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세르 대륙(完)(117)
-
17화. 기다림의 밤
하루가 다 가도록 아인을 만나지 못했다. 그 덕에 나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난번의 시공 여행에서 본 바로, 아인은 월계절 당일 로샤에게 복수를 감행하려 했다. 당시에도 그는 아마 반란군과 손잡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인은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아인은 누구에게 공격받은 걸까. 황실 사람? 아니면...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 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도로 그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밤은 깊어가는데 아인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겨우 하루 못 봤는데 이렇게 심란해지다니. 월계절은 점점 다가오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자니 너무도 답답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인은 오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문득, 아인이 새 임무..
2024.02.10 -
16화. 불
별궁으로 돌아온 아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놀라울 정도로 나와 체구와 생김새가 비슷한 시녀를 데리고 왔다. [아인] 이 집행인 부대 망토를 걸쳐. 네가 걸치고 왔던 겉옷은 저 시녀에게 입히고. 서둘러. 아인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출발한 마차가 별궁 앞마당을 나서기도 전이었다. 측면 숲지대에서 마법을 이용한 기습 공격이 들어왔다! 나를 노린 암살 시도였을 거란 생각에 온몸의 털이 바짝 일어났다. - 마차로 달려가던 길, 부상당한 시녀가 실려 가는 것을 보았다. 새하안 눈밭엔 그녀가 흘린 피가 낭자했다. 그 마차 안에 타고 있을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 저 사람, 나 대신 다친 거죠? 말도 안돼... 나 대신... [아인] 네가 괴롭다는 건 잘..
2024.02.10 -
15화. 비밀 작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가웃했다. 황후 침전에 딸린 곁방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 [시녀] 전하, 아니 되십니다! 제발 돌려주세요. 귀하신 분께서 어찌 이러십니까. 지극히 수상한 대화... 대체 뭐지? 혹시나 싶어 문고리를 돌렸는데, 여태껏 한 번도 꿈쩍 않던 손잡이가 돌아갔다. 문을 벌컥 열자, 아인은 무릎 위에다 드레스를 펼쳐놓고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저건... 로샤가 준 드레스? [시녀] 이런 건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이에요, 전하. 제발 돌려주세요. 나는 시녀를 적당히 달래 내보내고 그가 작업을 끝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나] 굉장한 솜씨네요. 감탄했어요, 진심으로. 고개를 든 아인의 어색한 표정을 나는 일부러 못 본 척했다. [아인] 옷을 짓는 게 어렵지..
2024.02.10 -
14화. 계승의 검
반전은 없었다. 침입자는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마법사와 호위병은 역모자의 유족으로, 황실과 아인에게 깊은 원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아인의 반응을 보니 암살 시도가 처음은 아닌가보다. 그런 아인의 목표도 결국은 복수가 아니던가. 얼음 나비라는 재앙이 초래한 증오와 원한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아인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이런 일을 겪고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 저들의 동료가 더 있는지 확인해봐야겠어요. 아인은 손을 들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인] 아니. 황실에 원한을 가진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아. 그러니 복수하려는 자들을 다 없애기란 불가능해. 그래서도 안 되고. 지금은 로샤를 끌어내린 뒤 에르세르를 재건하는 것만 생각한다. - 황궁에 도착하자 아인은 날 침실로 데려다주..
2024.02.10 -
13화. 지하성
곰은 온 계곡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포효하며 돌진했다. 아..., 나 고작 이런 식으로 죽는 거야? 찰나, 아인과의 검술 수업이 떠올랐다. [아인] 아무리 몸집이 큰 상대라도 급소를 찔리면 절대 저항하지 못한다. 차분히 목표를 조준하고 힘을 집중해. 그러면 반드시 이길 수 있어. 나는 곰의 심장에 공격을 퍼부었다. 할 수 있어. 나는 해낼 거야. 아인이 말했던 대로, 반드시 이기고 말 거야.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 내 발밑에 납작 엎드린 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잡은 곰까지 더해져, 사냥 전리품은 아주 풍성했다. [주니] 두목! 땔감 다 모았어요! 아까 그 주니라는 소년은 한가득 지고 있던 나뭇짐을 내려놓고서 곰을 해체하는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주니는 감탄을 연발했다. [주니] ..
2024.02.10 -
12화. 의심과 믿음
눈을 뜨니 벌써 아침이다. 방에는 눈부신 햇살이 가득했다. 얼마나 깊이 잤던지 정신이 몽롱했다. 문득, 지난밤의 일이 꿈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러나 내 손엔 밤새 꼭 쥐고 잤던 아인의 손수건이 있었다. 아아, 다행이다. 꿈이 아니었어! 아침 채비를 마치자마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아인이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그는 병사들을 대동하고 서 있었다. [아인] 폐하와의 조찬에 그대와 내가 초대되었다 오늘뿐 아니라 매일 참석하라는 명을 내리셨다는군. 그의 말투는 더없이 사무적이었다. 나는 얼른 아인과 눈빛을 교환한 뒤 그를 따랐다. - 자리 배치는 예상대로였다. 나는 로샤의 바로 옆이고, 아인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았다. [로샤] 음식은 입에 맞나? [나] 네, 아주. 내 ..
2024.02.10 -
11화. 달빛 아래의 검
아인이 내 방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가 저녁식사를 가지고 왔다. 잘 차려진 식사에도 식욕은 일지 않았다. 아인을 생각하니 허기도 모르겠다. 나는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냅킨을 집어 들려던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평상시와는 달리 화려한 냅킨이었다. 이건 손수건 같은데...? 나는 조심스레 그 천 조각을 펼쳐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엔 '정원에서 기다릴게.'라는 문장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애써 숨을 고르며 시녀를 불렀다. [나] 복도에서 혹시 누굴 봤나요? [시녀] 네? 아인 전하를 제외하곤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짐작한 대로다. 나는 누가 볼까 얼른 손수건을 접어 숨겼다. 시녀가 식사를 거뒤 간 후,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정원에서 기다릴게...
2024.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