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구식 라디오

2024. 6. 27. 23:16현대 편/여름 메인 스토리

 침대 머리맡에는 구식 라디오가 하나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매일 누군가 들어와 청소를 하는데도 라디오 버튼 틈에 먼지가 쌓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시험 삼아 다이얼을 돌려보았다. 주파수 안맞는 구간에선 잡음이 들렸다. 스피커에 쌓인 먼지가 진동에 공기 중으로 퍼져 기침이 나왔다. 이내 알카이드가 다가왔다. 

 

[알카이드]

​내가 할게. 어떤 프로그램을 찾으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로지타]

확실하지 않아요...

 

[알카이드]

그럼 천천히 찾아볼까? 넌 소파에 앉아 있어. 하나씩 확인해 보자. 


 알카이드가 다이얼을 천천히 돌리자 음악 소리에 잡음이 섞여 들려왔다. 음악 소리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로지타]

아니에요. 제가 찾는 프로그램은 사람 말소리도 같이 들려요. 

 

[알카이드]

알겠어.


세심하게 다이얼을 돌리자, 이내 뭔가를 낭독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로지타]

이것도 아니에요...


 알카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주파수를 맞췄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많지 않았지만, 반복해서 다이얼을 돌리며 내 확인을 받는 작업은 굉장히 무미건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알카이드는 시종일관 인내심을 가지고 주파수를 맞췄다. 

 

[알카이드]

이제 마지막이야. 


 방안에 울리는 소리를 숨죽여 듣던 나는 결국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로지타]

아니에요. 


 알카이드가 소파로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알카이드]

로지타, 혹시 조세이아의 정신 이상 상태가 라디오 프로그램과 관련 있을까봐 그래? 

 

[로지타]

네...


 나는 작게 대답했다. '라디오 프로그램이라는 단어를 듣자, 예신이 들려준 과거 이야기가 별안간 떠올랐다. 


​-

 

 '완벽한 일반인'이 되기로 선택하기 전까지, 엄마는 이 세상의 침략자였다. 엄마는 라디오 주파수에 자신의 힘을 숨겨 세계 각지에 퍼뜨린 뒤, 사람들의 정신을 교란시기고 혼란에 빠지게 했다. 나는 알카이드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의 과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땐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알카이드는 시종일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죄책감에 내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자, 그가 가만히 내 손등을 덮었다. 

 

[알카이드]

자책할 필요 없어. 그건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그의 눈에서 그늘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깊고 맑은 달빛이 보였다. 


​-


다음날 알카이드는 페이먼트 섬의 한 도서관으로 날 불렀다. 도서관에 도작해보니, 그가 앉은 책상 위에 복사본이 여러 장 흩어져 있었다. 


[로지타]

선배, 이게 다 뭐예요? 


[알카이드]

어제 일에 대해 조사를 좀 해봤어. 


 그에게 다가가 자료를 건네받은 나는 호기심에 뒤적거렸다. 복사본 대부분은 경찰 수사 문건이었다. 및 장은 알카이드의 메모였는데 모두 페이먼트 섬의 정신 이상 행동과 관런된 것이었다. 

 

[로지타]

선배, 경찰서 갔다 왔어요? 

 

[알카이드]

응, 부모님 덕에 허락된 범위 안에서 일부 사례와 자료를 받아왔어. 


 알카이드는 담담하게 웃었다. 

 

[알카이드]

다 공개 가능한 자료야. 


 알카이드가 자료 몇 장을 내 앞에 뒀다. 저 자료에 중요한 정보가 있다는 것 같았다. 

 

[알카이드]

추가 설명을 적어놨는데 그거 때문에 조금 복잡해 보일 수 있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은 나한테 물어봐. 


 나는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사건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화가, 사진사, 무용수... 사건의 주인공은 모두 예술에 어느 정도 조예가 깊었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영감을 찾는 일에 열중했다. 

 

[로지타]

이 사람들... 조세이아랑 비슷하네요. 

 

[알카이드]

​맞아. 비슷한 사례만 선별해놨어. 


 알카이드는 자신이 동그랗게 표시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알카이드]

대부분 영감을 받기 위해 페이먼트 섬을 찾았다가 이상 행동을 보였어. 가족들이 와서 데리고 돌아간 후 몇 년이 지나서야 천천히 회복했지. 하지만 조세이아를 포함해 이곳을 떠나지 않은 몇 명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어. 

 

[로지타]

그렇다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게 페이먼트 섬에 있다는 거군요. 


 알카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표시한 지도를 하나 필쳐 보였다. 

 

[알카이드]

서른 명의 동선이야. 이상 행동을 보인 후로 이곳에 나타났지. 


 알카이드는 다른 기호로 각 인물의 동선을 표시하고, 이동한 장소와 지점을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알카이드의 도움으로, 나는 읽히고 설킨 실타래 속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들은 유적 전망대 부근의 등대를 자주 찾아왔고, 그 시간대는 모두 밤이었다. 

 

[로지타]

이 사람들은 정신 이상 상태가 나타나기 전에 유적 전망대에 있는 등대에 가 봤을까요? 


 알카이드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알카이드]

당시에 구체적으로 기록해둔 게 없어서, 연락이 닿은 사람은 다섯 명밖에 없었어. 모두 정신 이상 상태가 나타나기 전날 밤에 등대를 갔었대. 하지만 등대에선 아무 일도 없었고, 무슨 영향을 받은 것 같지도 않다고 했어. 

 

[로지타]

본인이 알아차릴 수 없는 영향 요소도 있는 법이죠. 


 알카이드는 나를 보면서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카이드]

아무래도 우리 둘 생각이 일치하는 것 같네. 그래서 이 자료는 어머니한테도 보내드렸어. 


 알카이드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부드러웠지만 조금은 난처한 눈빛이 었다. 

 

[알카이드]

로지타, 줄곧 너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우리 어머니와 동료분도 페이먼트 섬에 임무를 수행하러 오셨어. 이 섬에는 알 수 없는 일이 많대.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최대한 피하라고 하셨어. 


 섬에서 처음 마주친 날, 농담처럼 나를 데려가려고 왔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로지타]

우리는 학생이니 믿음직한 어른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거군요? 


알카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카이드]

그것보단... 다치지 않게 널 지켜주라는 뜻이야. 우리 둘 다 어머니한테는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그러니 로지타, 우리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아무래도 내가 진실을 찾기 위해 등대로 가려는 걸 눈치채고 어머니의 편에 선 것 같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로지타]

등대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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