 알카이드에게는 설린의 희생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며, 옛 친구인 책이 반란군으로 넘어가 위태롭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인에게는 그의 고뇌와 번민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그의 곁에서 생사를 함께하는 집행인 동료들을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샤의 눈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뛰어넘는 그의 의지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바가 오직 에르세르 대륙의 봄임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여러분 모두에게 지키고 싶은 사람, 혹은 신념이 있다는 걸 알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제 고향, 그리고 에르세르의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해요. 우리가 만들 미래에는 아무런 절망도 없었으면 해요. 봄을 되찾고 모두 행복하게 지내도록 해주고 싶어요. 

 

나는 네 사람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생각에 잠긴 알카이드, 여전히 무관심한 아인. 심각한 표정의 로샤, 무표정한 카이로스. 과연 통할지. 긴장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알카이드가 가장 먼저 응답했다. 그는 따스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알카이드]

저는 돕겠습니다. 

 

알카이드는 카이로스에게 묵례했다. 

 

[알카이드]

예하. 이분으로부터는 차원이 다른 빛이 느껴집니다. 이아기에서도 허점을 찾을 수가 없군요. 물론 황당하지만, 그건 마법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복잡하고도 가슴 아픈 사연들은 모두 이분이 직접 겪은 일로 보입니다. 그런 큰일을 홀로 겪었음에도 그녀는 끝까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지요. 도울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인]

그딴 거 모르겠고. 하지만... 의미 없이 개죽음 당하기는 싫어. 계획이 있다면 들어나 보지. 

 

로샤가 가법게 웃음을 터뜨렸다. 

 

[로샤]

천하의 아인마저 뛰어들었는데, 짐이 나서지 않을 수 없지. 시원하게 말해봐라. 우리가 월 도와줬으면 하지? 

 

[나]

지금까지 거의 모든 가능성을 조사하고 확인했어요. 딱 한 군데... 마탑만 빼고요. 

 

[카이로스]

거절한다.

 

 내내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카이로스는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차갑게 내뱉었다. 

 

[카이로스]

뜬구름 잡는 소리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걸 순 없다. 네 말이 전부 사실이라 해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은 애초 너에게는 무리라는 뜻이겠지. 유일한 해답은 강림 의식이다. 이 시간부로 신녀를 격리 감금하고 면회를 일절 금하겠습니다. 

 

 카이로스가 내게 다가오자 아인이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옮겼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알카이드가 나셨다. 

 

[알카이드]

예하. 한 번만 더 재고해주실 순 없겠습니까? 

 

로샤가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로샤]

이걸 어쩌나. 의견이 맞질 않는데... 한바탕 싸움이라도 일으킬 기세로군. 그러다간 짐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겠지. 그러니 절충안을 제시하겠다. 이세계의 신녀를 마탑에서 감시하면 어떻겠나. 

 

[카이로스]

안됩니다.

 

[로샤]

왜지? 혹시, 마탑에다 경의 치부라도 숨겨둔 건가? 대륙 최강의 대마법사가 가녀린 여인을 두려워하는 건 아닐 테고...

 

[카이로스]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카이로스가 싸늘한 눈빛으로 로샤를 건너다봤다. 로샤는 일부러 카이로스를 자극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대륙 최강 마법사는 고집도 대륙 최강인지 세 사람이 다 붙어도 카이로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여기서 반드시 카이로스와 담판을 지어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아니, 오히려 더 무시당할 수도 있겠지. 나는 세 사람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직접 해결해야만 한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카이로스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당당히 그를 올려다보며 도발했다. 

 

[나]

당신은 날 두려워하는 게 확실하군요. 내가 가진 힘이 마법과는 달라 경계하는 건가요? 그렇지 않다면 날 피할 리가 없죠.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거든 폐하의 절충안을 받아들여요. 나를 마탑으로 데려가 대마법사께서 직접 감시하시면 되잖아요? 

 

[카이로스]

협상 예절을 단단히 잘못 배웠군. 게다가 나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고 말이야.

 

 카이로스는 여전히 자신만만하고 싸늘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카이로스]

네 눈앞의 상대는 혼자 힘으로 마탑 전체를 제압하고도 남으니 건방 떨지 마라. 조무래기 따위와는 협상하지 않는다. 

 

[나]

당신이 강한 건 알겠지만,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당신이 가장 신뢰하는 제자까지 이렇게 나서는데 이 사람들의 마음을 무시할 생각인가요? 조무래기라고 하셨는데, 제가 수중에 카드도 없이 대마법사에게 싸움을 걸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죠? 정 믿을 수 없으시다면 직접 겨뤄보죠.

'에르세르 대륙(完) > 전승의 장 (카이로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6화. 마법사의 비밀  (0) 2024.03.01
5화. 정신력의 근원  (0) 2024.03.01
4화. 휴전  (0) 2024.03.01
3화. 단풍나무  (0) 2024.03.01
1화. 운명의 윤회  (1) 2024.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