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세르 대륙(完)(117)
-
3화. 동맹
신뢰를 쌓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환된 내 그림 소울은 아인이 보는 앞에서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내 최강의 무기이자 최후의 비밀을 다 내보인 것이다. 내가 지면 아인은 나를 로샤와 카이로스에게 넘길 것이다. 하지만 이긴다면 희망은 있다. [나] 내가 이겼으니 내 제안을 받아들여줘요. [아인]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성격이 급하군. 그는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망토 자락을 휘날렸다. 그가 내던진 도끼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 무시무시한 검광이 번뜩였다. 뭐야! 숨겨둔 무기가 있었어?! - 목덜미에 닿은 검신을 통해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전해졌다. 결코 겁을 주기 위해서 떠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명백한 살기. [아인] 잘도 떠들더니, 이제야 입을 다무는군. 나는 양손을 번쩍 들었다. [나] 내가..
2024.01.23 -
2화. 도박
뭐, 뭐라고? 나는 당황해 내게 손을 뻗은 집행인을 제압해버렸다. 아인은 흥미로워하며 팔짱을 낀 채 구경 중이다. 그는 내가 자객을 상대하던 모습을 보았던 게 틀림없다. 돌연 아인이 한 손을 들자 집행인들은 일제히 공격을 멈췄다. 그는 부하들을 물리며 뚜벅뚜벅 내게 다가왔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이다. 알카이드가 한 발짝 나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알카이드] 사령관이시여,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와 카이로스 예하의 명을 받들어 신녀님을 보호하는 중이니, 신녀님은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인] 황제의 이번 인형은 이름도 특이하군. 또 인형이라고 하네. [나] 그 인형조차도 못 이기는 부하들을 거느린 귀하께선 장난감 병정의 두목인가 보군요. 알카이드가 나서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아인은..
2024.01.23 -
1화. 원점으로
아인. 앳된 얼굴의 집행인 부대 사령관인 그를 마지막으로 본 건 강림 의식 때였다. 깊은 잠에 든 듯 조용히 누워 있던 그의 주위엔 온통 붉은 피의 꽃이 피어 있었다. 그 장면을 열 번 떠올리면 내 가슴은 스무 번을 타들어갔다.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와는 접점이 거의 없었기에, 그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의 최후조차 우연히 목격했을 뿐이다.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마음에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는 그를 되살리는 거다. 지난 여정에서 접한 건 이쪽 세계의 단편적인 조각들뿐, 나는 모든 진실을 알지 못한다. 집행인 부대, 반란군, 황실 그리고 마탑... 알카이드가 전에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아인은 황족이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생각하면..
2024.01.23 -
ED 2. 신생의 땅
숲에서 빠져나오자 에르세르 이주민들의 정착지가 나타났다. 강림 의식 이후로 제법 많은 시간이 홀렸지만, 생존자들은 아직까지도 그날 밤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알카이드와 나에 대한 목격담도 나왔다. 그러나 생존자 대다수는 이를 전설로 받아들였다. 마법사는 사라졌고, 아무도 우리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았으니. 유쾌한 목소리가 우리를 불렀다. [생존자] 머물 곳을 찾고 있나요? 그럼 여기로 와요! 나와 알카이드는 이 마을에 잠시 머무르기로 했다. 처음부터 삶의 터전을 일구느라 모두 분주했다. 며칠 후.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면서 물물교환의 장이 생겨났다. 내가 땅 노점상 앞에서 발을 멈추자, 알카이드도 멈춰 섰다. [알카이드] 사고 싶어요? [나] 그렇긴 한데... 뭔가 바꿀 만한 게 없어서요. 알카이드..
2024.01.05 -
21화. 별의 구원
나는 주저앉아 하염없이 알카이드를 껴안고 있었다. 예상했었다. 저 수많은 별빛을 불러내기 위해 알카이드가 또다시 한계치를 넘는 마력을 소모할 것을. 중간에 분명 폭주의 위기도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를 지기겠다는 일넘으로 버텼겠지. 이제는 내가 알카이드를 지킬 차례다. 절대 그가 마법진에 희생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마법사와 얼음 나비의 힘의 근원이 같다면, 얼음 나비가 없는 세계엔 마법사도 존재할 수 없겠지? 알카이드가 잔혹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자유로워질 그곳으로, 나는 갈 것이다. 반드시 그를 데리고 가야만 한다. 알카이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의 안색은 무서우리만치 장백했지만, 다행히 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그를 끌어올렸다. 겨우 한..
2024.01.05 -
20화. 귀환
우리는 마침내 중앙광장에 도착했다. 어둠을 헤치고 마법사들이 속속 나타났다. 호레스가 먼저 우리를 발견했다. - 제대로 마주한 호레스의 마법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마지막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그는 평소와 다르게 진지했다. 호레스는 독기 서린 마법을 맹릴히 퍼부었지만, 매번 알카이드의 빛에 막혀 무력화되었다. 전보다도 안정적인 알카이드의 실력에 호레스는 놀란 듯했다. [호레스] 마력 폭주 상태에서 회복한 사람은 처음 본다. 독한 자식... 알카이드는 내 앞을 막아서며 더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카이드] 기억하나요? 마법사는 욕망으로 태어난다고. 날 믿어요. 내가 그토록 거대한 마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건, 당신을 구하려는 마음에서였어요. 그 되돌릴 수 없는 상태를 이겨내고 돌아온 것도..
2024.01.05 -
19-1화. 진실한 소원
내일은 월계절. 나는 아직 이 세계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 외면해봤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끝없는 눈보라일 것이다. 거기엔 행복한 미래 같은 것도 없겠지. 운명에 맞서야 한다. - 나는 안으로 들어가 알카이드의 손을 잡았다. [나]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내가 없어도 카이로스는 의식을 진행할 수 있는 것 같던데요. 그리고 강림 의식은 황제와 귀족만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지난번 여정에선 대륙의 모든 사람을 전송할 예정이었거든요. 알카이드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었다. 강림 마법진은 에르세르인 전체를 전송하기 위한 것이 맞았다. 황제가 백성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자신과 황족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황족의 피는 마법진의 필수..
2024.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