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18. 21:08ㆍ신운기원/경칩 편 (알카이드)
이 공간의 가장 깊은 곳, 오직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나는 조용히 기억 속의 조각들을 뒤적이며, 시간을 거슬러 알카이드가 내게 남긴 메시지를 찾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 모든 것을 나누었고, 서로의 곁에 있었지만, 각자 방주 세계로 들어선 이후로 기억할 수 있는 일들이 극히 적었다.
같은 세계에 살면서, 같은 전투를 마주했지만, 시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내가 경험한 것은 단지...
기억 속에서 날카로운 고통이 밀려왔고, 그로 인해 주위에 떠다니던 빛과 그림자들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앞섶을 꽉 쥐었다. 그 감각은마치 피로 물든 칼날을 쥔 듯했다.
그것을 잡고, 그것을 꽉 쥐고, 그것으로 가장 직면하기 어려운 진실을 헤쳐 나가야 했다.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내가 여기 도달한 첫날, 그가 내게 전달한 것들을 기억하며 다시 그가 내 앞에 서 있던 순간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마지막 전투는 내 첫 전투이기도 했다.
마치 계주처럼, 전력을 다해 달리기 전에 그가 나에게 전달한 것을 받아야만 했다.
나는 반드시 그를 집중해서 봐야 했다.
그가 고통으로 떨리는 눈동자를 보고,
그의 몸이 파이프에 관통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손에 남은 화상 자국을 봐야 했다.
…내 숨이 갑자기 가빠지기 시작했다.
[로지타]
VHH……BRX……DJDLQ.
일견 아무 의미 없는 영문자들이 고탑의 기계 장치에 나타났다. 그 자리는 알카이드가 손끝으로 만졌던 곳이었다.
"이 사람들은 첫 번째 시대의 영주를 숭배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의 규칙에 따르면, 각 알파벳은 한 칸씩 앞으로 이동한다."
나는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손끝이 손바닥에 박혀 들린 날카로운 통증이 바다처럼 내 마음 속 더 큰 고통으로 흘러들어갔다.
시대 순서에 따르면, 숲의 영혼은 세 번째였다. 각 알파벳은 세 칸씩 앞으로 이동해야 했다.
V-U-T-S.
H-G-F-E.
H-G-F-E.
SEE YOU AGAIN
[로지타]
기억은 휘몰아치는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나는 그 격류 속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날을 움켜쥐고, 그 고통을 anchor 삼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그 모습을 붙잡으려 했다.
그가 곁에 없는 시간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처럼 길고도 길었다.
우리는 그 길을 외롭게 걸어왔고, 어쩌면 너무 멀리 와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로지타]
알카이드, 저는 꼭….
[알카이드]
See you again.
[로지타]
See you again.
순간, 공간 전체가 물결처럼 흔들리며 퍼져 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만질 수 없었지만, 되감기는 빛과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봄천둥이 울리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벌레들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세계는 다시금 고요를 되찾았다.
눈앞에는 오직 깨끗하고 텅 빈 공간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희미한 빛을 내뿜는 공간의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그 발소리에 반응하듯 흩어져 있던 빛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 빛들은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나처럼,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출구를 찾으려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공간은 언제부터인가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마치 틈 없이 닫힌 견고한 껍데기처럼, 나와 이 깨어난 의식들을 가두고 있었다.
[로지타]
(……이럴 리가……)
나는 힘을 모아 공간의 한쪽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나 미세한 진동만 일어날 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서서히,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나와 이 의식들은 여기서 영원히 갇혀버린 걸까……?
그때, 등 뒤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끝났어, 로지타.
삼켜졌던 빛이 공간을 다시 밝히는 순간, 내 등 뒤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그 리듬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에—— 알카이드가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혼란스러운 세계처럼, 그의 눈동자에도 흐르는 빛과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알카이드]
이 세계를 지배하던 질서는 이제 사라졌어……
그는 가볍게, 그리고 천천히 미소 지었다.
[알카이드]
네가 원하던 대로, 우리는 이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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