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테스트

2025. 1. 12. 21:49신운기원/경칩 편 (알카이드)

‘학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더 평온하고 냉담해 보였다. 나는 그의 눈동자 깊숙이 잠시 스치는 듯한 푸른빛의 그림자를 포착했다.  

 

지난 일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학자를 위해 한 공격을 막아내다가 나는 기절했고, 이후 그는 나를 타워로 데려왔다.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로지타]  

알카이드……  

 

나는 무심결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카이드?]  

실험이 종료된 후에는, 실험에 참여한 샘플은 보통 회수됩니다.  

 

실험…… 샘플?  익숙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학자의 상태였다. 그의 감정은 완전히 사라진 듯 보였다. 그는 이제 경화인처럼 보였다. 의식이 점점 돌아오며, 내 시야에 다른 풍경이 또렷해졌다.  

 

눈앞에는 밀폐된 실험실이 있었다. 거대한 투명 용기 안에서, 나는 익숙한 얼굴들을 보았다.  충격에 휩싸인 채로 학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조용히 설명을 덧붙였다.  

 

[알카이드?]  

운영이 끝난 프로세스는 정리해야 합니다. 그대의 세계에서 이것은 어렵지 않은 일.

 

[로지타]  

프로세스?  

 

그 단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의 살아 숨 쉬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붙이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추측이 떠올랐다.  

 

[로지타]  

당신은 이들을 모두 경화인으로 바꿔 타워 아래 복종시키려는 건가요?  

 

나는 거침없이 물었고 그의 눈을 주시했다. 그러나 학자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알카이드?]  

복종이든 반항이든, 그것들은 프로그램 내의 설계일 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용기마다 연결된 데이터 화면들이 켜지며 그들의 모든 과거 행동이 드러났다. 어떤 이는 미리 모여, 탄약을 운반하고, 뒷길을 막았다. 그 모든 과정은 한 치의 오차도 엇이 진행되었다. 옥상에서 전투를 벌이기 전의 일이다.

그들은 타워의 대변자. 즉 학자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고, 타워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즉, 이 모든 건 타워의 계산 하에 있었다는 것이다. 학자는 이에 대해 침묵을 선택했다. 그의 시선은 실험실 전체를 지나 스크린 속 영상, 그리고 나에게로 향했다.

 

[알카이드?]

규칙이 정해진 후의 세계엔 변수가 없지. 로지타, 그대 빼고는.

 

나는 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로지타]  

당신은 알카이드가 아니야.  

 

이것만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나는 소위 변수, 프로그램 설계, 프로세스 따위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알카이드든, 학자든 이 순간 감정을 절대 들어내지 않을 것임은 명확히 알고있었다. 그는 마치… 굳어진 높은 탑의 의지처럼. 그의 영혼을 차지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로지타]  

알카이드는 어디 있죠? 그를 어떻게 한 거죠?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알카이드?]  

그런 걱정은 무의미하다.  

 

내가 뒤에서 몰래 준비한 그림 소울이 그의 한마디에 소멸됐다.  

 

[알카이드?]  

적의를 가질 필요는 없다. 내가 말한 대로만 하면 돼. 

 

그의 말은 마치 명령 같았고, 한편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법칙처럼 들렸다. 나는 이를 악물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입술 사이에 피맛이 느껴진다.

 

[로지타]  

내가 당신 말을 듣는다고 어떻게 확신하죠?  

 

[알카이드?]  

너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을텐데.  

 

그는 조용히 자기 이마의 표식을 손으로 만졌다.  그것은 알카이드가 나를 기억하고 또 지웠던 흔적이었다.  

 

[알카이드?]  

이 몸은 너에게 중요하지 않나? 돌려주겠다.  

 

한순간, 나의 투쟁심은 사라졌다. 이 조건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지타]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는 건가요?  

 

[알카이드?]  

네가 변수가 되어라.  

 

[로지타]  

제 힘을 보여달라는 건가요?  

 

만약, 그가 내개 보인 관심이 내 그림소울에게만 향한다면… 

그림소울을 불러내자 그는 막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소울에게는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알카이드?]  

너의 능력은 그것이 전부가 아닐텐데.

 

눈 앞의 풍경이 뒤틀리기 시작하고, 나는 본능적으로 이게 시공의 문이라는 걸 알아챘다. 이걸 넘어서면 새로운 공간이 나오겠지. 그가 지시한 공간으로 가는 문이 보였다. 내 추측을 알아차린 듯,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카이드?]  

이것을 시험이라고 생각해라. 그곳에 들어가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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