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역설

2024. 3. 24. 00:30에르세르 대륙(完)/전승의 장 (카이로스)

 다시 만난 카이로스는 한결 성숙해져 있었다. 그의 외모와 태도에선 위엄이 느껴졌다. 카이로스는 북부 스나이트 성의 주인인 페리와 손을 잡은 듯했다. 페리의 금발과 투명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보는 순간 곧바로 로샤가 떠올랐다. 부자는 눈빛마저 닮아 있었다. 


[페리 공작]
얼음 나비가 북부 전역에 퍼지고 말았다는 소식을 몇 번이나 전했건만, 친애하는 황제 폐하께선 여름이 오면 다 해결될 테니 그저 기다리라고만 하더군. 친동생 이지만 한심한 녀석 이지. 제가 놀고먹는 황성은 따뜻하고 평화로우니, 변방의 일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거다. 그래도 천성은 선한 놈이라 믿고 황위를 넘겼건만 저렇게 무책임할 줄은 몰랐다. 이런 상황에 카이로스 그대가 내 편에 서준 건 천운이야. 
 
[카이로스]
성주님을 제외한 황족은 모두 썩은 지 오래지요. 
 
[페리 공작]
10년 전 괴생명체 발생에 선제대응하기 위해 북부로 자원해 왔을 때만 해도, 상대가 이렇게 막강한 재앙일 줄은 몰랐어. 내가 황위를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길... 제국의 영토가 재앙에 휩쓸리고 신민들이 죽어나가는데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는다니, 이런 황실이 대체 어딨단 말인가! 얼음 나비의 확산세는 무서울 정도다. 내가 구축해둔 방어선이 곧 무너질 텐데, 황성과 남부도 위험해지는 건 시간문제야! 
 
 페리는 분노를 참지 못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카이로스]
성주님, 우리 힘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얼음 나비에 대항하는 마법사들이 각지에서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얼음 나비의 확산세는 점점 더 강해지기만 하는 게 의심스럽습니다.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문제의 근원을 찾아봐야겠습니다. 
 
페리가 눈을 빛냈다. 
 
[페리 공작]
카이로스,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나? 최대한 협조하지. 
 
카이로스는 창밖의 설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카이로스]
밀실을 하나 내주십시오.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얼음 창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추운 지하실이었다.


 카이로스는 제 한 손에 수갑을 재웠다. 그리고 수갑의 다른 한쪽을 돌기등에다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런 뒤,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가슴 한복판을 주저 없이 그었다. 안돼!!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카이로스는 언제나 냉정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저렇게 하는데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숨을 죽였다. 카이로스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
 얼음 나비 몇 마리가 카이로스의 상처 사이로 비집고 나와 팔락팔락 날아올랐다. 카이로스는 험오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얼음 나비를 노려보다 손을 들어 그것들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살폈다. 무슨 일인지, 카이로스의 상처에선 더 많은 얼음 나비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얼음 나비의 개체수가 줄어들면 마법사의 몸 안에 숨어 있는 나비들이 위험을 느끼고 더 많은 수의 얼음 나비를 발생시기는 것 같다.


 역설적이다. 얼음 나비를 없앨 수 있는 존재는 마법사뿐. 그러나 마법사가 존재하는 한 얼음 나비는 없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이 생겨나게 된다. 마법사가 폭주하면 얼음 나비가 된다는 것까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사정까지는 몰랐었다.
 카이로스의 낯빛이 무섭도록 창백해졌다. 문제가 생긴 게 들림없다. 상처를 통해 얼음 나비들이 계속 빠져나오고 있는데도, 카이로스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안 돼, 이대로 가면...! 
 
 
>큰 소리로 카이로스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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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6. 과거의 변동

 

 다급해진 나는 카이로스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가 메마른 눈동자를 돌려 날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던 순간, 갑자기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뒤틀려갔다. 그가 날 보고 정체를 알게 되어 인과가 뒤섞여버린 것이다. 어둠이 몰려오기 직전, 수많은 얼음 나비가 카이로스의 몸을 뚫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실패했다. 나는 어둠 속을 영원히 헤메게 되겠지.

 

END.

>페리가 눈치채고 달려와 돕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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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하지? 절대 내가 직접 개입해선 안 돼. 분명 인과가 틀어질 거야. 일단 페리 성주를 불러오자. 그는 카이로스를 도와줄 수 있을 거야. 나는 밀실 문을 열고 일부러 통로 쪽에다 얼음 나비를 몇 마리 풀었다. 

 

[시녀]

지하에 얼음 나비가 나타났어요! 

 

[페리 공작]

마법사들을 불러 처리해! 그리고 누구도 지하 밀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라! 

 

-

[페리 공작]

카이로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카이로스]

성주님, 제 몸으로 직접 실험해보았습니다. 마법사가 얼음 나비를 없애면 마법사의 몸 안에선 더 많은 얼음 나비가 생성 되는군요. 얼음 나비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마법사인 한, 아무런 방도가 없습니다. 이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 성주님, 제가 완전히 얼음 나비로 변하기 전에 처리해주십시오.

 

 그새 다소 평정을 되찾았는지, 카이로스는 마법으로 상처를 들어막고 있었다. 페리가 다칠까 봐 극도로 조심하고 있는 듯했다. 억지로 빠져나오려는 얼음 나비의 날카로운 날개에 손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카이로스는 조용히 고통을 감내할 뿐이었다.

 페리는 비장한 표정으로 검을 들더니 카이로스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한 줄기 검광이 허공을 가르는가 싶더니 얼음 나비의 날개가 산산이 부서지며 공중에 흩날렸다. 페리는 카이로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카이로스에게로 다가가 얼음 나비들에 맞서 싸웠다. 얼음 나비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바람에 페리는 팔에 부상을 입었다. 허공에 흩뿌려진 페리의 핏방울이 카이로스에게로 튀었다.

 그런데 카이로스의 상처에 페리의 핏방울이 닿자마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작은 얼음 나비들의 움직임이 잦아들더니 한데 엉키며 큰 나비로 변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카이로스의 상처가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아물어갔다. 그 어떤 치유마법보다도 월등한 속도였다. 그 광경을 본 페리는 반색하더니 망설임 없이 제 팔뚝에다 상처를 더 내 카이로스의 회복을 도왔다. 

 

[페리 공작]

카이로스, 우리는 동료다. 끝까지 그대를 도울 테니, 그대도 나를 도와다오. 

 

 페리는 간절한 눈으로 카이로스를 바라보았다. 페리 성주에게는 황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거대한 감정의 힘이 깃든 황족의 피가 카이로스에게로 전해지며 새로운 자원의 힘을 구축하고 있었다. 페리는 카이로스를 향해 다시 한번 절박하게 말을 이었다. 

 

[페리 공작]

카이로스, 긴 싸움은 있어도 영원히 이어지는 싸움은 없다.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는 법이야. 나는 굳게 믿는다. 우리가 있는 한, 에르세르는 끝까지 무사할 것이다.

 

 카이로스는 페리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 카이로스의 눈동자에 문득, 이전과는 다른 빛이 어렸다. 페리는 간절함을 증명이 라도 하려는 듯, 계속해서 자신의 피를 카이로스의 상처 위로 흐르게 했다. 카이로스는 조심스레 페리의 팔을 밀어내고서 옷매무새를 고쳤다. 

 

[카이로스]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성주님. 어서 치료를 받으시지요. 

 

 페리는 신뢰 가득한 눈으로 카이로스를 바라보다 이내 밀실을 나갔다. 카이로스는 벽에 기댄 재 눈을 감았다. 사방은 어둡고 고요했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카이로스]

네가 거기 있다는 걸 안다. 방금 있었던 일로 예상치 못했던 변화가 생겼다. 지금껏 본 적 없던, 거대한 얼음 나비가... 내 몸 안에 자리잡았어. 녀석의 폭발적인 힘을 또렷이 느낄 수 있다. 녀석의 끝없는 욕망과 추악한 본능까지도. 이런 걸 풀어놓을 순 없으니 내 안에다 봉인하는 수밖에 없겠지. 허나... 이 녀석에게 지는 순간 끝이다. 어쩌면 나는, 대륙을 멸망시킬 괴물이 될지도 몰라. 

 

[나]

당신은 괴물이 아니에요. 당신이라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어요. 약해지지 말아요.

 

[카이로스]

......순진한 소릴 하는군.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괴물은 절망이나 두려움 따위 느끼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나는 계속 살아날 거야. 네가 기대하는 모습은 아니겠지만. 

 

카이로스는 제 상처 위로 봉인 마법진을 필치며 말을 이었다.

 

[카이로스]

이 마력을 이용하면 나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가 될 수 있겠지. 그래. 기꺼이 괴물이 되겠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싸우겠다. 나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재앙으로부터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 

 

카이로스는 눈을 감은 채 나를 향해 손을 내밀 었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카이로스]

나는 행복이 뭔지 몰라. 감히 바란 적도 없었다. 그러나 너는... 너만은 부디 행복하길 바란다. 네가 누구인지, 이 대륙의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나는 몰라. 그러니... 에르세르를 지키마. 

 

[나]

카이로스... 당신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카이로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으라고 줄기차게 에기해온 나지만, 지금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책임과 끝없는 고통, 절망, 그 전부를 견디며 살아가라는 건 너무나 가혹하니까. 하지만...

 

[나]

내가 갈게요. 반드시 당신을 찾을 거예요. 힘들겠지만 조금 더 기다려줘요. 

 

 다시 만나기 위해선, 이 고통을 넘어서야만 했다. 그도, 그리고 나 역시도. 나아가자. 나아가는 수밖에 없어. 

 

>20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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